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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여, 연대하라

tbs 프리랜서 비정규직 고용 개선 관련 서울시 용역보고서 단독 입수…

“비정규직 적어도 양질 방송 만든다”
등록 2018-02-15 01:09 수정 2020-05-03 04:28
캐나다 《MBS》 라디오 소속 방송노동자들이 2013년 6월 ‘공정거래’를 요구하며 행진하고 있다. cmg 제공

캐나다 《MBS》 라디오 소속 방송노동자들이 2013년 6월 ‘공정거래’를 요구하며 행진하고 있다. cmg 제공

소작농 편에선 지주보다 마름이 미운 법이다. 방송사 비정규직들이 쏜 분노의 화살은, 사장·경영진보다 그 아래서 실무를 맡은 정규직 PD들에게 쏠린다. 이들은 한정된 제작비를 누구에게 얼마를 줄지 결정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방송노동자의 다수를 차지하는 외주제작사 직원과 파견용역·계약직·프리랜서 등에게 방송사 정규직 PD는 생사여탈권을 쥔 ‘슈퍼 마름’이 된다.

tbs 정규직화 결정에 핵심적 역할

그래서 방송사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갈등은 일반적인 노-노 갈등보다 훨씬 복잡하다. 1월24일 KBS 구성작가협의회 게시판에 ‘내가 겪은 쓰레기 같은 방송국, PD들을 고발합니다’라는 글이 올라왔다. SBS 에서 방송작가로 일하며 겪은 저임금, 노동 착취 관행을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노동 착취를 행한 주체는 같은 노동자인 ‘정규직 PD’였다. 해당 작가는 “밖에서는 정의로운 척, 적폐를 고발하겠다는 PD들이 내부의 문제엔 입을 조개처럼 꾹 닫았다”고 분노했다. 방송사 비정규직이 1천 여 명 가까이 모인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방송계갑질119’에서도 정규직 PD에 대한 성토는 가장 많이 나오는 레퍼토리다.

방송계 노-노 갈등을 줄이기 위해 외국 공영방송의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 입수한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보고서 ‘tbs 프리랜서 비정규직 고용모델 개선 실행방안 연구’(이하 보고서)는 이 문제를 푸는 데 귀중한 선례를 제공한다. 보고서는 서울시가 연구소에 의뢰해 작성한 것이다.

1월10일 작성된 보고서는 서울시 산하 tbs(교통방송)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결정을 내리는 데 핵심 역할을 한 자료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이 보고서가 나오자마자 1월24일 기자회견을 열어 “tbs에서 프리랜서나 파견용역 형태로 일하는 PD, 기자, 작가, 카메라감독 등 272명을 정규직화하겠다”고 발표했다. 보고서에는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캐나다의 공영방송 고용 형태와 노동조합 사례가 담겨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캐나다 사례다. 공영방송에서 근무하는 정규직과 프리랜서가 하나의 노동조합에 가입해 사 쪽과 단체협약을 맺는 것이 특이하다. 캐나다 10개 미디어에 속한 방송노동자 6천 명이 가입한 노조의 이름은 ‘캐나다 미디어 길드 프리랜서 지부’(CMG)이다. 노조에는 미디어에서 일하는 다양한 직종의 프리랜서가 가입할 수 있다. 무대디자인, 특수효과, 의상, 분장, 연출자, 리서처, 프로그램 사회자, 인터뷰어 등이다. 정규직과 함께 단체협약을 맺기 때문에 프리랜서 제작 스태프는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노동조건을 제도화하는 데 유리하다.

세계 공영방송 비정규직은 고연봉 저비율

노조는 정규직 PD도 꾸준히 교육한다. 프리랜서 노동자들의 실질적 사용자인 PD에게 프리랜서 제작 스태프의 권리를 상기시키고 연대를 촉구하기 위해서다. 노조는 ‘프리랜서의 공정한 채용과 대우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는데, 이 중 ‘PD가 기억할 다섯 가지’에 핵심이 들어 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최저임금은 협상 대상이 아니다’ 등이다(표 참조). 방송사 내 프리랜서 비중이 43.3%(한국전파진흥협회 2016년 자료)에 이르는 한국 방송 환경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영국, 프랑스, 독일 공영방송의 비정규직 비율은 한국보다 낮다. 영국 《BBC》는 9%, 프랑스 은 7.7%, 독일 《ARD》는 23.3%다. 2016년 현재 《BBC》에서 일하는 전체 노동자 2만1133명 가운데 비정규직은 1897명이다. 이렇게 비정규직 비율이 낮은 이유는 《BBC》내부 규정 때문이다.《BBC》에서 어떤 형태로든 3년 이상 근무한 인력은 정규직 계약을 제안하도록 하고 있다.

심지어 비정규직 인건비가 정규직보다 높다. 사람 수로 9%에 불과한 비정규직이 전체 인건비의 17.5%를 가져간다. 비정규직 한 사람이 받는 평균 연봉은 약 7만8천파운드(약 1억1765만원)나 된다. 이들은 방송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고급 인력이다. 보고서의 책임연구원인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은 “세계적인 공영방송사들은 비정규직 비율이 10% 남짓이면서도 양질의 방송을 만든다. 우리도 이런 고용 모델을 따라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이웃 나라 일본의 공영·민영방송은 한국처럼 비정규직 비율이 높다. 그러나 한국보다 사정이 낫다. 프리랜서 인력의 시간당 임금이 정규직 스태프보다 높아 긴 시간 노동을 강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 방송사에서 프리랜서 인력은 리서치, 현지 조사 섭외, 번역 등 전문성을 바탕으로 일하며 PD와 영역이 분리돼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의 프리랜서 작가는 명확히 정해진 일을 없어 PD들이 기피하는 업무를 떠맡는다.

보고서는 “한·일 양국 주요 방송사들이 세계에서 유이하게 공채로 인력을 선발하는 체제를 유지하고 있지만, 프리랜서 제작 인력에 대한 개방성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tbs 역시 기존 인력의 정규직화와 함께 일본 사례를 참고해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의 허브 조직으로서, 언론사로서 경쟁력을 제고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왜 불안정성은 외부 스태프 몫인가

선진국들과 달리 한국 방송업계의 비정규직 비율이 높은 까닭은 뭘까. 보고서는 한국 방송업계에서 노동 불안정성이 커지는 주요 원인으로 ‘프로젝트형 노동시장’을 꼽았다. 프로젝트형 노동시장은 프로그램 개편 때마다 제작팀을 해체하고 새로 꾸리는 구조를 말한다. 보고서는 한국 방송사들이 “방송사 중심의 위계적 노동시장 구조 속에서 프로젝트형 노동시장의 불안정성을 협력사로 외부화시켜 관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방송사가 감당해야 하는 방송업 특유의 위험부담을 ‘을’ 지위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외부 스태프들의 고단한 육신에 떠넘기고 있다는 뜻이다.

변지민 기자 dr@hani.co.kr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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