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시가 주최하는 청년미술프로젝트전시에서 사전 검열로 ‘대구판 블랙리스트’ 사태가 일어난 지 벌써 한 달이 돼간다. 청년미술프로젝트는 대구시가 주최하고 한국미술협회 대구광역시지회(회장 박병구·이하 대구미협)가 주관해, 대구전시컨벤션센터(EXCO·엑스코)에서 열리는 전시다. 이 행사는 같은 기간 열리는 ‘대구아트페어’와 통합된 형태로 ‘2017 대구아트스퀘어’의 일부로 계획됐다. 만 40살 미만 청년 작가를 발굴·육성하겠다는 취지로 올해는 ‘내 침대로부터의 혁명’(a revolution from my bed)이라는 이름으로 8개국 27명의 국내외 젊은 작가를 초대해 이들이 창작한 다양한 현대미술 작품을 전시할 예정이었다. 이 전시는 “사회적 예술을 통해 세계가 당면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환경에서 나타나는 물적, 심리적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불평등과 부조리, 소외와 무관심, 집착과 탐욕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표방했다.
개막 3주 전 재편집·교체·수정 요구
그러나 전시 개막을 3주 앞둔 시점에서 대구시 공무원의 문제제기를 시작으로 전시 작품의 ‘사전 검열’이 이뤄졌다. 10월13일 조직위원회 회의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사드를 다룬 박문칠 감독의 단편 다큐멘터리 는 정치적 성향이 강하니 작품을 재편집하거나 교체하라는 권고가 내려졌다. 이어 열린 실무자 회의에서 윤동희 작가의 소묘 작품 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연상시키니 제외하고, 이은영 작가의 조각 작품 는 작가노트에 ‘세월호’라는 단어가 언급돼 수정해야 한다는 결론이 났다. ‘삶을 위한 예술’ ‘사회적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가치를 다룬다는 전시에서 사실상 특정 정치적 소재를 제외하거나 수정하라고 한 것이다. 해당 작품들은 이미 한 달 전, 전시 계약서라고 할 수 있는 전시 출품작의 약정서에 상호 날인한 상태였다. 전시 주최 쪽의 조치에 반발해 순차적으로 박문칠 감독, 윤동희 작가, 이은영 작가는 행사 보이콧에 나섰고, 이민정 협력큐레이터는 사퇴했다. 나는 애초 사전 검열 대상 작가는 아니었지만 이런 내용을 전해듣고, 10월20일 대구미협에 전화해 전시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통보했다.
이런 검열이 벌어진 실상을 알고도 전시 행사에 참여한다는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었다. 주최 쪽에 보이콧 의사를 전달하고, 전체 참여 작가들에게 이번 사태의 진행 과정을 알려야 했다. 나는 보이콧 작가들과 함께 여러 경로로 구체적인 사실을 전달했다. 그 과정에서 이민정 협력큐레이터가 책임을 다하지 않은 채 갑자기 사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른바 ‘꼬리 자르기’식의 책임 전가였고 일방적인 마녀사냥이었다. 그로 인해 나는 검열 사태의 진실을 알려야 했다. 하지만 김이삭 전시감독은 참여 작가들에게 ‘일부 작가들이 블랙루머를 퍼트리고 있으므로 법률자문단과 상의해 조만간 공식 입장을 밝힐 예정이니 전시에 전념하라’는 취지의 단체 전자우편을 보냈다. 이는 협박이었고 위선과 오만함이었다.
좁은 지역 미술계 안에서 블랙리스트로 낙인찍히면 작가로서 생명은 끝이 난다. 이제 작가로서 삶을 시작하는 20대 작가들에게 이는 감당하기 어려운 높은 벽으로 느껴진 것이 사실이었다. 반대로 화이트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서라면 권력에 치열하게 빌붙어야 하는 구조였다. 불과 몇 개월짜리 행사일지라도 전시에 목마르고 기회가 간절한 작가들에게는 선택의 폭이 넓지 않다. 특히 대구시가 주최하는 행사를 보이콧한다는 것은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하는, 한 개인의 표현 수단이자 선언이었다.
‘내용이 문제’ ‘형식이 문제’ 오락가락 해명10월30일 전국 300여 명의 예술인과 예술단체와 함께 이번 사태에 따른 성명을 발표하고, 기자회견을 통해 주최 쪽인 대구시와 주관사인 대구미협의 사전 검열과 부적절한 대응에 대해 공개 사과를 요청했다. 또한 엑스코와 대구시청 앞에서 보이콧 작가들과, 전시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도 뜻을 같이하는 외부 작가들이 함께 추운 겨울 1인시위를 이어갔다.
현재까지 주최 쪽은 책임 회피와 거짓말, 변명으로 일관하며 오락가락 행보를 보이고 있다. 주최 쪽은 사드 관련 작품이 (작가들에게는 한 번도 공지된 적 없는)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작품을 배제한다는 대원칙’에 따라 작품 교체를 권고했을 뿐이라며 사실상 사전 검열을 시인하는 견해를 내놨다. 이와 다르게 김이삭 전시감독은 “박문칠 감독의 단편 다큐멘터리 작품은 순수예술이 아닌 상업영화라는 형식 때문에 제외된 것이지, 작품 소재와는 무관하다”는 해명을 내놨다. 하지만 전시 주최 쪽이 스스로 작성한 회의록에 따르면 “정치적 성향이 강한 작품 내용 검토 후 권고”라고 돼 있지, 작품 형식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도 없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권영진 대구시장은 지역 언론을 통해 ‘대구시는 행사를 지원하고 개입하지는 않는다’는 견해를 내놨다. 그러나 최초 문제 제기자도 대구시 공무원이라는 정황이 있고, 검열이 논의된 조직위원회 회의와 이어 열린 실무진 회의 모두에 대구시 공무원이 배석했다. 대구시가 이번 사태와 무관하다고 발뺌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문제조차 못 느끼는 적폐청년미술프로젝트는 끝났지만, 보이콧 작가들이 함께 모여 따로 대안 전시를 열기로 했다. 대구시와 대구미협에서 받아주지 않는다면, 우리끼리 진짜 ‘사회적 예술’과 ‘청년 예술’이 무엇인지 보여주기로 한 것이다. 11월24일부터 대구 북성로 일대에서 20여 개 단체와 70여 명의 아티스트와 함께 항의성 대안예술제 ‘대구갑질박멸예술난장: 이것은 예술이 아니다’를 열고 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었다. 전시·공연·토론·라운드테이블·파티로 이루어진 행사에서는 검열당한 사드·세월호·국가폭력(박정희)이 다뤄지고, ‘열정페이’로 피해 본 예술가들의 음악, 박근혜 전 대통령을 풍자하는 그라피티로 벌금을 맞은 작품, 대구시에 ‘갑질’당한 청년들의 목소리가 모여들어 한판 난장이 펼쳐지고 있다.
지금까지 과정을 볼 때 검열보다 더 무섭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 당사자들이 검열해놓고도 검열을 한 것인지 명확히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런 검열 사태가 다름 아닌 미술계를 대변한다는 미술협회에서 일어났다는 것도 지역 미술계의 단면을 보여준다.
2015년 대구예술발전소에 입주하고 2016년 대구문화재단 기획자 양성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대구 미술계의 여러 문제를 볼 수 있었다. 2015년 대구사진비엔날레에선 국외 초빙된 전시감독 요시카와 나오야가 대구시 공무원과 조직위의 잦은 간섭으로 감독직을 사퇴할 뜻을 내비치는 등 마찰을 빚기도 했다. 최근 대구문화재단에서도 한 간부가 “대구민예총(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 대구지회)은 대구에서 사라져야 할 좌파 집단이고, 블랙리스트 작가는 지원에서 배제하라”고 직원들에게 공공연히 이야기했다는 사실이 전해졌다.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에 이 사건이 접수됐다고 한다.
이렇듯 관의 부당한 개입과 예술기관들의 공공연한 검열과 갑질이 지속됨에도 대구 미술계는 제대로 목소리를 내본 적이 없다. 그동안 지역 미술계에서 사적·공적 자리에서 진보적 발언을 아끼지 않던 인사들도 이번 검열 사건에는 침묵하고 있다. 현재의 상황을 누구보다 자세히 알고 있음에도 이해관계에 묶여 애써 외면하는 모습을 보고 적잖이 놀라고 실망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대구 미술계에 오랫동안 쌓여온 적폐가 아닐까 한다.
대안 전시를 준비하는 중에 한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대뜸 화내며 “검열 당사자도 아닌데 왜 전시를 하지 않았냐”고 했다. 선배는 진심으로 걱정해서 말한 것이었다. “보이콧하면 개인적으로 얻는 게 있어서 그런 거냐? 돈은 받고서 보이콧을 하는 거냐? 네가 80년대 운동권은 아니지 않느냐? 작품 활동 외에 정기적 수익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 판매되지 않는 전시를 하더라도 실속은 챙겨야 하지 않느냐?” 이러한 질문들은 전업작가라면 누구나 충분히 공감할 수 있고 익숙한 내용이다.
불리한 보이콧, 오히려 자랑스럽다불이익을 받을 것이 뻔히 예상되는 보이콧이었지만 동참 결정을 내리기까지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랑스러웠다. 미술계의 부당함에 온몸을 부딪쳐 저항하는 의미로 전시에 참여하지 않고 최전선에서 문제 제기를 하며 자기 작품을 지켜온 선배 작가, 전업작가로서 사명감과 소신을 힘겹게 지켜내는 동료 작가, 전시회를 전시회답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전시기획자, 그리고 차가운 이성으로 작품을 평가하지만 작가와 작품 자체를 본인처럼 아끼는 독립큐레이터와 함께하고 있어 든든하다. 이번 검열 사태를 보고 겪은 청년 작가들로부터 대구의 변화는 시작될 것이다. 전국에 계신 많은 시민과 미술 애호가들이 어렵게 내디딘 이들의 첫걸음을 따뜻한 애정으로 격려하고 응원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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