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새 학기가 열렸다. 고3 수험생들이 반드시 봐야 할 책이 있다. 한국교육방송공사(EBS)가 펴낸 다. ‘열공’(열심히 공부)하란 잔소리가 아니다. 한국사는 올해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부터 시험 필수과목으로 지정됐다. 그리고 이 교재는 수능 한국사 시험의 유일한 연계 교재다. EBS 교재의 수능 연계율은 70%다. 입시학원은 물론이고, 학교들도 거의 다 교과서 대신 EBS 교재로 수업하는 이유다. 절대평가로 바뀌고 등급컷이 헐거운 과목일지라도 수능 불안감에 시달리는 고3 학생이라면 이 교재를 한 번쯤은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중학교 역사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2017년 3월부터 단일 국정교과서로 바뀐다. 정부는 전국 고등학교의 99.9%가 편향된 역사 교과서로 가르치고 있다며 지난해 11월 국정 역사 교과서 도입을 위한 고시를 확정했다. 그 뒤 처음 나온 EBS 한국사 수능 교재가 바로 다. 국정교과서가 도입·반영되기 전이지만 이 교재를 다 보면 벌써부터 “그런 기운이 온다”.
은 10여 년간 입시 현장에서 역사를 가르쳐온 심용환 강사의 자문을 받아 이 교재를 처음으로 분석했다. 지난 2년간 발행된 (2014년·2015년판) 교재와 하나하나 비교·대조했다. 그러자 망령의 기운이 ‘박정희’의 얼굴로 나타났다.
2016년 교재는 이전 교재와 형식이 일부 달라졌다. 현재 고3 수험생이 고1이던 2014년부터 교육과정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대표적 변화는 근현대사의 비중 감소다. 70% 정도에서 50% 정도로 줄었다. EBS 교재도 그에 맞게 근현대사 비중이 줄었다. 2014년, 2015년 교재는 191쪽 중 141쪽(73%)이 근현대사 단원이다. 반면 2016년엔 188쪽 중 104쪽(55%)으로 비중이 줄었다.
모든 내용이 고르게 줄진 않았다. 뺄 부분은 빼고 강조할 부분은 강조했다. 가장 눈에 띄는 시기는 1960~70년대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기다. ‘박정희’의 공은 부풀리고 과는 찌그러뜨렸다. 대선도 아닌 대입에서 ‘박정희의 복권’이 시도되는 셈이다. 교재에 등장한 역사적 사건을 차례대로 살펴보자.
1. 베트남 파병(1964~73)1964년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내전 중인 북베트남의 폭격에 본격 나섰다. 1971년 미 국방부 문서가 공개되면서 통킹만 사건은 전쟁 개입을 위한 미국의 자작극으로 밝혀졌다. 전세계적인 반전운동을 불러온 베트남전으로 미국은 대내외적 비판에 휩싸였다. 결국 11년 만에 패배하고 철수했다. 세계사 상식이다.
그동안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들도 박정희 정권이 베트남전에 군대를 파병한 명분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중립적인 평가를 내려왔다. 2014년, 2015년 EBS 교재는 베트남 파병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아시아의 반공 전선을 확고히 하려는 미국의 의도와 경제개발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려는 박정희 정부의 이해가 일치.” 전국 고등학교에서 가장 많이 채택한 한국사 교과서(2014년 10월 기준)인 미래엔 교과서는 베트남 파병 배경의 문제점을 좀더 풀어서 설명하고 있다. “(베트남) 파병은 국제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했고, 야당을 비롯한 국내 여론도 부정적이었다. 그렇지만 박정희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한국군의 현대화와 경제발전을 위한 기술 및 차관 제공 등을 약속받았다.”
하지만 2016년 교재에선 그 배경에 대해 “자유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파병”이라고 잘라 표현한다. 베트남 파병의 명분을 긍정적이고 단정적인 설명으로 바꾼 것이다. 이는 반공주의를 통치 수단으로 삼은 박정희 정권의 파병 논리와 같다.
2. 3선 개헌(1969)(1964~73)박정희 정권은 1967년 재선한 뒤 3선을 위해 헌법을 뜯어고쳤다. 1969년 ‘3선 개헌’이다. 당시 신민당 박한상 의원이 10시간 넘게 필리버스터(무제한토론)를 했지만 여당을 당할 수 없었다. 여당은 일요일 새벽 본회의장 대신 국회 제3별관에 모여 개헌안을 편법 통과시켰다. 경찰·공무원의 삼엄한 통제 아래 진행된 국민투표로 개헌은 확정됐다. 3선 개헌은 박정희 정권이 장기 집권을 목적으로 편법을 동원한 역사다.
2014년, 2015년 교재는 3선 개헌에 관해 ‘여당의 편법’과 ‘야당·학생·국민들의 (장기 집권 음모에 대한) 반발’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2016년 교재는 “안보와 경제성장을 내세워 대통령 3회 연임 허용 개헌안을 통과”라고만 서술했다. 3선 개헌의 문제점에 대한 최소한의 언급도 하지 않은 것이다.
3. 긴급조치(1974~79)박정희 정권은 1972년 12월 또다시 헌법을 뜯어고쳤다. 이른바 유신헌법이다. 대통령이 의장인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과 국회의원 3분의 1을 뽑고 대통령 중임 제한을 없앴다. 영구 집권 프로젝트다. 그리고 대통령에게 긴급조치 권한을 줬다. 긴급조치는 ‘국가 안보’와 ‘공공의 안녕’을 명분으로 사법을 포함한 국정 전반에 대해 행사하는 막강한 권한이다.
예를 들어 1975~79년에 적용됐던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 반대를 주장하기만 해도 영장 없이 구금할 수 있도록 했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2010년 이후 잇따라 긴급조치를 위헌이라고 판결·결정했다. 2014년, 2015년 교재도 긴급조치에 대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초헌법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설명해왔다.
하지만 2016년 교재는 긴급조치를 “유신헌법에서 대통령에게 부여한 권한으로,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잠정적으로 중단할 수 있었다. 이는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국민을 탄압하는 데 이용되었다”고 설명한다. 이전의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초헌법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설명이 ‘국민의 기본권을 잠정적으로 중단할 수 있었다’는 표현으로 완곡하게 바뀐 것이다.
이 표현은 공교롭게도 유신헌법의 논리 및 표현과 같다. 유신헌법 제53조 2항은 이렇다. “대통령은 제1항의 경우에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이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하는 긴급조치를 할 수 있고, 정부나 법원의 권한에 관하여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
4. ‘한강의 기적’박정희 정권의 ‘과’가 미화되거나 희석된 반면 ‘공’은 부풀려졌다. 근현대사 단원 비중이 이전 교재에 견줘 크게 줄었지만,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에 대한 설명은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그 내용도 ‘성과’를 더욱 조명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대표적인 내용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81)이다. 다른 근현대사 내용이 크게 줄어든 반면 이 계획에 대한 설명은 이전 교재와 거의 동일한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성과’를 강조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
2014년, 2015년 교재는 그 성과를 “국민소득의 증대, 고도성장, 식량 증산, 산업구조의 현대화→‘한강의 기적’ 이룸”으로 5가지로 나눠 설명하고 있다. 대신 그 문제점도 “저임금·저곡가 정책으로 소득 격차와 도농 간 격차 심화, 경제의 외국 의존도 심화, 정경 유착, 재벌 중심의 독점자본 성장, 산업 간 불균형 심화”로 5가지를 나열했다.
반면 2016년 교재는 ‘성과와 한계’를 묶어 이렇게 서술한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급속한 경제성장 이룸, 1인당 국민소득 급증. 도시와 농촌 간 소득 격차 문제 야기, 경제의 대외 의존도 심화.” 성과와 한계를 2가지씩으로 동일하게 줄인 것이다.
하지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결과-‘한강의 기적’’이라는 제목의 상자 설명을 따로 크게 넣어 “이렇게 대한민국은 경제개발 계획이 추진되면서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하였는데, 이를 ‘한강의 기적’이라고 한다”고 다시 한번 강조한다(그림1 참조). ‘한강의 기적’이란 관용구가 같은 페이지에만 세 차례 등장한다. 이전 교재들에선 상자 설명으로 ‘한강의 기적’ 대신 산업의 변화를 주제로 ‘중화학공업 육성 선언’을 다뤘다(그림2 참조).
박정희 정권은 유신체제를 본격화할 무렵인 1970년 농촌 재건과 소득 증대 운동인 새마을운동을 추진했다. 이후 퍼스트레이디였던 박근혜 대통령이 주도한 ‘새마음운동’ 등 전국적인 의식 개혁 운동으로 확장·전환됐다. 새마을운동에 대한 설명은 이전 교재에 견줘 오히려 분량이 늘었다. 그럼에도 비판적인 서술은 사라졌다.
2014년, 2015년 교재는 새마을운동에 대해 “근면·자조·협동을 바탕으로 농촌 환경 개선에 중점을 둔 정부 주도 운동, 농가 소득 증대 및 농어촌 근대화에 기여→점차 도시와 직장으로 확대, 국민 정신 운동으로 전개, 유신체제 합리화에 이용되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함”이라고 설명한다. 그 운동의 긍정적 효과를 나열한 가운데 당시 영구 집권을 기도한 박정희 정권의 통치 수단으로서 성격을 지적한 것이다.
반면 2016년 교재는 본문에서 새마을운동을 “박정희 정부 주도, 농촌 환경 개선과 소득 증대 목표, 근면·자조·협동 강조”라고 짤막하게 소개한다. 그러곤 본문 옆에 낱말풀이 형식으로 “정부가 1970년부터 추진한 새마을운동은 농어촌의 소득 증대와 환경 개선에 이바지하였으며, 도시에도 확산되어 우리도 잘살 수 있다는 전국적인 의식 개혁 운동으로 이어졌다”고 덧붙인다. 긍정적인 서술뿐이다.
6. 사회운동·통일정책(1970~)박정희의 공을 부각하는 내용이 늘어나면서 급격히 쪼그라든 내용도 있다. 대표적인 내용이 사회운동의 성장과 통일정책 및 북한 체제의 변화다.
2014년, 2015년 교재는 농민·노동·시민·여성운동과 도시화와 빈민 문제, 사회보장제도 발전 등을 두루 다룬 반면, 2016년 교재는 이를 노동운동에 대한 설명 단 2줄로 갈음했다. 북한 체제의 변화 양상과 남한의 통일정책 역사에 대한 내용도 급감했다. 대신 북한에 대한 설명에 ‘반대파 숙청’ ‘공개 처형’ ‘정치범 수용소’ ‘천안함·연평도 사건’ 등 북한 인권 및 도발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이 새롭게 보강됐다.
새 학기부터 새로 도입된 초등학교 6학년 역사 교과서에서도 이런 변화가 감지된다. 이 교과서는 5년 만에 개정된 책으로서 박근혜 정부 들어 내놓은 첫 국정 역사 교과서다. 민족문제연구소·전국역사교사모임 등 7개 역사단체로 구성된 역사교육연대회의는 2월29일 이 교과서 최종본에 대한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분석 자료를 보면 이 교과서는 5·16 쿠데타를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당시 정부가 4·19 혁명 이후 나온 각계각층의 요구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자, 박정희를 중심으로 하는 일부 군인들이 국민 생활의 안정과 공산주의 반대를 주장하며 군대를 동원하여 정권을 잡았다.” 당시 정부의 무능 탓에 국가를 구하려고 쿠데타를 했다는 전형적인 합리화 논리다.
역사교육연대회의는 “오류 93개, 편향성 31개 등 124개 서술에서 문제점이 발견됐다”며 “특히 현대사 부분에서 박정희 정권에 우호적이고 편향적인 서술이 눈에 띄게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망령의 그늘이 짙다. 정부는 내년 도입될 국정교과서의 집필진과 집필 기준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번 2016년 수능특강 한국사 교재는 2014년, 2015년 교재와 달리 이례적으로 단원별 저자를 적지 않았다.
김선식 기자 kss@hani.co.kr※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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