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 출입 경력이 결코 짧지 않은 기자에게도 지금 사법부에서 벌어지는 일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재판 업무 지원 조직에 불과한 법원행정처가 정권의 이해에 부응하기 위해 재판에 영향력을 행사한 정황이 드러난 것은 사법부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를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한편으론 언론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 책임감도 느끼게 한다. 국민의 법감정과 동떨어진 판결에도 “법관의 독립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판사들의 말에 날선 비판을 자제해왔다. 민주주의의 최후 보루인 사법부의 기능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공개된 법원행정처 내부 문건들은 사법부가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법관의 양심’과 같은 말들이 교묘한 사탕발림에 불과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2017년 3월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이 불거졌을 때 법조팀장을 맡아 관련 내용을 취재하면서도 설마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법원행정처로 인사 발령을 받은 한 판사가 자신이 가입한 학술모임 동향을 파악하라는 지시에 반발해 인사를 거부한 것을 두고 블랙리스트 의혹을 제기한 것은 좀 지나친 게 아닌가 싶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사탕발림이었나 </font></font>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리스트를 만들어 판사들을 관리한다는 발상 자체가 시대착오적이었기 때문이다. 법관의 양심과 독립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판사 사회에서, 그것도 엘리트로 꼽히는 판사들이 모인 법원행정처가 스스로 존립 기반을 무너뜨리는 어리석은 짓을 했을 리 없지 않은가. 오랜 기간 취재원으로 알고 지냈던 ‘관료판사’(법원행정처 근무 경력이 많은 판사)들이 최소한의 금도는 지켰으리라는 개인적인 믿음도 강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지난 5월25일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특별조사단’(특조단)의 발표는 이런 믿음이 얼마나 순진하고 어리석은 것이었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 석 달여 동안 조사 끝에 이날 특조단이 공개한 문건들은 ‘양승태 법원행정처’가 시대착오적 집단이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정권의 눈에 들 수만 있다면 사회적 약자 보호와 정의 실현이라는 사법부의 기본 소임까지 선뜻 내팽개칠 수 있는 집단임을 여실히 보여줬다.
그 가운데 2015년 7월 작성된 ‘현안 관련 말씀 자료’가 압권이다. 양 전 대법원장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독대를 위해 작성된 이 문건은 출처가 의심되는 표현들로 도배돼 있다. “사법부는 그동안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왔음” “왜곡된 과거사나 경시된 국가관과 관련된 사건의 방향을 바로 정립해왔음” 등 법관으로서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민망한 표현들로 가득 찼다.
문건은 ‘과거 왜곡의 광정(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고침)’ 사례로 대통령 긴급조치 관련 판결과 과거사 국가배상 소송 등을 들었다. 긴급조치 발령은 고도의 정치적 행위이기 때문에 국가가 배상할 필요가 없다는 대법원 판결과, 과거사 피해자라도 진실 규명을 신청하지 않았다면 국가로부터 배상받을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 등을 “진정한 화해와 국민 통합을 이룰 수 있는 해결책을 모색하게 만든 판결”이라고 치켜세웠다. 국가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평생 지울 수 없는 고통을 당한 피해자는 안중에도 없는 말이다. 문건은 또 KTX 승무원 해고 관련 소송과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소송 등 노동자들을 사지로 내몬 판결에 대해서는 “국가 경제의 발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하고 대통령이 추진 중인 노동·교육 등 4대 부문 개혁을 강력하게 지원해왔다”고 자화자찬했다.
이 문건이 작성되고 한 달 뒤인 8월6일 양 전 대법원장은 청와대를 찾아 박 전 대통령을 만났다. 당시 그와 법원행정처가 ‘올인’하다시피 한 상고법원 설치에 미온적인 대통령을 설득하러 간 자리였다. 하지만 성과는 없었다. 오히려 양 전 대법원장은 배석한 우병우 당시 민정수석에게서 “상고법원 얘기를 왜 쓸데없이 오래 하셨냐”며 면박을 당했다고 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유신독재 면죄부, 양승태의 ‘거래 ’</font></font>‘말씀 자료’는 법원행정처가 상고법원 설치를 주요 정치적 재판과 거래하려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일으킨다. 하지만 특조단은 법원행정처의 재판 개입 의혹에는 선을 그었다. 특조단은 “(말씀 자료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지지한다’는 증거로 제시하기 위해 추려낸 것”이라며 법원행정처가 재판에 개입했다고는 볼 수 없다고 밝혔다. 대통령 면담을 앞두고 그런 내용의 판결만을 필요에 의해 뽑았을 뿐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특조단의 설명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법원행정처나 법원 수뇌부가 정권에 잘 보이기 위해 재판에 개입한 사례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2008년 이른바 ‘광우병 촛불집회’ 재판에 개입한 신영철 전 대법관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명박 정부 출범 첫해인 2008년 여름 광우병이 의심되는 미국산 소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촛불집회가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에서 열렸다. 대규모 시위에 위기를 느낀 이명박 정부는 집회 주최 쪽은 물론 단순 참가자까지 마구잡이로 연행해 재판에 넘겼다. 당시 서울중앙지법원장이던 신 전 대법관은 촛불집회 사건을 보수 성향 재판부에 몰아줘 판사들의 강한 반발을 샀다. 사건을 무더기로 배당받은 재판부는 단순 참가자에게도 유죄를 선고했고, 일부에게는 실형도 선고했다.
이 사실은 신 전 대법관이 대법관에 승진한 직후인 2009년 2월 그가 서울중앙지법원장 때 판사들에게 보낸 전자우편이 무더기로 공개되면서 알려졌다. 그는 2008년 7월 서울중앙지법 형사단독판사들이 회의를 열어 촛불집회 사건 배당에 대한 문제점을 논의한 뒤 개선을 요구하자, 앞으로는 무작위 배당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는 이후에도 일부 사건을 특정 재판부에 집중 배당하는 등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약속 파기에 판사들이 반발할 움직임을 보이자 판사들에게 “(촛불 재판) 집중 배당으로 달성하고자 했던 보편적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노력해달라”는 등의 전자우편을 여러 차례 보내며 되레 압력을 가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이명박의 ‘양승태’도 있었다</font></font>그는 또 촛불 재판을 심리하던 한 판사가 야간 옥외집회 금지 조항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위헌심판제청을 하자 다른 촛불 사건을 배당받은 판사들을 상대로 군기를 잡았다. 촛불 재판 결과가 헌재 결정에 영향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판사들이 헌재 결정 이후로 심리를 미루려 하자 재판을 빨리 진행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신 전 대법관은 심지어 촛불집회 참가자가 신청한 보석을 심리 중이던 판사에게 직접 전화해 “보석을 신중하게 결정해달라”는 말까지 했다. 당시 가 보석을 허가해준 판사를 실명으로 비판하는 사설을 싣자 이를 핑계로 삼은 것이다.
신 전 대법관 사태가 일파만파로 커지자 이용훈 당시 대법원장은 진상조사단을 꾸려 조사에 착수했다. 조사단은 “(신 전 대법관의 행동이) 재판 내용과 진행에 관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내용의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그는 빗발치는 사퇴 여론에도 끝까지 자리를 지켰고, 이 전 대법원장도 엄중경고로 사태를 마무리했다.
당시 신 전 대법관과 함께 조사를 받았던 허아무개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은 조사단 관계자에게 “법원행정처가 원하는 대로 했는데 왜 난리냐”며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법원 안에선 신 전 대법관의 배후에 법원행정처가 있다는 말이 돌았다. 이 전 대법원장은 신 전 대법관의 촛불 재판 개입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를 대법관으로 임명 제청했다. 이 전 대법관은 퇴임 직전 기자간담회에서 관련 질문을 받았으나 “회고록에 쓰겠다”며 답변을 피했다.
재판 지원 조직인 법원행정처가 언제부터 지금과 같은 힘센 조직이 됐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법원행정처 근무 경력이 많은 법관들은 민주 정권이 들어선 뒤 사법부의 독립성이 점차 확대되면서 법관 인사와 예산을 장악한 법원행정처가 지금처럼 막강해진 것으로 본다. 1995년 발간된 에 따르면 법원행정처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쓰인 것은 1949년 9월 법원조직법이 공포되면서부터다. 초기에는 일반 공무원들이 근무했으나 1980년대 이후 주요 보직을 판사들이 장악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국회의원 민원 창구로 전락한 법원행정처장</font></font>법원행정처가 법관 인사를 통해 재판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지적은 1990년대부터 나왔다. 사법부의 권한이 점차 세지면서 과거 정치권력이 가졌던 영향력이 법원행정처로 넘어간 것이다. 정권의 이해에 반하거나 대법원 판례를 따르지 않는 ‘튀는’ 판사들을 고등부장판사나 대법관 인사에서 탈락시켜 결과적으로 재판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비난이 법원 안팎에서 빗발치기 시작했다.
이같은 법원행정처의 횡포를 막기 위해서는 재판과 법원 행정(인사)을 분리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그러자 참여정부 때인 2005년 12월 이용훈 당시 대법원장은 법원행정처장을 대법관이 아닌 법원장급 판사 가운데 임명하도록 법원조직법을 개정하고 초대 ‘비대법관’ 법원행정처장에 장윤기씨를 임명했다. 법원행정처의 힘을 빼겠다는 상징적 조처였다.
하지만 비대법관 처장은 국회의원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평소 법원행정처장을 통해 재판 민원을 해결해오던 국회의원들에게 “난 대법관이 아니라서 대법원 판결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다”며 손사래를 치는 장윤기 처장이 마뜩할 리 없었다. 결국 2년 뒤인 2007년 말 국회의원들이 직접 나서 법원행정처장을 대법관 가운데 임명하도록 법원조직법을 다시 바꿨다.
이 사건 이후 법원행정처는 국회의원의 민원 해결에 최선을 다했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법원행정처 출신 변호사는 “예산을 비롯해 국회와 협조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국회의원들의 재판 민원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법원행정처장은 물론 차장과 기조실장 등 법원행정처 고위 간부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국회 관련 업무다”라고 말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검찰 수사 대상 될까</font></font>김명수 대법원장은 5월31일 이번 사태와 관련해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는 국민에게 공식 사과하고 대대적인 사법행정 개편을 약속했지만, 양 전 대법원장 등에 대한 형사 조처에 대해서는 “각계 의견을 종합해 최종 결정하겠다”며 즉답을 피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6월1일 집 근처 공원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재판에 관여한 적도, 판사들에게 인사 불이익을 준 적도 없다”며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하지만 양 전 대법원장과 임종헌 전 차장 등 관련자들 수사는 불가피한 상황이다. 김 대법원장이 고발하지 않더라도 이미 시민단체 등의 고발이 10건이 넘었다. 법원으로선 검찰 수사 결과를 평가하던 위치에서 졸지에 검찰 수사 대상이 된 상황이 더 수치스러울 것 같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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