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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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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지, 많이 힘드셨지예…

아들 종철이 곁으로 간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

그곳에선 평안하시길
등록 2018-08-07 14:00 수정 2020-05-03 04:29
7월31일 경기도 남양주 모란공원에서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씨 영정이 박 열사 곁에 놓이고 있다. 연합뉴스

7월31일 경기도 남양주 모란공원에서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씨 영정이 박 열사 곁에 놓이고 있다. 연합뉴스

노회찬 의원을 비통하게 보내드리자마다 박정기 아버님의 부음을 들었다. 작고한 7월28일부터 4일장을 치르는 동안은 매일 신기록을 갈아치우는 폭염의 나날이었다. 그럼에도 부산 아버님의 빈소에도, 서울광장의 분향소에도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아버님과 30년. 아버님은 비명에 간 막내아들 박종철의 죽음 뒤에 유가족이 되었고, 나는 1988년 동생(박래전 열사)의 죽음 이후 유가족이 되어 아버지를 만났다. 30년 동안 친아버지보다 더 가까운 사이였다. 유가협(현재의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에서 만나 같은 아픔을 나누던 동지. 유가협을 그만두어서도 아버님은 전화를 걸어 이런저런 의논을 하셨다. 어떤 때는 전화를 받으면 “보고 싶어서 전화했지. 애들이랑 잘 살지?” 그렇다고 답하면 “그럼 됐다.” 그러고는 전화를 끊고는 하셨다.

목욕탕 주인 꿈꾸던 소박한 아버지

늘 아버님은 “종철이가 서 있을 자리”를 생각하셨다. 30년 공무원 생활을 한 평범한 가장, 정년 퇴임을 하고는 목욕탕 운영을 꿈꾸었던 소박한 아버지. 그런 아버지는 1987년 1월14일 이후 삶이 송두리째 뿌리 뽑혔다.

“처절한 심정으로 이 넓고 큰 지구에서 나 혼자 변을 당하는 외로움, 사지가 마비되는 고독감, 당하고 마는구나 하는 마음”이라고 훗날 일기장에 적었던 그날, 부검 뒤에 당신 손으로 막내아들의 염을 해야 했다. 경찰의 강요 속에 화장하고 유골을 겨울바람에 흩뿌리고 돌아서야 했던 그날만 생각하면 억울하고 분하고, 걷잡을 수 없는 후회가 밀려오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금강경 읽기를 거듭했다.

아버님은 다른 이들의 묘를 찾아서 추모식을 할 때마다 남몰래 눈물지었다. 내 자식은 화장해서 강에 뿌려버려 찾아갈 곳도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결국 아버님은 1989년 3월3일 초혼장으로 마석 모란공원에 종철이의 묘를 만들었다. 그날은 초봄인데도 장맛비처럼 비가 주룩주룩 하루 종일 내렸다. 남영동 대공분실을 들러서 가자는 요구를 경찰이 서울대입구역에서부터 막아섰다. 비를 맞으며 경찰과 대치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밤 9시 넘어서야 하관을 할 수 있었다. 모란공원 맨 위에 있는 박종철의 무덤은 그렇게 만들어졌고, 그 옆에 아버님의 자리가 들어섰다.

아버님은 평범한 공무원, 가장에서 투사로 변해갔다. 1991년 아버님은 영등포 구치소에서 99일의 감옥 생활까지 했다. “오직 부끄럽게 살았던 내 과거의 모습을 씻어버리고 종철이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 아버지가 되었다. …종철이를 본격적인 동지로 만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그러므로 감옥 생활은 고통이 아니었다. 감옥을 나오는 아버님은 웃을 수 있었다. 그렇게 아들의 뒤를 따라 그는 민주투사가 되었다.

1989년에는 전국을 돌며 그림과 글씨를 모아서는 서화전을 열었다. 그 수익금으로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 27평의 허름한 한옥집을 사들이고는 ‘한울삶’이라고 이름 지었다. ‘한 울타리처럼 유가족들이 모여 사는 곳’에 자식을 잃은 유가족들이 모였다. 벽에는 먼저 떠나보낸 자식들의 영정 사진이 걸려 있다. 그 사진을 대형 액자에 넣어서 표구를 했다. “거기에 죽은 자식들의 영혼이 우리와 함께 있으니, 한울삶에 가면 내 집처럼 마음이 편하다.” 그런 아버님이었기에 날마다 비질도 걸레질도 바지런히 했다.

경찰과 맞설 땐 가장 앞자리에

거리에서는 경찰과 맞서는 가장 앞자리에 다른 유가족과 함께 섰다. 요즘 시위행진의 맨 앞자리에 세월호 유가족들이 서는 게 당연한 것처럼, 1990년대 시위 현장에는 늘 유가족이 앞자리를 차지했다. 최루탄에 범벅이 되고도 물러나지 않는 노투사는 경찰과의 몸싸움으로 온몸에 피멍이 들기도 수십 번, 난지도 같은 험지에 경찰에 의해 버려지기도 여러 번이었다. 인적도 없고 버스도 다니지 않는 길에 경찰이 유가족들을 부려놓고는 도망치듯 가버리면, 길을 헤매다 결국은 다시 만나서 한울삶으로 돌아가고, 다음날에도 다시 거리로 나서고 했던 그 아버님이다.

“내 죽기 전에 종철이를 비롯한 많은 영혼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 이제는 기쁘게 그들에게 당신들이 원하던 세상 우리가 만들었노라고 보고할 수 있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칠순을 맞을 때 하신 말씀인데, 그로부터 20년을 더 사시면서 온갖 싸움의 현장을 찾아가신 분이었다. 분신 소식을 들으면 가장 먼저 아버님이 움직였다. 경찰이 주검도 탈취하던 시절이었고, 정신을 못 차리는 유가족들이 회유에 넘어갈 수 있던 때였다. 병원 문을 막아선 경찰에게 “내가 박종철이 아버지다. 내가 아들을 보겠다는데 왜 막노!” 호통을 치고는 경찰 벽을 뚫어냈다. 실제 아버지에게는 그 아들이 모두 종철이었다. 분신해서 마지막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이의 손을 잡고는 “포기하면 안 된다. 살아서 같이 싸우자”고 하셨다. 그 말을 듣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던 사람들, 지상에서 마지막 흘리는 눈물을 보고는 남들 눈 없는 곳으로 가서 소리 없이 눈물짓던 아버님의 모습을 기억한다. 30년 지기 동지인 배은심 어머님(이한열 열사의 모친) 말씀처럼 “30년 동안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살아온 세월, 유가족 어머니들은 한울삶에서 수면제를 나눠 먹고는 잠들 수 있었고, 아버지들은 소주를 가슴에 들이부어야 쪽잠이라도 청할 수 있었다.

거리의 노투사 박정기는 막내아들 박종철의 30주기인 2017년 1월14일 저녁, 부산 서면에서 열린 부산 시국대회에 온몸을 꽁꽁 싸매고 참석해서 촛불을 들었다. 그때를 마지막으로 아버님은 병원 신세를 졌고, 요양병원에서 한 많은 생을 마치셨다. 이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검찰총장이 사과도 하고, 경찰청 인권센터로 쓰던 남영동 대공분실도 인권기념관으로 운영하기로 했는데, 아버님이 마지막 하신 말씀은 “아직 다 이루지 못했다”였다.

“인쟈부터 막내가 잘 모시겠습니다”

7월31일, 노제가 열리는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 마련된 분향소에는 펼침막 두 개가 위아래로 나란히 걸렸다. “종철아! 잘 가 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 31년 전 박정기 아버지가 막내 유골을 언 임진강에 뿌리면서 한 말씀이다.

“아부지, 많이 힘드셨지예…. 인쟈부터 막내가 잘 모시겠습니다.” 막내 종철이와 저세상에서 해후하시면 종철이가 아버님에게 드릴 것 같은 말을 상상해서 쓴 글귀다. 이 말대로 지금은 31년 만에 마석 모란공원에서 막내아들을 만나 이런 말을 들으셨을까? 평소 함께했던 오랜 동지, 문익환 목사님, 김진균 교수님, 이소선 어머님까지 다 만나보셨을까?

자식의 뜻을 따라 민주주의를 염원하던 어머니 아버지들이 해마다 한 분 두 분 돌아가신다. 박정기 아버지도 저세상으로 떠나셨다. 그분들은 자식들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평생을 헌신했는데, 우리는 그들에게 너무 큰 빚을 지고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건 아닐까? 그 유가족들이 기쁜 마음으로 먼저 간 자식들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그 길을 닦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막내아들 종철이 묘와 나란히 들어선 박정기 아버지의 묘, 그 모습만으로도 눈물겹게 정겹다. 종철이의 아버지가 아닌 우리 모두의 아버지, 박정기 아버님, 그곳에서는 평안하시길.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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