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3월 대통령 선거 후보 시절에 국정 농단 특별검사 활동 종료에 대한 소감을 밝히면서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말이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믿기 힘든 ‘불의’가 드러났다. 2017년 9월, 2012∼2013년 합격자 518명 전원이 청탁 대상자였던 강원랜드 부정 채용 게이트가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지역사회 전체가 얽힌 부패 커넥션의 전모가 확인됐다. 공공기관에서 시작한 채용 비리는 이어 우리은행 등 공공성을 띤 민간기업에서도 드러났다. 급기야 문재인 대통령은 ‘공공기관 채용 비리 전수조사’ 등을 관계 기관에 주문했다. 당시 얼어붙은 취업 시장 속에서 탈락한 취업준비생들은 좌절감과 박탈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후에도 부정 채용으로 탈락한 지원자들의 피해는 진행형이다. 부정 채용이 잇달아 드러났지만 피해 사실 입증이나 입사가 늦어진 기간에 대한 경력 인정 등 ‘정의를 회복’하는 실질적 후속 조처는 여전히 지체됐다.
강원랜드, 금융감독원에 이어 수서고속철도 운영사 에스아르(SR) 부정 채용 피해자가 1월11일 SR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날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SR 채용 비리 피해자 ㅂ(27·여)씨는 말했다. “내 능력을 탓하며 다른 길을 선택해야 했다. SR가 내놓은 미흡한 구제 조처로는 그동안 느낀 상실감과 박탈감을 충분히 보상해주지 못한다. 이번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통해 만에 하나라도 부정 채용 피해자가 다시 생기면 피해자가 납득할 수 있는 별도의 보상 조처와 제대로 된 사과를 받았으면 하는 마음에 소송을 냈다.”
강원랜드, 금융감독원, SR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맡은 법무법인 ‘덕수’의 정민영 변호사는 에 “차별 없는 공정한 사회, 신뢰할 수 있는 사회는 공정한 채용에서 출발한다. 이 때문에 채용 비리 피해자들에게도 실질적인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피해자가 느낀 상실감과 좌절감 등 정신적 고통을 보상받을 수 있는 수단은 손해배상 청구소송뿐이다. 피해 사실을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입증하기도 쉽지 않다. 수사기록 등을 확보해야 그나마 피해를 입증할 수 있어, 더 적극적인 피해 구제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친인척·지인 부정 채용 드러났지만…</font></font>2014년 한국철도공사(코레일) 계열사에 입사해 역무원으로 일하던 ㅂ씨는 2015년 SR 설립 소식을 들었다. “SR가 만들어졌을 때 ‘고속철도 여객 서비스를 선도하겠다’고 했다. 더 전문적으로 일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SR는 경부고속선 등의 고속철도를 운영하는 ‘기타 공공기관’이다. 이에 ㅂ씨는 철도 관련 자격증을 따며 입사를 준비했다. SR에서 진행한 공모전 등에도 참여했다. ‘2016년도 SR 신입 직원 채용’ 절차에 지원한 ㅂ씨는 서류전형과 인·적성 검사를 통과했다. 면접관들은 ‘개통 멤버로 들어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왜 이제야 지원했느냐’고 했다. 하지만 최종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ㅂ씨는 왜 떨어졌는지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야 했다. 면접을 처음부터 복기했다. 면접관들의 질문에 ㅂ씨가 확실히 대답하지 못한 질문은 한 가지뿐이었다. ‘기존에 다니던 회사의 설립 이념과 비전이 뭔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ㅂ씨는 이후에도 이 질문을 수십 차례 곱씹었다. ‘토익 시험 점수가 낮았나? 자격증이 부족했나? 아직 경력이 짧았나?’ ㅂ씨는 자신을 탓했다. 이후 ㅂ씨는 다른 유관 회사로 옮겨 철도 종사자로 일했다.
그러다 ㅂ씨는 2017년 강원랜드 등 공공기관에서 부정 채용이 있었다는 언론 보도를 접했다. 이후 지난해 5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다’라고 했다.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ㅂ씨는 보이스피싱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세 차례나 전화가 왔다. ㅂ씨가 자신이 SR 부정 채용 피해자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때다. 최종 면접에서 떨어진 지 2년 만이다. “당시 같이 면접을 본 한 지원자가 자신이 철도 기관사 딸이라고 했다. 면접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면접관은 오히려 ‘몇 호선에서 일하냐?’ ‘이름이 뭐냐?’라고 물었다. 찜찜했다. 그래도 다른 지원자의 부모 백이나 연줄이 나한테도 피해를 줄지는 몰랐다.”
경찰 조사 결과 2015년 7월부터 2016년 9월까지 전·현직 임직원 가족과 친인척, 지인 등 24명을 부정 채용하기 위해 전·현직 임직원은 물론이고 노동조합 위원장까지 채용 절차에 가담한 사실이 밝혀졌다. 취업 청탁의 대가로 금품을 받거나 특정 지원자를 뽑기 위해 다른 지원자의 점수나 순위를 바꾸는 불법행위를 저질렀다. 당시 최종 5명을 뽑는 면접에서 15위이던 지원자를 5위로 끌어올려 합격시켰다. ㅂ씨는 지난해 11월 SR가 공지한 ‘SR 채용 비리 피해자 구제 제한경쟁 채용공고문’에서 면접 단계에서 탈락한 피해자로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SR가 몇 달간 피해 구제를 기다린 ㅂ씨에게 내놓은 구제 조처는 신입 역무원으로 즉시 채용 기회를 제공하는 것뿐이었다. ㅂ씨는 경찰 조사 때 피해 사실을 처음 알았지만 이때까지도 SR 쪽으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했다. 2014년부터 한국철도공사 계열사에서 일하다가 현재 다른 유관 회사에서 매표 등의 업무를 하면서 역무원 경험과 전문성을 쌓았는데도 그 경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ㅂ씨가 SR에 입사하더라도 신입 역무원과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하는데도 입사가 늦어진 기간에 대한 별다른 보상 조처가 없던 셈이다. 결국 ㅂ씨는 즉시 채용 기회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ㅂ씨는 “면접에서 떨어진 후 고속철도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안 좋았다. ‘SR에 합격했다면 어땠을까’라고 자주 생각했다. 하지만 SR는 자신들의 불법행위가 명백하게 밝혀졌는데도 책임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신입 역무원과 똑같이 대우해준다는 게 고작이었다. 채용 비리 이후 현재까지 3년 사이에 달라진 피해자들의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조처다. 이번 소송으로 다른 피해자라도 실질적인 구제 조처를 받았으면 한다”고 했다.
정부는 지난해 5월 ‘채용 비리 피해자 구제 세부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부정 채용으로 다음 채용 단계 응시 기회를 제약받은 지원자에게 재응시할 기회를 주는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이는 피해자나 피해자 범위를 특정할 수 있는 경우에 한해서였다. 실제로 ㅂ씨가 경찰 조사를 받으면서 부정 채용 사실을 알게 됐다면, 금융감독원 부정 채용 피해자 ㅇ(35)씨는 언론 보도로 이를 알게 됐다. 결국 ㅂ씨도, ㅇ씨도 자신이 직접 SR와 금융감독원에 먼저 연락해 ‘내가 부정 채용 피해자인데, 피해자 구제 계획이 있는지’를 물어야 했다. ㅇ씨는 에 “금융감독원 부정 채용을 고발한 언론 보도를 봤다. 그때까지도 몰랐다. 하지만 금융감독원에서 일하는 지인이 ‘나인 것 같다’고 했다. 기사를 다시 보니까 내가 금융감독원에 지원한 때였다. 지인이 아니었다면 피해 사실도 몰랐을 거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언론 보도 보고 피해 사실 확인하기도 </font></font>ㅇ씨는 “당시 필기전형을 잘 봤다고 생각해 기대가 컸다”고 했다. ㅇ씨는 ‘2016년도 신입 직원 채용’ 절차에서 필기시험과 면접 점수를 합한 결과 해당 분야 지원자들 가운데 1등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ㅇ씨는 “최종 합격한 지원자가 나보다 뛰어난 사람일 거라고 당연히 생각했다.” ㅇ씨는 금융감독원에 들어가려고 재수를 했다. 2015년도 신입 직원 채용 때 필기전형에서 떨어진 ㅇ씨는 문제를 복기하며 2016년도 시험을 준비했다. 불합격의 고배를 다시 마신 ㅇ씨는 연수를 받던 다른 보험사에 입사했다. “날 필요로 하는 곳에서 열심히 일해야겠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경찰 조사 결과 원래 채용 계획에도 없던 세평(평판) 조회가 2차 면접을 마치고 합격 예정자가 정해진 상황에서 단 하루 만에 이뤄진 사실이 드러났다. 직장 경력이 있는 지원자 가운데에서도 일부만 했다. ㅇ씨는 “세평 조회 결과 ‘금융공학에 대한 전문 지식이나 열정이 부족하다’고 했다. 하지만 전 직장에서 불과 4개월 일했다. 전 회사 쪽은 세평 조회에 회신한 적도 없다고 한다. 게다가 금융공학 전문 지식은 필기전형을 거쳐 확인했다. 단순히 참고 자료로 활용하는 것도 아니고 세평 조회로 합격 예정자를 떨어뜨린 셈이다.”
ㅇ씨는 금융감독원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법원은 지난해 10월 ‘금융감독원에 ㅇ씨가 느꼈을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 8천만원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만 제한적으로 인정했다. 사용자가 부정 채용으로 탈락한 지원자가 느꼈을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를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인정한 첫 판결이었다. 그러나 ㅇ씨를 직원으로 채용할지는 금융감독원의 자율적 판단에 달렸다며 금융감독원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신체검사와 신원조사 후 원장의 임면을 거쳐야 한다’는 이유를 들었다. 미지급 임금 상당액의 재산상 손해배상 청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채용 비리 3년 만에 입사… 금감원, 손배소 항소 </font></font>뒤늦게 지난해 11월 ㅇ씨는 금융감독원에서 채용 의사를 묻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금융감독원 채용 비리 사건과 관련해 청와대 누리집에 국민 청원이 올라온 적이 있다. 청원에 참여한 수는 적었지만 응원해준 사람들에게 고마웠다. 제삼자가 보더라도 부정 채용은 박탈감과 좌절감을 느낄 수 있는 문제다. 그나마 금융감독원은 신입 직원이어도 전 직장 경력을 일부 인정해주는 내규가 있지만 다른 부정 채용 피해자들이 체감할 만한 실질적 보상이 필요하다.” ㅇ씨는 1월15일 금융감독원에 신입 직원으로 입사했다. 최종 면접에서 떨어진 지 3년 만이다. 하지만 금융감독원이 제기한 항소심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조윤영 기자 jyy@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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