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훨훨, 이제는 편히 지내시길

남은 사람들이 김복동 선생님의 삶과 역사를 붙들고 되새겨야 할 것들
등록 2019-02-03 00:51 수정 2020-05-03 04:29
한겨레 이정아 기자

한겨레 이정아 기자

김복동(사진). 이름을 가만히 불러봅니다. ‘위안부’ 피해자, 평화운동가, 여성인권운동가 수식어가 따라다닙니다. 그녀를 추도하고 기억하는 수많은 글에서 김복동은 그렇게 불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웅, 우리의 마마, 우리의 희망”이라는 찬사도 있습니다. 세계 무력분쟁 지역의 성폭력 피해자들이 김복동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스스로에게 다시 질문하던, 섬세하면서 투박한</font></font>

김복동 ‘할머니’와 함께했던 순간들이 떠오릅니다. 한국과 일본의 공개적인 강연과 증언이 이루어지는 장소에서, 숙식을 같이하던 사적인 자리에서 저는 가까이에서 ‘할머니’의 말을 듣고 표정을 보았습니다. 몇 번 대화도 나누었습니다. 거듭될수록 마치 단색으로 깔끔하게 칠해진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이자 평화인권운동가 김복동이라는 상이 깨져나갔습니다.

내가 마주 대한 그녀는 균열적이고 때론 모순적인 경험과 생각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말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하고 어려워했지만, 아주 ‘센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고 조선학교를 억압하는 일본 정부에 적대적인 말을 쏟아내다가도 일본(인)의 여러 피해에 관심 갖고 ‘동정’하며 사재를 털어서 지원하려 했습니다. 민족주의와 가족에 대한 고색창연한 생각을 말하다가도 불쑥 탈식민주의와 페미니즘적 인식이 엿보이는 감각을 응축해서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자신을 향한 많은 질문에 응답하면서도, 동시에 그 응답을 자신에게 질문으로 던지며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자신이 어렵사리 뱉은 말이 흩어지고 남은 말이 맥락 없이 자신을 ‘위안부’의 전형으로만 틀 지울 것임을 알면서도, 언론과 기자에게 최선을 다해 많은 말을 하고 부탁했습니다.

2018년 여름 암 투병 중에 일본으로 가서 조선학교 학생들에게 ‘김복동의 희망’ 장학금을 주고, 일본의 ‘위안부’ 문제 지원단체 활동가들을 격려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저도 알 수 없는 여러 감정들의 분열과 봉합에 휩싸여야 했습니다. 최근에 와서야 김복동이 켜켜이 쌓아온 삶과 역사를 맥락에 두고 그녀의 균열적인 말과 행동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제겐 김복동의 내면을 깊이 이해할 시간도, 능력도 없습니다. 다만 이런 날을 맞다보니 김복동의 삶과 역사를, 무엇보다 그녀가 버려졌다가 생환해서 한국에서 살아온 삶과 경험이 어떠했을지, ‘귀환’ 이후 ‘커밍아웃’하기 전까지 그녀가 맺어온 사람 관계가 어떠했을지 여러 생각을 하게 됩니다.

김복동은 1992년 여름부터 ‘우리’ 앞에 섰습니다. 그해 시작된 수요시위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처음으로 개최된 아시아연대회의에서 증언했습니다. 1993년에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세계인권대회에 참석했고, 유엔인권위원회에도 참석해 증언했습니다. 세상의 중심에서 피해 사실을 여성인권의 이름으로 웅변했습니다. 새로운 삶이었습니다. 그 이전 그녀의 삶, 관계의 속박과 말 못할 고통을 뚫고 나온 삶이었습니다.

김복동은 그녀가 원망하면서도 사랑했던 어머니의 딸이었습니다. 일찍 돌아가셨지만, ‘복 받는 아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아버지의 딸이었습니다. 세 친언니의 동생이었습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빛바랬거나 떠올리기 힘든 배우자도 둘 있었습니다. 부모님의 제사를 지내주는 조카를 비롯해 여러 조카들의 이모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이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전쟁기 경남 양산에서 벌어진 마을 주민들의 예비검속과 학살을 기억하고 있지만 서슬 퍼런 반공주의로 숨죽이고 산 국민이었습니다. 그 관계의 삶 속에서 일본군 ‘위안부’ 경험은 그녀에게 어떤 힘으로 작용했을까요?

<font size="4"><font color="#008ABD">“내가 겪은 일들을 이해할 길이 없었어”</font></font>

수치, 굴욕, 공포, 침묵, 부인이 뒤섞인 세월이었습니다. 가족과 공동체가, 사회가 부끄러워하는 존재였습니다. 심지어 스스로 수치심을 내면화하고 자기부정 하기도 했을 겁니다. 예순이 훌쩍 넘어서 “내가 나를 찾으려고 신고”하려 했을 때 큰언니가 “조카들을 생각해서라도 제발 가만히 있으라”고 했습니다. 1992년 1월17일 피해자임을 신고했을 때 큰언니와 조카들은 그녀를 떠났습니다. 나중에는 이른바 피해자 자격, 증언의 자격 유무를 국가와 민족, 사회로부터 승인받아야 하는 또 다른 가해 구조에 고통받아야 했습니다.

김숨 작가의 (2018)를 읽으면서 숨이 죄여왔습니다. “내가 겪은 일들을 이해할 길이 없었어”라는 말에, 김복동이 끊임없이 스스로 묻고 답하는 구술 속 문장들에 아로새겨진 고통과 날선 감각에 압도됐습니다.

평화와 인권 운동가 김복동의 ‘말하기’와 ‘고통의 연대’는 그런 낙인과 속박, 고통을 뚫고 나온 것입니다. 한두 해로 이루어진 게 아니겠죠. 일본대사관 앞 수요시위가 벌써 27살이 되었습니다. 피해자이자 운동가로서 김복동이 희망 씨앗을 뿌리고 희망 나비를 훨훨 날려 보낼 수 있었던 것은 그런 힘(임파워링)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귀담아듣고 함께하는 ‘우리’가 김복동‘들’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앞에 당당히 서 있는 김복동 ‘할머니’의 모습을 끌려간 ‘소녀’ 복동(福童)으로부터 바로 가져오지도 말고, 그래서 “흰 저고리를 입(히)고 뭉게구름 가득한 열네 살 고향 언덕으로” 돌려보내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보다 일본뿐 아니라 한국 정부와 사회, 가부장제로부터, 그리고 부정론과 역사수정주의에 의해 이중삼중으로 버려졌지만, 우리 앞에 서기까지 삶의 과정과 역사, 가족과 사회 관계를 깊게 이해하고, ‘현재화된 과거사’에 대한 김복동의 말과 운동을 주목해야 합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여러 차례 김복동 할머니가 일본 정부(특히 아베 정부)에 사죄를 강력히 요구해왔지만, 일본의 사죄를 이끌어내는 증거로만 김복동 할머니가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본 대 김복동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라는 구도는 여러 겹의 진실을 은폐하는 것입니다. 한국 정부도 이 구도를 방관하고 심지어 적극 조성해왔습니다. 국회와 법원이라고 사정이 다르겠습니까?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의 국회, 양승태 대법원의 삼각 공조를 통한 억압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1965년 한일협정 수준으로 심각하게 되돌리는 것이었습니다. “가문의 수치” “화냥년” 운운하며 입 다물 것을 한때 요구했던 한국(가부장제) 사회의 자화상은 벌써 망각됐습니까? 국가와 민족의 피해 (소녀) 재현으로만 ‘위안부’ 피해자의 자격을 승인했던 과거를 냉정하게 비판적으로 돌아봐야 합니다. 국가와 민족에 동일시한 채 그녀들의 말을 듣지 않거나 조롱했던 또 다른 ‘우리’는 그 가해 구조의 공모자가 아니었을까요?

<font size="4"><font color="#008ABD">이렇게 오래 걸릴 줄 알았다면 말하지 말걸</font></font>

저도 김복동 할머니의 영면을 너무나 간절히 빕니다. 훨훨 날아가서 이제는 좀 편안해지길 빕니다. 2017년 12월1일 저와 함께 서울대 인권센터의 한 강연에서 김복동 할머니가 한 학생의 질문에 답하기 전에 나지막이 혼잣말을 했던 게 너무나 생생합니다. 이렇게 오래 걸릴 줄 알았다면 말하지 말걸 그랬다는 이야기. 그때는 한없이 죄송했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진실을 길어 올리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단단히 다짐하곤 합니다. 그 진실은 결코 일본 정부의 사죄(법적 책임)와 배상에 국한되는 게 아닙니다. 그 진실이 거울이 되어 비추어야 할 ‘우리’의 안과 밖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강성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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