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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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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힝야 학살 1주기’ 깊어진 폭력의 상흔

세이브더칠드런 ‘로힝야 어린이와 가족 인터뷰’…

학살의 기억과 힘겨운 난민캠프 생활
등록 2018-08-31 00:03 수정 2020-05-03 04:29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난민캠프에 사는 로힝야(로힝자) 난민 소년 아지즈(8·가명)가 목발을 짚고 서 있다. 아지즈는 지난해 미얀마 라카인주에서 벌어진 로힝야 학살 때 군부의 총에 맞아 왼쪽 다리를 잃었다. 세이브더칠드런 제공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난민캠프에 사는 로힝야(로힝자) 난민 소년 아지즈(8·가명)가 목발을 짚고 서 있다. 아지즈는 지난해 미얀마 라카인주에서 벌어진 로힝야 학살 때 군부의 총에 맞아 왼쪽 다리를 잃었다. 세이브더칠드런 제공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치킨이에요. 우리 엄마는 치킨 요리를 아주 맛있게 잘하는데, 여기선 돈이 없어서 닭고기를 살 수 없어요.”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난민캠프에 머무는 8살 로힝야(로힝자) 소년 아지즈(가명)는 국제구호개발 비정부기구 ‘세이브더칠드런’의 담당자와 인터뷰하면서 해맑게 고향에서 먹던 ‘엄마표 치킨’에 대한 그리움을 털어놨다. 사진 속 아지즈의 표정도 마냥 천진난만하다. 다만 왼쪽 옆구리에 끼고 있는 목발을 통해, 바지 대신 하반신을 덮고 있는 천 속에 감춰진 ‘가공할 폭력의 상흔’이 어렴풋이 나타날 뿐이다.

1년 전 고향 라카인주에서 겪은 참상

이 8월25일 미얀마 군부의 로힝야 학살 1주기를 맞아 세이브더칠드런으로부터 입수한 ‘로힝야 어린이와 가족 인터뷰’ 자료를 보면, 아지즈가 1년 전 고향 라카인주에서 겪은 참상이 드러난다. 아지즈의 엄마 샤리파(30·가명)는 “2017년 내내 미얀마 군부가 지속적으로 마을을 공격했다”고 했다. 그러다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학살 두 달 전인 6월, 무장한 남성들이 마을에 총을 쏘고 로힝야 주민들을 때리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놀러 나갔던 아지즈는 한 무리의 주민이 죽거나 산 채로 누워 있는 마을 바닥에서 이웃 주민에게 발견됐다. 가족들은 의식을 완전히 잃은 채 숨만 붙어 있던 아지즈를 집에 숨겼다. 일주일이 지나 안전이 확보된 뒤에야 부랴부랴 병원으로 데려갈 수 있었다. 하루에 미화 70달러(약 7만8천원)씩 내며 25일간 전 재산을 쏟아부은 끝에 가까스로 아지즈를 살려냈다. 아지즈는 총 두 발을 맞아 한쪽 다리를 잃었고 한쪽 팔은 넘어지면서 받은 충격으로 장애를 얻었다. 가족들은 그길로 꼬박 9일을 걸어 콕스바자르에 닿았다.

아지즈는 “세이브더칠드런에서 새로운 지팡이(목발)를 받았다. 전에 쓰던 대나무 지팡이는 손에 물집이 잡혔는데 새 지팡이는 훨씬 편하다”며 좋아했다. 또 “한쪽 다리가 없어서 바지를 입을 수 없는데, 룬지(미얀마에서 남녀가 입는 스커트 모양 옷)가 없다”며 이슬람 금식 기간인 라마단이 끝나는 날 벌이는 ‘이드 알피트르’ 축제 때 받고 싶은 선물 목록을 공개하기도 했다.

미얀마 군부의 대학살이 본격화된 2017년 8월25일 이후 어린이 37만 명을 포함해 70여만 명의 로힝야가 미얀마 국경을 넘어 방글라데시에 도착했다. 미얀마 라카인주에 살던 이슬람교 소수인종 로힝야족의 90%에 이른다. ‘자비의 종교’ 불교가 국교인 미얀마의 군부는 유엔이 “인종청소의 교과서적인 예”(지난해 9월)라고 규정할 정도로 잔혹한 로힝야 학살을 자행했다.

70여만 명 ‘과밀 상태’ 간이 숙소

1년이 지났지만 미얀마는 여전히 학살의 원인을 ‘로힝야 반군단체의 경찰서 습격 테러’로 돌리며 정당방위였다고 고집한다. 도저히 감출 수 없는 증거 앞에서 로힝야족을 죽인 건 인종청소가 아니라 몇몇 군인의 살인이었다고 인정할 뿐이다. 군부와 권력을 분점하는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 겸 외무장관 역시 8월21일 싱가포르 남아시아연구소 연설에서 “우리는 난민에 대한 깊은 연민과 우려를 공유한다”며 실효성도 진정성도 없는 발언을 내놨다.

2017년 11월 미얀마와 방글라데시 정부가 로힝야 ‘송환’에 합의했으나, 로힝야 ‘귀환’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8월23일 통신을 보면 귀환은커녕 미얀마를 탈출한 로힝야족이 여전히 방글라데시 캠프로 몰려들고 있다. 학살은 멈췄지만 로힝야 체포와 구금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지즈의 엄마 샤리파는 “미얀마로 돌아가면 푹 잘 수도 없을 것이다. 거기선 항상 공포에 질려 있었다. 무장군인이 쳐들어와 우리를 공격할까봐 밤에는 불도 켤 수 없었다. 밖에 있다가 눈에 뜨이면 무장한 남자들이 우리를 때렸고, 집에 남자가 없으면 여자들을 성폭행하겠다고 위협했다.”

미얀마에서 느꼈던 학살 공포는 없다지만 난민캠프 생활이 녹록할 리 없다. 밤이 되면 캠프엔 야생동물 울음소리가 들리고 코끼리 떼가 들이닥치기도 한다. 부모가 깊은 잠에 빠지면 강도가 아이들을 납치해간다는 흉흉한 소문도 부모들을 잠 못 이루게 한다. 콕스바자르만 해도 대나무에 방수포를 얹어 만든 간이 숙소에서 60여만 명이 과밀 상태로 부대끼며 살고 있다. 폭우가 쏟아지는 방글라데시의 날씨도 엉성한 간이 숙소에서 사는 로힝야족에겐 재앙과도 같다. 삼촌네 집에서 총 열 식구가 함께 산다는 매리엄(11·가명)은 “비가 오면 숙모 방에서부터 물이 흘러넘쳐서 가슴까지 올라온다. 방이 다 젖는데 방수포가 너무 부족”하다고 하소연했다. 들쥐가 지붕으로 쓰고 있는 방수포 여기저기에 구멍을 낸 탓이다.

“다리 잃은 고통, 아버지 잃은 고통”

매리엄의 아버지는 피란을 떠나기 전 살림살이를 챙기러 갔다가 총에 맞아 숨졌다. 매리엄은 아빠를 찾으러 갔다가 다리에 총을 맞았다. 매리엄과 여동생의 삼촌이자 이제 양아버지인 라피크(48·가명)는 “매리엄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다리를 잃은 고통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잃은 고통으로. 나는 입고 있던 낡은 셔츠를 벗어 매리엄의 다리를 덮었고, 조카를 안아서 그곳을 빠져나왔다.”

12살 소녀 아예샤(가명)를 가장 괴롭게 하는 건 물긷기다. 가녀린 소녀는 “낮동안 물을 긷는다. 물 긷는 과정은 고통스럽고 큰 물항아리를 운반하는 일은 너무나 고통스럽다”고 했다. 또 다른 불편은 부모님, 두 언니, 오빠 등 가족 6명이 함께 생활하는 좁은 집이다. 방이 두 개여서 부모님 방이 따로 없고 남녀로 나눠서 잔다. 아예샤는 “나는 부엌에서 엄마랑 두 언니랑 함께 자고, 아빠와 오빠는 다른 방에서 잔다”며 “미얀마로 돌아가고 싶지만 갈 수 없다. 그걸 생각하면 슬프다”고 했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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