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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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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판결이 국민청원 대상 될라

법원 신뢰도 타격 불가피…

양승태 조사하고 제왕적 대법원장 체제 수술해야
등록 2018-06-12 14:27 수정 2020-05-03 04:28
박정열 전국공무원노조 법원본부 서울중앙지부장(가운데)이 6월8일 서울법원종합청사 로비에서 ‘재판 거래’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박정열 전국공무원노조 법원본부 서울중앙지부장(가운데)이 6월8일 서울법원종합청사 로비에서 ‘재판 거래’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2015년 5월26일, 한 언론은 국가정보원이 2013~2014년 법원의 경력 법관 채용 과정에서 신원 조사 명분으로 법관 지원자들을 직접 면접한 사실을 보도했다. 국정원 직원들이 지원자들을 찾아가 국가관을 비롯해 노사관계나 사회 현안, 세월호 사고에 대한 견해까지 묻는 등 사상 검증에 가까운 면접을 했다는 것이다.

굳이 헌법에 명문화된 사법권 독립을 떠올리지 않아도 국정원 직원이 법관 지원자를 만나 국가관 등을 알아봤다는 것 자체가 경천동지할 사건이었다. 논란이 일자 국정원은 신원 조사 사실을 시인하면서도 사상 검증은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다수 언론에서 후속 기사가 쏟아져나왔고, 법조계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커져만 갔다.

적나라한 사법행정권 남용 사례

당시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으로 재직했던 필자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임원들과 장시간 논의 끝에 그다음날인 5월27일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국가정보원이 판사 지원자들을 개별적으로 비밀리에 면담하고 합격 기준을 이야기했다는 것은 사법권 독립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부정한 것과 다름없다. 사법권 독립이라는 과제가 이렇게까지 하찮게 치부될 수 있는 것인지 묻고 싶다. …사법권의 진정한 독립이 행정 권력에 의해 공공연하게 침해된다면 국민은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없고, 그런 사회를 더는 민주 사회라고 칭할 수 없을 것이다.”

헌법적으로 독립된 기관인 사법부의 구성원을 선발하는 절차에 행정부, 그것도 국가 정보기관이 개입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기에 대법원의 대응에 따라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사건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지원자에게 신원 조사 동의서를 받아 국정원에 의뢰했고, 직책의 중요성에 비춰 국가 안보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지원자의 국가관에 대한 신원 조사를 할 필요성이 크다고 해명했다. 법관 인사의 독립은 사법권 독립에서 핵심 요소인데, 대법원 스스로 국정원의 신원 조사가 필요하다면서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인 것에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당시 사법부 수장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었다. 지난 6월1일, 놀이터에서 최근 불거진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에 관한 입장을 밝힌 바로 그분이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에서 작성된 문건들이 공개되어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정부로부터 독립되어야 하는 대법원이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청와대와 결탁하려고 시도한 의혹, 사법부 구성원의 재산 조사 등 사법행정권 남용의 수많은 사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대표적으로 박근혜 정부의 정당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국정원 댓글 사건’의 주역인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판결 관련 문건을 보자.

원 전 원장의 2심 판결 하루 전인 2015년 2월8일 작성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건 관련 검토’는 유무죄 판결에 따른 다양한 대응 방안이 담겼다. 만일 2심에서 1심을 번복해 공직선거법 위반을 유죄로 선고할 경우,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효력 집행정지 사건 등 관심 사법 현안 신속 처리’라는 소제목 아래 “만일 대법원의 결론이 재항고 인용 결정이라면 최대한 조속히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함 ⇨ 사법부에 대한 불만 완화 효과 + 원세훈 사건도 대법원에서 결론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교정될 것이라는 암시 제공 효과”, 이어 ‘본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 조속한 시점에 선고’라는 소제목 아래 “상고심을 최대한 조속히 진행하여 만일 결론에 재고의 여지가 있는 경우에는 최대한 조속히 선고하는 것이 바람직함 → 불만·오해 기간 최소화”라고 되어 있다. 또한 항소심 판결 선고 직후에 법무비서관실 등 적당한 비공식적 라인을 통해 사법부의 진의가 곡해되지 않도록 충분한 설명·설득 절차를 거친다는 내용도 있다.

사법권 독립 뭉갠 양승태의 사법부

실제로 대법원이 청와대에 이와 같은 의사를 전달했는지, 대법관들의 판단에 영향을 미쳤는지 아닌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2015년 6월 원심을 깨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법외노조 상태로 되돌려놨고, 이어 7월에는 원 전 원장 2심 판결을 파기환송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문건에 기재된 것처럼 진행된 것이다.

작금의 논란은 대법원이 사법권 독립을 스스로 훼손했다는 데에서 과거보다 심각성이 더하다. 사법권 독립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 출발점은 권력분립 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 일찍이 몽테스키외는 “만일 재판권이 입법권과 결합하면 시민의 생명과 자유에 대한 권력은 자의적으로 될 것이며, 집행권과 결합하면 재판관은 압제자의 힘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라면서 사법권 독립을 주장했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것은 개개의 재판이 헌법과 법률에 따라 그 양심에 따른 법관 외의 어떠한 권력이나 세력에 간섭받지 않고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송 당사자인 의뢰인들은 아무리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법원에서 종국적으로 내린 판단에 대해서는(마음 한구석에서는 승복하지 못하겠지만) 외형적으로는 승복한다. 판단을 한 판사보다 변론을 한 변호사에게 항의하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 법원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가 있는 것이다. 이는 곧 판사가 불편부당한 판단을 했을 것이라는 신뢰이자, 재판의 독립을 사법권 독립의 핵심 가치로 간주하는 근본적인 이유다.

그러나 최근 공개된 문건들로 인해 법원의 신뢰도는 큰 타격을 받게 될 전망이다. 의혹이 제기된 재판 중 하나인 KTX 해고 여승무원들은 대법원에 항의 방문하기도 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갈등 해소 기관으로서 법원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자칫하면 앞으로 법원 판결이 청와대 국민청원의 주된 대상이 되거나, 법원마다 판결에 불복하는 국민들의 1인시위가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번 사태가 언제 해결될지 현재로서는 예측하기 어렵지만, 다음 두 가지는 꼭 짚고 싶다. 우선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 대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조사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양 전 대법원장은 특별조사단의 조사를 이미 거부했다. 그렇다면, 외부기관(국정조사, 검찰 등)이라도 조사를 해야 한다. 그는 이번 사법행정권 남용 당시 사법부 수장이었고, 그를 조사하지 않고서는 실체적 진실을 알 수 없으며, 만일 법적으로 책임질 일이 드러난다면 당연히 그가 온전히 져야 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사법행정권 남용이 벌어지게 된 근저인 제왕적 대법원장 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수술이 필요하다. 대법원장은 3천 명이 넘는 판사들의 실질적인 인사권은 물론 대법관 제청권도 있다. 더욱이 10년 주기로 판사들의 재임용 여부도 결정할 권한이 있다. 헌법상 개개 법관들의 재판 독립은 보장되지만, 대법원장의 막강한 권한 때문에 재판 독립 원칙이 훼손될 우려가 있다. 특별조사단이 살펴본 문건을 보더라도, 대법원과 의견이 다른 판결이 나오자 그 판사를 직무 감독하려고 검토하는가 하면, 대법원과 다른 목소리를 낸 판사의 재산을 조사한 내용이 있다.

새 대법원장의 리더십 필요한 때

김명수 대법원장은 취임사에서 “사법의 본질적 역할은 사회적 갈등을 법치주의의 틀 안에서 공정하고 평화롭게 해결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법원이 이러한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김 대법원장의 리더십이 절실히 필요한 때다.

김한규 전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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