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KTX 해고 승무원 280명이었다. 2006년 한국철도공사에 직접 고용을 요구하며 파업을 시작했다. 두 달 뒤 자회사로 돌아가길 거부한 승무원 280명은 한꺼번에 해고됐다. 복직 투쟁 초반에만 해도 280명이라는 숫자, 서로의 존재가 곧 힘이었다. 하지만 동료들은 조끼를 벗고 하나둘 떠났다. 그렇게 나는 34명만 남았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우아한 투쟁의 시작</font></font>열차에서 내린 뒤 나는 ‘파업둥이’의 엄마가 됐다. 또 다른 나는 재취업을 했다. 당장 생계가 급했다. 하지만 파업 경력은 재취업에 족쇄가 됐다. 여전히 나는 KTX 해고 승무원이었다. 2008년 서울역 뒤편 40m 높이의 철탑에 올라 고공농성을 벌였다.
7년 동안 벌인 해고 무효 소송도 결국 패소했다. 2008년 근로자 지위 확인 청구 소송을 제기해 1·2심 모두 승소했다. 하지만 2015년 대법원은 갑자기 회사 쪽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 판결 뒤 한 동료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남은 33명은 지난 5월 10여 년 만에 다시 서울역에 천막을 쳤다. 해고 승무원 33명은 나였고, 나는 해고 승무원 33명이었다. “함께였기에” 복직 투쟁을 벌인 지 4526일 만에 나는 회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9월10일 30명의 나는 특별 채용 면접을 보러 KTX 열차에 다시 올랐다. 3명은 면접에 불참했다. 한국철도공사가 지난 7월 KTX 해고 승무원 180여 명을 특별 채용하기로 한 데에 따른 첫 조처였다. 햇수로 13년 만이다.
면접 전날인 9월9일 나(옥유미)는 밤잠을 설치다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면접 당일(9월10일) 농성 때 전경들과 맞서 “‘딸들을 건드리지 마라’라고 소리치며 스스로 인간 방패가 됐던 친정엄마”(제민경)는 손수 아침밥을 차려줬다.
“‘KTX 승무원 원직 복직 직접 고용’이라고 적힌 조끼”(김승하)는 잠시 벗어뒀다. 대신 “면접을 보려고 고민 끝에 새로 장만한 정장”(문은효)을 꺼내 입었다. 조끼를 벗고, 정장을 입고 구두를 신은 “우아한 투쟁”(김민정)이었다.
비슷한 시각 집을 나선 나(김미향)는 첫째 아이(8)에게 “엄마 진짜 일하러 부산역에 갈게”라고 말하며 손인사를 했다. 오전 11시30분께 서울역 대합실에 정장 차림의 30∼40대 KTX 해고 승무원 20여 명이 모여들었다. 2005년 채용된 마지막 기수(4기)이자 막내였던 나(김경은)도 그새 34살이 됐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출퇴근길, 투쟁 길, 면접 가는 길</font></font>낮 12시께, 나는 127호 경부선 KTX 열차에 입석으로 올라탔다. 지난 13년간 경부선 KTX는 한국철도공사 대전 본사로 농성을 벌이러 갔던 전선이었다. “타는 것만으로도 서러웠던 노선”(남소영)이었다. 부산에서 근무했던 해고 승무원 9명에게는 “하루에 한 차례씩 뛰었던 노선”(박정현)이었다. 객실 자동문이 열리자 습관적으로 눈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배운 게 도둑질”(김진옥)이었다.
13년이 흘렀다. 낯선 얼굴의 승무원 후배들이 통로를 오갔다. 회색빛이던 승무원 유니폼은 이제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안내 방송은 아직 그대로”(차미선)였다. 객실 자동문을 열고 한 승객이 “식사 있어요”라고 물었다. 나는 곧바로 “식사 없습니다”라고 익숙하게 답했다.
함께 입석으로 내려가던 승객들은 평온한 표정이었다. “2004년 ‘지상의 스튜어디스’ 1기로 KTX 개통 열차에 탑승해 승객들의 불평불만을 받아내던 열차”(박지예)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선배 3명과 함께 ‘견습 승무원’으로 열차를 탔던 4기 막내들이 실제 KTX 열차를 탔던 기간도 겨우 5개월이었다.
오후 1시10분께, 대전역에 내렸다. 대전역에서 한국철도공사 본사까지 가는 길은 익숙했다. 1인시위를 벌이며 농성을 하며 오갔던 길이다. 하지만 회사의 문턱은 높았다. 1인시위도, 농성도 회사 앞에서만 했다. 회사 내부는 “한 번도 들어가본 적 없는 구역”(김영선)이었다. 그나마 근무할 때 드나든 본사도 대전이 아니라 서울이었다. 한국철도공사는 2009년 지금의 대전시 동구로 본사를 옮겼다.
회사 문턱을 넘기까지 13년이 걸렸다. 하지만 내가 갈 곳은 없었다. 회사 쪽이 안내해준 대기실은 ‘고객 접견실’이었다. 채용 담당자라고 밝힌 회사 쪽 관계자는 “30명이 6개 조로 나눠 면접을 본다”고 했다. 과거의 팽팽하고 첨예한 대립과 대치 구도는 아니었다. 회사 쪽은 해고 승무원들과 마주 보고 나란히 서서 대화를 나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13년 만에 넘어보는 코레일 문턱</font></font>“기념사진 찍자”(오미선)는 외침에 나는 잰걸음으로 로비로 나갔다. 하지만 어디에서 사진을 찍으면 좋을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회사 문밖은 익숙했지만 문안은 낯설었다.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대열을 정돈한 나는 상기된 얼굴로 기념사진을 남겼다.
면접 시간이 임박해졌다. 1조가 오후 1시35분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첫 면접을 보러 떠나는 1조를 쳐다보며 다 함께 “파이팅!”이라고 외쳤다. 안개에 싸여 있던 특별 채용 면접이었다. “계속 투쟁할 것이냐” “그동안 뭐 하고 지냈냐” 등의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20분 넘는 첫 번째 면접이 끝났다. 면접을 마친 1조를 우르르 에워쐈다. “뭘 물어봤느냐”고 거듭 물었다.
‘자기소개를 시켰다’는 면접 후일담에 대기실은 술렁거렸다. 한 동료는 자기소개하다가 눈물을 쏟았다고 했다. 옛날 생각이 나니 서러웠단다. 면접 전부터 지금까지 겪은 고생길이 떠올라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던 그녀였다. 나는 정신없이 자기소개하다가 인사말마저 잊기도 했다. “자기소개 말미에야 기상 캐스터처럼 이름 석 자”(옥유미)를 밝혔다. 내겐 “마흔 줄에 다시 본 면접”(강영순)이었다.
10여 년 전 첫 면접을 봤던 당시 모습이 떠올랐다. “20대는 열정이었다면 30대는 연륜과 지혜”(박선미)로 면접을 치렀다. 누군가를 밟고 일어서는 경쟁관계도 아니었다. “동료들의 얘기를 귀 기울여 듣는 자리”(김미향)였다. 박정현씨와 남소영씨는 입사 직후 교육받을 때도, 열차를 탈 때도, 이날 면접을 볼 때도 언제나 같은 조 짝이었다. 나는 “옆에 있는 동료가 실수하지 않길” 마음속으로 바랐다.
먼저 떠난 동료의 빈자리는 더욱 커졌다. 2015년 대법원이 1·2심 판결을 뒤집고 “코레일과 KTX 승무원 사이 직접 근로관계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회사 쪽 손을 들어주자, 박아무개 승무원은 이를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해고 승무원 수는 34명에서 33명으로 줄었다. 나는 “먼저 떠나간 동료의 명예라도 회복해줘야 한다는 의지”(배귀염)로 끝까지 버텼다.
철도 노사가 KTX 해고 승무원 복직에 합의하고 나서야 주위 사람들에게 ‘감사하다’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은사는 “주변 노동자들을 돌아볼 줄 아는 노동자가 됐으면 좋겠다”고 제자(차미선)에게 당부했다. 하지만 영원히 비어 있는 박아무개 승무원의 자리는 “조금만 더 기다려줬다면, 더 버텨줬다면 함께였을 자리”(배귀염)였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승무원이 될 때까지</font></font>면접은 오후 4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10월 초부터는 8주 동안 교육을 받는다. 이후 뿔뿔이 흩어질 터다. 근무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나머지 특별 채용 대상자들은 내년 말까지 단계적으로 면접을 볼 예정이다.
회사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열차에 다시 오르지 못했다. 회사 쪽은 “승무원 전환 배치를 희망하는 사람은 향후 절차에 따라 시행하겠다고 합의했다”며 가능성을 열어두긴 했다. 나는 414호 KTX 열차를 타고 서울로 다시 향했다. 이번에도 ‘KTX 해고 승무원’이라 밝히고 열차에 올랐다. “해고 승무원이라는 사실을 거듭 실감하는 순간”(박미경)이다.
“2006년 해고 이후 13년째 비정상적인 하루”(남소영)가 또 지났다. 내게 정상적인 하루는 “남들처럼 평일에는 일하고, 주말에는 쉬는 평범한 삶”이었다. 복직 투쟁을 벌인 지 4526일 만에 회사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평범치 않다.
<font color="#008ABD">글 </font>조윤영 기자 jyy@hani.co.kr<font color="#008ABD">사진 </font>박승화 기자 eyeshoot@hani.kr*기사는 KTX 해고 승무원 30명 모두를 인터뷰한 것을 바탕으로 ‘나’의 이야기로 재구성했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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