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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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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이여, 빨간 우산으로 오라

‘프리랜서’ 방송작가들, 중노동·저임금·고용불안·임금체불에 맞서 깃발 들다

지난 11월11일 출범한 ‘방송작가노조’ 이미지 지부장 등 임시집행부 5명 인터뷰
등록 2017-11-14 14:34 수정 2020-05-03 04:28
11월8일 오후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언론인회관 내 언론노조 사무실에서 ‘방송작가노조’ 임시집행부가 노조 출범을 앞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맨 오른쪽이 이미지 방송작가노조 지부장, 그 왼쪽이 이향림 사무국장. 김봉규 선임기자

11월8일 오후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언론인회관 내 언론노조 사무실에서 ‘방송작가노조’ 임시집행부가 노조 출범을 앞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맨 오른쪽이 이미지 방송작가노조 지부장, 그 왼쪽이 이향림 사무국장. 김봉규 선임기자

노동권 사각지대에 놓인 방송작가들이 비를 피해갈 수 있는 ‘빨간 우산’이 떴다. 전국언론노동조합 방송작가지부(이하 방송작가노조)가 11월11일 출범했다. 지상파 텔레비전과 라디오, 케이블방송, 외주제작사에서 일하는 시사교양·드라마·예능 분야의 방송작가 100여 명이 뜻을 모았다. 2015년 11월 ‘방송작가 노동인권 실태조사’로 시작된 방송작가 권리 찾기 운동이 2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결실을 맺은 셈이다.

방송작가는 한 방송 프로그램의 기획·취재·섭외·대본집필 등 방송 제작의 허리 역할을 하는 직업이다. 일부 메인작가를 제외하면 회사의 업무 지시를 따르며 종속된 형태로 일하지만, 대부분 ‘프리랜서’(자영업) 계약을 맺고 있다. 그로 인해 대다수 방송작가들은 장시간 노동에 저임금, 고용불안, 임금체불을 겪는 등 열악한 노동조건에 놓여 있다. 4대 보험 가입률 역시 바닥 수준이다. 방송작가 수가 얼마인지 정확한 실태 조사가 이뤄진 적은 없지만 전국에 약 1만 명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어, 나도 그랬어’라는 한마디</font></font>

은 방송작가노조 출범을 계기로 이미지 노조 지부장(tbs 라디오 메인작가)을 포함한 임시집행부 중 5명을 11월8일 서울 중구 한국언론인회관 18층 언론노조 사무실에서 만났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말이 통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노조의 장점으로 꼽았다. 일상에서 각자 섬처럼 고립돼 있는 작가들의 현실을 반영하는 말처럼 들렸다.

인터뷰에 응한 5명 가운데 이 지부장과 이향림 사무국장(다큐 분야 4년차) 외 3명은 익명을 요청했다. ‘메달리스트김’은 드라마·예능 분야 23년차 작가이고, ‘N작가’는 2009년부터 불연속적으로 시사교양 분야 등에서 일했다. ‘이연희’(가명)는 시사교양 14년차 작가다. 이들은 “마땅히 누려야 할 노동권을 보장받기 위해 노조를 설립했다”고 말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인데도 신선하게 들렸다.

방송작가노조가 11월11일 출범했다. 축하한다. 뿔뿔이 흩어져 있던 방송작가들이 모여 노조를 만든 이유는 뭔가.

이미지 방송작가는 프리랜서라는 이름으로 노동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PD 등 다른 직군과 함께 일하지만 특수고용직 노동자로 마땅히 누려야 할 노동권을 보장받지 못한다. 방송작가도 언론노동자다. 처우 개선에 직접 목소리를 내고 해결하는 주체가 돼보자는 생각에 설립하게 됐다. 놀랄 만큼 많은 분들이 방송작가노조 출범을 응원해주셨고 ‘당연히 필요하지’라는 반응을 보였다. 방송작가는 파편화된 직업이다. 프로그램별로 고용돼 일하다보니 단일 방송국에서 일하는 작가들조차 연대하기 어렵다. 누구보다 ‘결사체’가 필요한 직업이다. 노조의 상징 역시 함께 비를 피하자는 뜻에서 ‘빨간 우산’으로 했다. 빨간색은 비 올 때 눈에 잘 띄는 색이다. 작가들이 노조에서 감정적 연대를 바탕으로 불합리한 현실을 개선해나가는 데 힘을 모았으면 좋겠다.

이연희 십 몇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신입(막내)작가에 대한 규정이나 룰이 제대로 없던 곳에서 일을 시작했다. 일주일 내내 일하고 주급 6만7700원을 받았다. 식권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서러워 화장실에서 운 적이 많다. 힘든 점을 방송사 밖 친구들한테 말하면 잘 이해하지 못한다. 한참 설명을 해야 한다. 노조에서는 다르다. “나 화장실에서 울었어” 한마디만 해도 “어, 나도 그랬어”라는 말이 당장 튀어나온다. 내 사정에 공감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좋다.

메달리스트김 열심히 아이디어를 내서 방송사 예능 프로그램을 다 기획했는데, 첫 녹화만 하고 빠지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내 연차가 높아 돈을 많이 줘야 하니까 낮은 연차의 작가로 바꾼 거다. 굉장히 억울했지만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노조가 생기면 이런 문제를 공유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팀과 노조는 다르다. 같은 팀원이라도 이해관계가 다르고 말이 돌다보면 마녀사냥이 될 수 있어 조심스럽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우리는 열심히 실패해야 한다”</font></font>어떤 활동을 해나갈 계획인지.

N작가 막내작가 처우 개선 등 작가 사회에서 공감대가 넓은 문제부터 다뤄야 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방송작가를 (프리랜서가 아닌) 노동자로 인정하는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작가 내부에도 인식이 다른 사람이 있어 문제 해결에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미지 방송작가마다 놓인 상황이 모두 달라 어렵다. 방송사, 제작사, 장르, 연차마다 처우가 다르다. 대다수 작가들은 처우가 안 좋지만 ‘스타 작가’는 상상하기 힘든 돈과 권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다층적인 차이를 인정하고 천천히 방법을 찾아봐야 한다. 초창기 사업은 ‘방송작가 표준근로계약서 전면 도입’ 등 대다수 조합원에게 해당하는 일부터 시작하려 한다. 여러 단체와 연대해 법과 제도를 정비하는 문제에 집중할 것이다. 사업장별 지회 설립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해 일단은 산별노조 형태로 교섭할 수밖에 없다.

이향림 언론노조 조직실에서 표준계약서 작성 거부, 임금체불, 부당 처우, 근로기준법 위반 등을 겪은 방송작가들을 위해 노동·법률 상담을 하고 있다. 상담 사례를 모아 노동인권 침해가 잦은 사업장의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정기적으로 공개할 생각도 있다.

앞으로 노조가 만나게 될 가장 큰 난관은.

이미지 작가들이 겪는 어려움이 방송 환경과 복잡하게 얽혀 있다. 단순히 메인작가나 PD와의 개인적 관계나 관행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니다. 방송사가 외주제작사의 제작비를 마음대로 줄이면 그 영향이 작가에게 고스란히 내려온다. 편성과 제작 정책, 방송 콘텐츠 시장의 고질적인 문제까지 함께 개선해야 한다.

이향림 겉으론 조그마한 상처가 보일 뿐인데 속으로는 말기 암인 거다.

N작가 당연히 시행착오가 있을 거다. 우리가 열심히 실패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다음에 누군가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 2001년 마산MBC에서 일하던 방송작가 선배들이 전국여성노동조합에 가입하는 등 방송작가 노동조합 결성 움직임이 있어왔다. 선배들의 땀과 눈물이 방송작가 노조 출범의 밑거름이 돼주고 있다. 안 풀리면 안 풀리는 대로 머리를 맞대자.

이향림 일단 술을 자주 마시면서 친해져야 한다.

이미지 근데 술 마실 시간이 없다. 작가들이 하도 바빠서.

<font size="4"><font color="#008ABD">지난 9년, 이름 없이 사라진 작가들 </font></font>

노조를 만들기 위해 참고한 다른 노조가 있나.

이미지 영화 스태프들이 가입하는 영화산업노조 등을 참고했지만 방송작가 같은 직군은 없다. 방송작가 노조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만드는 거다.

방송작가는 보통 ‘메인-서브-막내’ 작가로 위계가 있다. 그중 메인작가는 상대적으로 처우가 좋고 발언력이 있는 편이다. 지부장을 비롯해 노조에 메인작가들이 있는 이유는 뭔가.

이미지 방송작가는 이직률이 높다. 많은 작가가 나쁜 처우를 개선하기보다 떠나는 길을 택한다. 후배들은 지금보다 나은 환경에서 일하게 하고 싶다. 떠나거나 버티기보다는 개선해나가면서.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나도 두려움이 있다. 그래도 누군가 필요하다면 소명을 맡을 거다.

메달리스트김 메인작가도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원고료와 방송 환경 등 제작사와 방송사가 책임져야 할 문제를 메인작가에게 지우는 구조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이어진 지난 9년은 방송작가에게 어떤 시간이었나.

이연희 시사프로그램을 했는데 정말 힘들었다. 세월호나 노동, 정부에 민감한 아이템들을 다루지 못했다. 위로부터 “촛불집회 다루려면 태극기집회와 반반 섞어서 해라”는 말을 들었다. 이 일을 사랑하지만 ‘내가 이렇게까지 해서 벌어먹고 살아야 하나’라는 자괴감이 들었다. 공영방송만 해도 시사프로그램에 음악PD를 앉히는 식으로 프로그램을 무력화하는데, PD도 작가도 엄청나게 힘들어진다.

이향림 드라마·예능 분야도 마찬가지다. 블랙리스트 섭외 못하고.

이미지 어느 작가가 그러더라. “우리는 파업노동자도 되지 못한다”고. 지난 9년 동안 정부가 방송을 장악하고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없애면서 많은 작가가 해고당했다. 고연차 강성 작가는 저연차로 교체해버렸다. PD들은 탄압받으며 대중적으로 지지를 받았지만 이름 없이 사라진 작가들은 밥벌이만 사라졌을 뿐이다.

공영방송이 어떻게 변해야 할까.

이연희 9년 전으로 돌아가는 데 그쳐선 안 되고 새로운 길로 가야 한다. tvN 의 고 이한빛 PD나 EBS 촬영 중 불의의 사고를 당한 박환성·김광일 PD의 일을 기억해야 한다. 비정규직과 방송 스태프들의 눈물도 닦아줄 수 있어야 한다.

이미지 현재 공영방송 구성원들이 방송작가들의 처우를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공영방송 적폐 청산 과정의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는 있지만 방송작가 처우가 개선돼야 한다는 공감대는 형성돼 있다. 다른 직군과 연대하면서 방송작가들의 입지를 어떻게 키울지 생각하고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더 이상 참고 싶지 않다면</font></font>노조에 참여하고 싶은 방송작가는 어디로 연락하면 되나.

이미지 페이스북에서 ‘방송작가유니온’을 검색해서 메신저를 주면 된다. 또는 언론노조(02-739-7285)로 전화하면 된다.

N작가 작가들이 “열악한데 참고 일해줘서 고마워”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더 이상 참고 싶지 않은 분들이 꼭 왔으면 좋겠다.

변지민 기자 d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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