“문송면 그는 열다섯 꽃다운 나이에 수은중독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우리 노동자가 얼마나 참혹한 환경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일하고 있는가를 생생하게 증거했습니다. 이곳은 머지않아 그의 부활의 터전이 되고 앞으로 산업재해 없는 새 세상을 이룰 때까지 모든 노동 형제들이 그 뜻을 새겨나갈 첫출발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문송면 떠난 지 30년 지났지만온도계 공장에서 일하다 1988년 7월2일 수은중독으로 숨진 15살 문송면의 묘비에 쓰인 글이다. 지난해 12월11일 새벽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숨진 24살 김용균도 문송면이 잠들어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에 2월9일 잠들었다. 사고로 숨진 지 62일 만이었다.
문송면의 죽음으로 한국 사회는 ‘산업재해’라는 말을 처음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1천여 명의 피해자가 생긴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고발이 이어지며, 1981년 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은 9년 만인 1990년 전면 개정됐다.
물론 그 뒤에도 일터에서 병이나 사고로 목숨을 잃는 이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문송면이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나 지났지만 2018년 김용균은 일터에서 숨졌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위험의 외주화’의 심각성을 환기시켰다. 20년 넘게 정부가 추진해온 발전 정비 산업 경쟁 도입(민영화)에도 제동을 걸었다. 1990년 이후 크게 바뀌지 않았던 산안법의 전면 개정을 28년 만에 이끌었다. ‘산업재해 없는 새 세상’에 한 발 더 다가섰다.
‘김용균법’이라 일컫는 산안법 전면 개정안은 국회 통과 하루 전인 2018년 12월26일까지도 그 운명을 가늠할 수 없는 법안이었다. 그날치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고용노동소위 회의록을 보면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산안법 개정안 가운데 도급인(원청)의 책임이 강화되는 조항 등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원청에서 도급을 주기 전에 관리 책임을 일일이 다 현장마다 안전책임자를 (정)하고, 이게 쉽지 않다” 등의 발언을 하며 경영계의 주장을 대변했다.
하지만 김용균의 장례를 미루고 국회를 찾은 어머니 김미숙씨의 눈물 어린 호소와 자유한국당의 요구를 받아들인 청와대의 결정으로 법은 극적으로 통과됐다. 김용균 같은 발전소 정비 노동자들은 외주화 금지 대상에 포함되지 않아 한계가 있지만 개정된 산안법은 ‘1보 전진’이라는 평가가 따른다.
산안법 개정안은 법 적용 대상을 ‘근로자’에서 ‘노무를 제공하는 자’로 확대해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특수형태 근로종사자, 배달 노동자, 가맹사업 종사자 등을 법의 테두리 안으로 끌어들였다. “도금·수은·납·카드뮴 작업 등 유해물질을 다루거나 위험성이 높은 작업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도급(하청)을 금지하며 ‘위험의 외주화’ 범위를 일정 부분 제한했다. 사업주의 도급 책임 범위를 확대해 원청의 산업재해 예방 책임도 강화했다. 또 다른 ‘김용균들’이 조금이나마 비빌 언덕이 생긴 것이다.
발전노동자 정규직화 논의‘김용균법’에 포함되지 않은 김용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20년 넘게 추진해온 발전소 정비 산업 시장 개방 정책의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 이는 그동안 공기업 발전소의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다치거나 죽는 일이 빈번했지만 쉽게 바뀌지 않던 높은 벽이었다. 김용균의 죽음으로 이 벽을 낮추거나 허무는 것을 논의할 틀이 마련됐다. 정부와 여당은 김용균법 후속 대책 당정 협의로 김용균이 맡았던 발전소 연료·환경 설비 분야 노동자 2200여 명을 자회사를 통해 직접고용하는 방안에 합의했다. 5개 발전사의 노·사·전(노동자·사용자·전문가) 통합협의체를 꾸려 이를 논의한다. 일상적 정비·유지 업무를 맡는 경상 정비 인력 5286명(2018년 8월 기준·공기업 한전KPS가 2195명, 민간 업체 3091명)은 정규직 전환 대상에서 빠졌지만 통합협의체에서 정규직 전환 여부 논의를 진행할 예정이다. 애초 노동자들이 요구하던 발전소 직접고용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들의 정규직화 논의에 부정적 태도를 보여온 정부의 정책 방향에 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평가다. 당정협의에 참여했던 여당 관계자는 “(이명박 정부부터 진행돼온) 발전 정비 시장 경쟁 도입 정책’ 2단계(공기업 한전KPS의 정비 물량을 민간 업체에 넘기는 것)는 사실상 폐지된 걸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당장 오늘도 일터에서 일해야 하는 ‘김용균들’의 안전을 강화하는 조처도 이뤄졌다. 서부발전은 약 200억원을 들여 태안화력발전소 석탄 운반 컨베이어벨트 주변에 안전커버·펜스 등을 설치하는 등 안전 설비를 대폭 보강하기로 했다.
주무 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는 기존 발전소 정비 민간 업체들이 전문성이 떨어져 인력 파견 회사에 불과하다는 문제를 개선하고, 하청업체가 계약을 따내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받아야 할 노무비(월급)가 반 토막 나는 관행도 바꾸기로 했다.
기존 최저가 낙찰제를 기술력·안전관리 역량·정규직 비율 등을 평가하는 종합심사 낙찰제로 바꾸기로 했고, 노무비가 제대로 지급됐는지 확인하는 것을 발전회사-정비 업체 간 계약 내용에 반영키로 했다. 기존 민간 업체 정비노동자들이 3년 계약에 따라 해고와 재취업을 반복하는 문제도 정비 계약 기간을 6년으로 늘려 고용 안전성을 조금 높였다.
당장 이러한 조처들로 공기업인 한전KPS가 발전소 운영·정비 시장의 47%(2018년 기준)를 점유하고 나머지를 9개 민간 업체가 나눠 가지는 현행 구조에서 민간 하청 업체의 점유율이 낮아지는 방향으로 바뀔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김용균은 이제 세상에 없지만 그가 남긴 것들을 헛되이 날려버리지 않기 위한 노력도 계속된다. 국무총리실 아래 설치되는 석탄발전소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진상규명위원회)는 김용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구조적 문제와 노동 현장의 안전·보건 문제 등을 주요 의제로 삼아 6월30일까지 활동한다.
유족, 고 김용균 시민대책위가 추천하는 전문가와 현장 노동자 등으로 구성되는 진상규명위원회는 사고 원인 조사 결과와 재발 방지 방안을 정부·여당에 낼 예정이다. 시민대책위와 한국서부발전 사이의 합의에 따라 가칭 ‘김용균 재단’ 설립도 추진된다. 김미숙씨 등 유족은 이 과정에 꾸준히 참여할 계획이다.
대통령 만나는 유가족20여 년간 하청업체 생활을 해오며 김용균의 죽음을 알리기도 했던 이태성 발전비정규직연대회의 간사는 “2014년 친한 동생이 보령발전소에서 유사한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등 많은 노동자의 죽음을 목격해왔다. 김용균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던 것에 죄책감도 들었다. 이제는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김용균은 생전에 ‘문재인 대통령, 비정규직 노동자와 만납시다’라는 손팻말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그는 없지만 그의 가족이 대신 2월18일 문재인 대통령을 청와대에서 만난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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