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에 ‘핵발전소’라는 표현을 쓰셨던데, 환경단체가 쓰는 말이잖아요. 가능하면 ‘원전’이라고 좀 고쳐주셨으면 합니다.”
지난 7월 어느 날,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 관계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내가 쓴 기사에 담긴 ‘신고리 핵발전소 5·6호기’라는 용어가 부적절하다는 항의였다. 그는 고쳐야 할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진 못했다. 핵발전소와 원자력발전소(원전) 가운데 어느 단어를 썼는지를 두고 ‘너는 어느 쪽이냐’ 묻고 싶었을 뿐이다. 신고리 5·6호기의 공사 중단을 둘러싼 공론화가 진행되고 있는데, 최근 두 단어를 둘러싼 논쟁은 간단치 않다.
“원자력발전은 정확한 표현 아냐”핵발전소와 원전, 어느 용어를 쓰느냐에 따라 진영이 갈리는 ‘프로파간다’(Propaganda·대중 선전) 수단처럼 취급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월19일 ‘고리 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 참여해 내놓은 연설에 대한 반응이 대표적인 예다.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저의 탈핵, 탈원전 정책은 핵발전소를 긴 세월에 걸쳐 서서히 줄여가는 것이어서 우리 사회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라며 탈핵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그러자 이날 문 대통령이 사용한 ‘탈핵’과 ‘핵발전소’라는 단어가 도마 위에 올랐다.
한수원과 한국원자력산업회의 등 원자력계는 공식적으로 밝히진 않지만 “핵이라는 단어의 부정적 어감이 원자력산업에 대한 오해를 불러온다”며 핵발전소라는 단어를 불편해한다. 환경단체는 정반대 입장이다. ‘원전’ 대신 ‘핵발전소’, ‘탈원전’ 대신 ‘탈핵’이라는 단어를 쓴다. 또 그렇게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들은 “원자력이라는 단어엔 깨끗하고 안전한 첨단 기술이라는 이미지가 녹아 있다. 그래서 핵발전소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가로막는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핵발전 이후 발생하는 사용후 핵연료에서 새나오는 방사선 수치가 줄어들려면 천문학적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경북 경주 월성에 있는 ‘방사성폐기물처분장’도 ‘처분’이라는 표현을 뺀 ‘핵폐기장’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오래된 논쟁’일까. 60년을 조금 넘긴 핵발전 역사를 되짚어보자. 세계 최초의 핵발전소는 러시아(옛 소련)가 1954년 만든 오브닌스크 핵발전소다. 전세계적으로 핵발전소가 주목받은 계기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이 1953년 유엔 연설에서 주장한 이른바 ‘평화를 위한 원자력’ 선언 이후였다. 그는 “잘못 사용된 원자력은 인류의 삶에 종지부를 찍으며, 슬기롭게 사용된 원자력은 인류에게 희망과 더 나은 삶을 약속한다”고 말했다. 냉전시대의 핵무기 개발을 중단하고, 전기 생산 등에 원자력을 활용하자는 선언이었다.
“‘핵’ 지칭은 혐오감 확산 의도”1958년 ‘원자력법’을 제정한 뒤 본격적으로 핵발전을 준비해온 한국도 이 선언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핵’ 대신 ‘원자력’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그 이유를 아이젠하워의 연설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가 원자력을 ‘아토믹 파워’(Atomic Power·원자력), 핵무기를 ‘아토믹 웨폰’(Atomic Weapon·원자 무기)이라고 표현했기 때문이다. 현재는 원자라는 표현보다 ‘핵’(Nuclear)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최무영 서울대 교수(물리천문학)는 인터뷰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과거에 사람들이 원자와 핵의 구조를 잘 모를 때 에너지가 원자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원자력이란 말이 나왔다. 하지만 원자가 에너지를 내는 게 아니라 핵이 분열할 때 에너지가 발생한다는 사실이 증명됐기 때문에 더 이상 원자력발전이란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핵에너지라고 쓰는 게 맞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번역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과 일본 등에선 핵과 원자력을 철저히 구분하기 때문이다. 거기엔 묘한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다. 1961년 도카이에 첫 상업 핵발전소를 지은 일본은 군사적 목적의 ‘핵무기’와 평화적 목적의 ‘핵발전’을 구분해야 했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끔찍한 경험 탓에 사회 전체에 ‘핵’에 대한 실존적인 트라우마가 뚜렷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은 평화적 핵 이용을 뜻할 때는 ‘원자’를, 군사적 핵 이용을 뜻할 때는 ‘핵’을 사용한다. 그에 따라 일본에선 원전을 ‘겐시료쿠하츠덴쇼’(原子力發電所), 핵무기는 ‘가쿠헤키’(核兵器)라고 칭한다. 같은 한자 문화권인 중국에서 핵발전(허넝파띠엔·核能發電)과 핵무기(허뎬잔·核電站)에 모두 ‘핵’을 쓰는 것과 대조적이다. 1993년 홍콩 옆 다야완에 최초의 핵발전소를 세웠다.
원자력은 정부의 언어였지만, 핵발전소 도입 초기엔 원자력과 핵은 ‘전혀 다른 표현’이 아니었다. 는 1946년 1월31일 세계군축회의를 보도하면서 “미 상원의원이 ‘원자력 사용을 중지하라’고 했다”고 썼다. 도 1975년 7월2일 “프랑스가 한국의 핵발전소 건설에 대한 투자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해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했다”고 적었다. 현재 원자력계 기준으로는 “반핵 단체스러운” 표현이다.
원자력계가 핵이라는 단어를 꺼리기 시작한 것은 탈핵에 대한 시민 의식이 조금씩 성숙하는 1990년대 중반 이후인 것으로 보인다. 1986년 우크라이나(옛 소련) 체르노빌 핵발전소에서 최악의 방사능 유출 사고가 벌어지면서 유럽 등에서 탈핵운동이 시작됐다. 민주화 이후 환경운동이 활발해진 국내 시민사회도 그 영향을 받았다.
탈핵 바람에 대한 원자력계의 조바심은 의 한 기고문에서 엿볼 수 있다. 한수원 관계자는 1997년 10월28일 독자 투고를 통해 “원자력발전소를 굳이 핵발전소라고 부르고, 줄임말도 원전이라는 용어를 놔두고 ‘핵전’이라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사용하는 표준어를 제쳐놓고 공포적인 어휘를 사용하는 일은 이제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20년 뒤 한수원 관계자가 내놨던 주장과 같다.
그러나 원자력계가 주도해온 이런 ‘구분짓기’는 별 효과가 없어 보인다. 핵발전소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성찰 없이 용어만 문제 삼는 데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외교안보수석을 지낸 천영우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이 2017년 7월13일 에 쓴 글이 대표적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 안전을 원전이 위협한다는 근거로 제시한 지진의 위험성과 후쿠시마 사고 사망자 수 등은 대부분 괴담 수준의 왜곡되고 과장된 것들로 반(反)원전 시민·환경단체의 주장과 다를 바 없다. 원자력을 ‘핵’이라고 지칭하는 것도 원자력의 공포감과 혐오감을 확산하기 위한 반원전 단체들의 의도다.”
원래 핵발전소였다단어 하나로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남긴 고리 1호기 기공식 기념사가 좋은 답변이 될 만하다. 핵발전소는 원래 핵발전소였으니까.
“세계에서 스물한 번째로 핵발전 국가 대열에 참여하게 돼 과학 한국의 모습을 자랑하게 되었습니다.”(1971년 3월19일)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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