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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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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아픔은 끝나지 않았다

네 번째 단식농성 중인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 인터뷰…

남은 해고자 130명에 대한 “복직 시기 명시해달라”
등록 2018-03-13 15:03 수정 2020-05-03 04:28
“꼭 회사로 돌아가야 해.” 두 손을 꽉 잡고 복직을 바랐던 어머니는 3년 전 악화된 치매로 막내를 알아보지 못한다. 아들은 “우리 막내, 고생 많다” “우리 막내, 미안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어머니와 언제 만날지 기약할 수 없다. 한 달에 한두 번은 어머니와 가까운 교외로 나들이를 나갔던 아들은 벌써 9년째 효자 노릇을 포기하고 있다. 그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 사회에 거대한 상흔을 남긴 쌍용자동차의 대규모 정리해고 사태와 마주하게 된다.
쌍용차 노동자들은 2009년 평택공장에서 76일 동안 옥쇄파업을 치렀다. 공장 바닥에 눈물과 피가 떨어진 전쟁 같던 싸움. 공장을 잃은 뒤 싸울 곳도 잃은 ‘해고노동자’들은 이제 제 몸을 전쟁터로 삼았다.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 그는 2012년 5일, 2013년 21일, 2015년 45일의 단식을 했다. 그리고 3월1일 다시 곡기를 끊었다. 단식 8일째인 3월8일, 그를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앞 천막에서 만났다. 총 단식 기간을 셈하면 79일. 이미 끔찍했던 76일의 파업 기간을 훌쩍 넘겼다. 8kg이 몸에서 빠져나가 있었다.
_편집자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이 3월8일 경기도 평택 쌍용차 공장 앞 농성장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이 3월8일 경기도 평택 쌍용차 공장 앞 농성장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단식 8일째 8kg 몸에서 빠져나가 단식 이후 건강이 급속히 나빠졌다고 들었다.

3일 정도까지 배탈과 설사로 몸무게가 많이 빠졌다. 수분이 많이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지금은 좀 나아졌다.

이미 총 70일 넘게 단식을 했다. 이번 단식은 주변에서 말린 것으로 안다.

2015년 회사와 합의한 복직 시기가 2017년 상반기까지였다. 그 뒤로 무엇을 할지 많이 고민했다. 조합원들도 지역으로 많이 흩어졌고, 힘을 크게 모으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결국 쌍용차 대주주인 ‘마힌드라’ 그룹을 찾아가 해고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해 말 (53일 동안) 인도 원정 투쟁을 했다. 원정 투쟁 계획을 세우는 과정에서 머리가 복잡했다. ‘담판 짓고 오면 좋은데, 빈손으로 오면 어쩌나.’ 그 불안감을 떨치고 인도에 가서 해고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돌아와서는 회사 쪽에 2월 말까지 해고자 복직에 대한 구체적인 일정을 말해달라고 요구했다. 회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회사와 합의한 책임이 있는 내가 나서는 방법밖에 없었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단식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단식 중에도 회사와 교섭하고 있다. 쟁점은 뭔가.

복직 시기를 명시해달라는 것이 우리의 핵심 요구다. 하지만 회사는 시기를 명시하는 것에 부담을 가지는 것 같다.

9년이라는 긴 시간의 터널을 지나는 동안 간혹 희망의 빛이 내려앉기도 했다. 2015년 12월 쌍용차 경영 정상화를 위한 노사 합의가 이뤄졌다. 회사가 2017년 상반기까지 해고자 복직을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3월 현재까지 해고자 167명 중 37명만 복직했다. 남은 해고자는 130명이다. 회사가 약속한 시간은 이미 8개월이나 지났다. 남은 이들은 언제 복직할지 기약할 수 없다. 2월부터 시작된 교섭에서 쌍용차지부는 복직 시기에 대한 구체적인 의견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회사는 묵묵부답이다. 김득중 지부장을 찾은 3월8일 5차 실무교섭이 있었지만, 뾰족한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반전의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쌍용차는 4월부터 1인당 노동시간을 줄이는 방향으로 근무 방식을 바꾸는 주간 연속 2교대제를 도입한다. 신규 채용이 예상된다. 2015년 합의에 따르면, 신규 채용 때 해고자를 30% 비율로 뽑기로 했다. 하지만 그 규모가 얼마나 될지 아직 알 수 없다. 회사 쪽 관계자는 “교섭이 진행 중인 상황이라 말할 수 없다”고만 했다. 희망고문이 진행 중이다.

“다들 쌍용차 문제가 끝난 줄 알고 있었다” 답답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2015년 합의 이전에는 오히려 정신적으로 편했다. 그때는 부딪쳐서 우리의 목소리를 내면 됐다. 하지만 합의 이후 3년이 흘렀는데 복직한 해고자는 얼마 되지 않는다. 합의 뒤 복직에 대한 조합원의 기대가 무척 높았다. 합의 사항이 이행되기 바라며 조합원들을 다독이며 지내왔는데…. 이미 지나온 시간이 너무 길다. 회사가 이 문제를 외면하고 시간을 끌 일이 아니라고 본다. 결단을 해야 한다. 우리도 투쟁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교섭을 병행한다고 이미 말했다. 진정성을 가지고 꾸준하게 교섭에 임하고 있다.

2015년 합의로 쌍용차 문제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맞다. 합의 이후에도 열심히 싸웠다. 2016년에는 노동법 개악을 막기 위해 전국 순회 투쟁에 참여했다. 박근혜 퇴진을 위한 서울 광화문 집회에도 열심히 나갔다. 노동조합 등을 상대로 한 국가 손해배상 청구의 문제점을 알리기 위해 광화문 광장에서 농성도 했다. 적은 인원으로 열심히 투쟁했다. 2017년 상반기가 지난 뒤에 복직 문제를 계속 알렸다. 하지만 2015년 합의로 모든 게 해결됐다고 생각하는 분이 많다. 이번 인도 원정 투쟁에서 현지 공관장과 주재원들을 만났는데 “왜 왔냐?”고 하더라. 다들 쌍용차 문제가 끝난 줄 알고 있었다.

새 정부가 들어섰다. 달라진 점도 있을 것 같다.

2009년 상황을 돌이켜보면 조합원들이 옥쇄파업 과정에서 뼈가 부러졌어도 경찰에게 맞았다고 이야기를 못했다. 암흑의 시대였다. 감형을 받기 위해 경찰의 회유와 협박에 넘어가 동료 이야기를 털어놔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제 가슴앓이하던 조합원들이 하나둘 ‘말’을 하기 시작했다. 파업 현장에서 찍힌 사진을 짚으며 “사실 이게 나였어”라고. 범죄자로 낙인찍혀 말하지 못했던 피해 사실도 하나씩 꺼내놓기 시작했다. 9년이 지나서야 상처를 털어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한다.

“국가 손해배상 청구 문제 해결도 큰 과제”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교수가 3월8일 쌍용차 평택공장 앞 쌍용차지부 사무실에서 강의하고 있다.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교수가 3월8일 쌍용차 평택공장 앞 쌍용차지부 사무실에서 강의하고 있다.

경찰은 2009년 파업 진압 당시 장비 등에 피해를 입었다며 쌍용차지부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냈다. 2016년 3월 서울고법은 쌍용차지부 등이 국가에 11억여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지연이자는 한 달에 1800여만원이었다. 이제 불고 불어 17억원에 이른다. 국가 손해배상 문제는 기약 없는 복직과 함께 해고노동자의 발목을 잡는 최대 걸림돌이다. 이 모든 고통은 해고노동자들을 아프게 한다. 3월7일 쌍용차 평택공장 앞을 찾아 하루 단식을 한 뒤 다음날 조합원 등에게 강연한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교수는 “쌍용차 사건은 한국 사회가 해고노동자를 이렇게 방치하면 안 된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준 사례”라고 말했다. 고통은 건조한 숫자를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김 교수 연구팀이 2015년 해고노동자 142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74.8%가 “해고 때문에 인생을 망친 것”이라고 답했다. “해고당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자리가 내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고 부적절하게 느낀다”라는 답변은 73.6%였다. 김 교수는 이 수치를 들며 “정리해고 경험 뒤 해고노동자가 겪은 시간이 어떤 결이었는지 보여주는 것”이라며 고통의 이유는 “국가의 낙인”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통을 없애진 못해도 줄일 수는 있다. 같은 조사에서 복직한 노동자들은 해직 상태의 노동자보다 항우울제 등을 복용한 경험이 절반 이상 낮았다. 복직이 회사가 해결할 몫이라면 손해배상은 국가가 풀 수 있는 문제다. 결단하면 되는 일이다.

손해배상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국가 손해배상 청구 문제 해결은 복직만큼 큰 과제다. 17억원 정도인데 지금 대법원에 계류돼 있다. 법무부가 손해배상 청구를 철회하면 되는데…, 그 부분이 아쉽다. 그래도 경찰청에 개혁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쌍용차 파업 진압 조사도 시작되면서 희망을 걸고 있다. 옥쇄파업 때 경찰 진압에 문제가 있었다는 내용이 확인된다면 다른 판단이 내려질 수 있다고 기대한다.

벌써 만으로 9년, 햇수로는 10년이다.

돌아보면 롤러코스터 타는 것처럼 시간이 지나온 것 같다. 내려가도 긴장하고 올라가도 긴장하면서 쏜살같이 시간이 흘렀다. 후회? 후회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시간이 10년을 넘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우리 싸움을 10년 안에 끝내겠다고 결심했다.

늘 마지막으로 복직하겠다고 말해왔다. 복직하면 무엇을 가장 먼저 하고 싶나.

아…. (침묵) 그 생각은 못해봤다. 돌아간다는 생각만 했다. 할 일은 많겠지. 쌍용차가 우리 복직만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다. 정리해고의 최전선에 있었던 문제였고,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연대를 했다. 쌍용차 투쟁 10년이 무엇을 남겼는지 정리하고 싶다.

그런 것 말고,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공장 밖에서만 동료들과 악수했다. 돌아가면 공장 안에 있는 동료들과 악수하고 싶다. 만약 복직을 한다면 그들의 노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악수하며 공장을 돌고 싶다.

'공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쉼없이 말하던 김득중 지부장은 인터뷰 중 단 한 번 말을 잊지 못했다. 복직 이후의 삶을 묻는 질문이 나왔을 때, 개인적인 바람을 듣고 싶었다. 그는 이제 아흔 된 어머니가 그리워 자신을 기억하는 시절 손을 잡아주던 사진을 지니고 다닌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아빠 노릇을 제대로 못한 것이 미안하다고 했다. 하지만 복직 이후 자연인 김득중의 잃어버린 9년을 되찾고 싶다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서른아홉 살에 투쟁을 시작한 김득중 지부장은 쉰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서른아홉 살 때 바랐던, ‘공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그 한 가지만 마음에 품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쌍용차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해고노동자의 아픔은 진행 중이다. 지켜봐주시고 힘을 모아주시면 좋겠다.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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