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삼성은 이 하얀 공을 받을까

조정위 권고안에 따르면, 제1047호 표지이야기에서 집계한 10명 가운데 최대 3명꼴이 67.9%로 크게 늘어나…삼성전자는 “회사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밝힌 내용 포함” 곤혹스러운 속내
등록 2015-07-28 17:54 수정 2020-05-03 04:28

삼성전자 백혈병 문제를 사회적 합의로 해결할 길이 열렸다. 2007년 3월 황유미씨의 죽음 이후 반도체 산업 노동자들의 직업병 문제가 세상에 알려진 지 8년 만에 비로소 구체적인 해결의 가닥이 잡힌 셈이다. ‘삼성전자 반도체 등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조정위)는 지난 7월23일 조정권고안을 내놨다. 삼성전자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반올림), ‘삼성직업병피해자가족대책위원회’(가대위) 등 조정당사자 3주체가 낸 제안을 바탕으로 조정위가 내놓은 중재안이다.

김지형 조정위원장(오른쪽)이 지난 7월23일 삼성전자 백혈병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권고안을 발표하고 있다. 정용일 기자

김지형 조정위원장(오른쪽)이 지난 7월23일 삼성전자 백혈병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권고안을 발표하고 있다. 정용일 기자

대상이 되는 질환은 총 28종

“삼성전자가 초일류 기업에 걸맞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는 의지, 이번 사안을 사회적 의제로 해결해나가려는 전향적인 태도를 보여줬다. 피해자들이 그동안 어려움을 묵묵히 견뎌왔고, 반올림이 이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제시한 점에도 경의를 표한다.” 김지형 조정위원장(전 대법관)이 이날 조정권고안 발표에 앞서 한 인사말의 행간에는 지난 7개월간의 고민, 권고안을 받아들여달라는 간절한 마음이 배어났다. 김 조정위원장과 정강자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초빙교수,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 환경보건학과 교수로 구성된 조정위는 지난해 12월부터 수차례 조정당사자들과 만났다. 반도체 산업 직업병에 대한 국내외 역학조사 결과 등 광범위한 자료도 검토했다. 그 고민이 집약된 결과물이 조정권고안이다.

조정권고안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다. 일단 삼성전자가 1천억원을 기부해 공익법인을 만든다. 이 공익법인이 피해 보상, 재해 예방 대책 등 조정권고안에서 제시한 관련 사업을 수행하게 된다. 공익법인 설립 발기인은 대한변호사협회, 경제정의실천시민연대, 참여연대, 한국산업보건학회 등 관련 시민사회, 전문가 단체 7곳이 각 1인을 추천해 선정된다. 이들 7명이 나중에 공익법인 이사회를 구성한다.

조정위는 가장 첨예한 쟁점이었던 보상 원칙과 기준도 내놨다. 은 삼성전자가 지난 1월 조정위에 제출한 보상안을 적용하면, 피해자 10명 가운데 최대 3명꼴로만 보상받을 수 있다고 단독 보도한 바 있다( 제1047호 표지이야기 ‘바늘구멍 보상안이 뉴챌린지의 서막인가’ 참조). 이 기사는 조정위에 참고자료로도 제출됐다. 조정위는 이러한 삼성전자의 제안보다는 훨씬 더 보상 범위를 넓혔다.

보상 대상이 되는 질환은 총 28종이다. 삼성이 제시한 7종뿐만 아니라 난소암, 생식질환(유산·불임), 희귀질환(다발성경화증 등), 희귀암(흑색종 등)이 포함됐다(표1 참조). 근로복지공단과 법원이 업무상 질환으로 인정하지 않은 2·3군 질환(조정위 분류 기준)도 보상 대상에 포함시킨 것이다. 하지만 보상금액은 1·2·3군 질환에 따라 차등 지급한다.

조정위는 잠복 기간도 최대 14년(백혈병·유방암·뇌종양 등)까지 비교적 넉넉히 인정해줬다. 다만 2011년 1월1일 이전에 1년 이상 근무했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또 ‘삼성전자 반도체 및 LCD 사업장에서 일한 근로자’로 보상 대상자를 표현해, 해당 사업장에서 일한 협력업체 비정규직도 포괄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뒀다.

이와 관련해 김지형 조정위원장은 “보상의 개념을 국어사전적 의미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삼성전자가 조정 제안을 하면서 누군가에게 안겨줬던 고통을 하루라도 빨리 위로하고 싶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이런 차원에서 산업재해로 의심되는 피해자와 가족의 아픔을 덜어주는 방향으로 나가겠다는 보상 원칙을 제시했다”고 설명했다.

1. 공익기금 2. 옴부즈맨 3. 사과?

은 이번 조정권고안에 따른 피해 보상 규모를 다시 추산해봤다. 반올림에 접수된 피해 사례 196명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확실하게 보상 대상이 되는 피해자는 133명으로 67.9%에 이르렀다(표2 참조). 10명 중 7명가량은 보상받을 수 있는 셈이다. 재직 기간이나 발병 시점 등이 불명확해 보상 대상 여부가 확실치 않은 23명(11.7%)까지 포함하면, 보상 규모는 10명 중 8명꼴까지 늘어날 수 있다. 갑상선암 등 아예 보상 대상이 아닌 피해자는 40명(20.4%)이다. 올초 삼성전자가 제시한 기준에 따른 보상 규모 추산 때는 보상 대상이 8.5%, 보상 대상 여부가 확실치 않은 경우가 25.8%였다. 삼성전자가 특수건강진단 대상자 등 까다로운 기준을 내놨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권고안 내용 중에는 회사가 여러 차례에 걸쳐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밝힌 내용이 포함돼 있어 고민된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조정권고안에 대해 가족의 아픔을 조속히 해결한다는 기본 취지에 입각해 신중히 검토하겠다”면서도 곤혹스러운 속내를 내비친 셈이다.

삼성이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밝힌 내용은 몇 가지로 짐작된다.

첫째, 보상과 관련된 대목이다. 보상 범위에서 삼성전자는 난소암, 희귀질환 등은 원칙적으로 제외하고 “전문가들의 타당한 근거가 있으면 예외로 논의하자”고 했었다. ‘공익기금 추가 조성’도 삼성 입장에선 고민이다. 조정위는 일단 700억원을 보상금으로, 300억원을 공익법인 운영자금과 재해예방사업 등으로 쓴 뒤 보상금액이 부족하면 추가 조성하자고 제안했다.

둘째, 공익법인 구성과 역할의 문제다. 외부 인사들이 공익법인 이사회를 구성하고, 여기서 삼성전자 내부를 감시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조정위는 공익법인이 환경·안전·보건 분야 전문가 3명을 독립적인 옴부즈맨으로 활동하도록 위촉하고, 삼성전자 내부 재해관리 시스템 운영 상황 등을 감시하도록 권고했다. 삼성전자 내부에는 50여 명의 보건관리팀을 둬서 모든 화학제품을 무작위 샘플링 조사할 것을 제안했다. ‘영업비밀’을 이유로 안전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시도다.

셋째, 조정위는 삼성전자 대표이사가 사과 기자회견을 열고 피해 보상 대상자에게 개별 사과문을 보내라고 권했다. 특히 조정당사자 3주체가 함께 ‘노동건강인권 선언’을 발표하라고도 요구했다. “노동하는 사람이 일하는 현장에서 건강한 삶을 지켜나가는 것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헌법상의 기본권이자, 노사 모두 지켜야 할 가치임을 재확인하라”는 취지다.

지난해 삼성전자 블로그 글에 이미 답이

삼성전자는 과연 이같은 조정권고안을 받아들일까? 조정당사자 3주체는 8월3일까지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조정위는 조정권고안에 대한 수정 제안이 들어오고, 그 내용이 절충할 여지가 있다고 판단하면 다시 후속 조정 절차를 밟아나갈 계획이다. 만약 조정권고안을 둘러싼 3주체 간 입장 차이가 너무 크면, 조정 자체가 무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반올림과 가대위는 큰 줄기에선 조정권고안에 동의하는 분위기다. 물론 세부적인 불만이 없진 않다. 반올림은 지난 7월24일 공식 입장 자료를 내어 “기부라는 형식으로는 삼성전자의 책임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못하고, 재발 방지 대책도 삼성전자가 완강히 거부해왔던 외부 감사 대신 이미 받고 있던 내·외부 감사 정도 수준의 옴부즈맨 제도를 권고했다”며 조정권고안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보상에서도 일부 피해자들이 배제될 우려를 제기했다. 예를 들어 접수된 피해 사례 중 유일한 피부T세포 림프종 환자인 협력업체 직원 ㄱ씨는 2011년 11월 입사라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보상 대상에서 제외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반올림은 “조정에 참여하기까지 많은 고민을 거쳤고 어렵게 참여를 결정했다. 삼성전자도 조정을 적극 추진한 장본인으로서 조정권고안을 큰 틀에서 수용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삼성전자는 진퇴양난이다. 지난해 반올림과의 교섭이 난항에 부딪히자, 반올림에서 떨어져나온 유족 6명으로 꾸려진 가대위가 삼성에 ‘조정위원회를 꾸리자’고 제안했고 삼성은 제안을 바로 수락했다. 이어서 지난해 10월21일에는 삼성전자 공식 블로그인 ‘삼성투모로우’에 “반올림은 마치 삼성이 나서서 조정위를 주도하는 것처럼 거짓 주장을 하면서 조정위 출범을 막으려 하고 있다”는 비판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 해결의 핵심은 아픔을 하루라도 빨리 덜어주는 것이라고 믿는다”며 김지형 전 대법관을 포함한 조정위원 3인 구성안을 받아들인다는 글도 남겼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불리한 안이 나왔다는 이유로 조정권고안을 마냥 거부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대화 상대방 간 이견이 있는 경우 제3자의 적절한 조언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사회에서 폭넓게 적용되는 문제 해결의 방식이다.” 지난해 삼성전자가 반올림을 비판하며 공식 블로그에 남긴 글에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이제는 삼성이 결정할 차례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