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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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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싸움엔 정년은 없다

2009년 쌍용차 정리해고 사태 뒤 정년을 맞는 첫 조합원 김승태씨…
대법 판결로 인해 ‘명예로운 은퇴’ 기대는 무너졌지만 해고노동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다시 투쟁의 길에 서다
등록 2014-12-10 16:24 수정 2020-05-03 04:27

눈 쌓인 밤에도 자줏빛 지프차는 금세 눈에 띄었다. 흠집 하나 없이 반질거리는 외관이 구형 지프차에 대한 주인의 애정을 드러낸다. “20년째 타고 있어요.” 지난 12월3일 저녁 대전역 주차장에서 김승태(59)씨가 1995년형 쌍용 ‘무쏘’에 쌓인 눈을 걷어내며 말했다.
전성기를 떠올릴 때라면, 환갑을 눈앞에 둔 중년 남자의 남루한 일상도 잠시 반짝이게 마련이다. 쌍용자동차의 첫 스포츠실용차(SUV)였던 무쏘는 1993년 출시된 뒤 국제모터쇼와 랠리 등 세계 무대에서 주목을 받았다. 김씨의 인생도, 그가 몸담았던 쌍용차도 분명 그즈음이 전성기였을 것이다. “국제모터쇼에 가면 현대차는 구석에 조그맣게 부스를 차렸는데 우리는 스포츠카 기종을 중심으로 부스를 크게 차렸어요. 영국 같은 나라에 직접 기술 지도도 갔어요. 우리가 기술을 배운 게 아니라 가르쳤다니까요. 믿어지세요?” 이후 10여 년, 쌍용 무쏘는 단종됐고 김씨의 전성기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쌍용’이라는 이름은 가족을 뺀 삶의 전부

김씨는 1979년 군을 제대한 뒤 동아자동차에 입사했다. 서울 구로공단에 동아차만큼 보너스를 주는 회사가 없었으니 고향의 친척들에게 자랑할 만했다. 1986년엔 쌍용그룹이 동아차를 인수했다. 이후 그에게 ‘쌍용’이라는 이름은 가족을 뺀 삶의 전부였다. 어쩌면 가족 이상이었다. 남들보다 일찍 출근해 늦게 퇴근했고, 회사의 부침을 따라 서울에서 경기도 평택으로, 다시 충남 천안과 대전으로 삶터를 옮겨다녔다. “남들은 작업복 입고 출퇴근을 안 하잖아요. 저는 회사 로고가 새겨진 작업복을 입고 출퇴근도 하고 외출도 하고 그랬어요. 떳떳하고 자랑스러우니까.”

2009년 발생한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사태가 6년을 넘기는 사이 해고노동자들의 생은 기약 없이 저물어가고 있다. 정리해고자 가운데 정년을 맞은 첫 조합원 김승태씨(왼쪽). 지난 11월11일 정리해고 2천 일을 맞아 서울 서초동 대법원 정문 앞에서 법원의 전향적인 판결을 촉구하며 2천배를 올리고 있는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조합원들의 뒷모습. 엄지원 기자, 박승화 기자

2009년 발생한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사태가 6년을 넘기는 사이 해고노동자들의 생은 기약 없이 저물어가고 있다. 정리해고자 가운데 정년을 맞은 첫 조합원 김승태씨(왼쪽). 지난 11월11일 정리해고 2천 일을 맞아 서울 서초동 대법원 정문 앞에서 법원의 전향적인 판결을 촉구하며 2천배를 올리고 있는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조합원들의 뒷모습. 엄지원 기자, 박승화 기자

아무 탈이 없었다면 올해 말 김승태씨는 명예로운 정년을 맞았을 것이다. 동료·후배들의 축하 속에 행복하게 은퇴했을 것이다. 회사가 2646명에 대한 구조조정안을 발표한 2009년 4월8일, 김씨는 30년을 바친 직장에서 ‘정리해고’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 사실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다 ‘기업 사냥꾼’(상하이차)에 ‘먹튀’ 당하고 사원들에게 그 벌을 나눠지게 하는 사 쪽에 화가 치밀었다. 그는 희망퇴직을 선택할 수 없었다. “잘못한 것도, 회사에 해를 끼친 것도 없는데 사직서를 내고 나면 내가 죄인처럼 되는 거잖아요. 난 떳떳하니까 퇴직 안 하겠다 마음먹었죠.” 그해 5월22일, 김씨는 동료들과 함께 77일간의 옥쇄파업에 들어갔다.

600여 명의 파업 참가자 가운데 그의 나이가 가장 많았다. 그를 보고 젊은 후배들이 따라나서기도 했다. “형님도 가는데 우리도 가야지, 하며 (파업을) 따라온 친구들이 있어요. 이렇게 싸움이 길어질 줄 몰랐어요. 그런 후배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고 미안하죠.” 사 쪽이 회유해도 발을 빼지 못한 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파업 중인 공장에서) 나오면 당신은 살려주겠다”고 몇 번이고 연락이 왔다. 해고자 명단에서 빼주겠다는 뜻이었다.

대학생 자녀들을 생각하면 사 쪽의 유혹에 마음이 당기기도 했다. 친·인척을 비롯한 지인들은 ‘나이도 있는 사람이 왜 그 속에서 고생하느냐’고 만류했다. 그래도 부끄럽지 않은 선배가 되고 싶었다. “공장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다 저보다 어리잖아요. 많게는 열 몇 살씩 어린 후배도 있었고요. 거기서 연장자인 내가 중간에 쏙 빠지면 사기가 죽어서 많이들 힘들어할 것 같았어요.”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삶

자존을 구하기 위해 김승태씨는 잃은 것이 많다. 경제적 어려움이 가장 컸다. 희망퇴직을 선택했다면 위로금이라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물질적 어려움은 가족관계마저 어려움에 빠트렸다. 옥쇄파업 와중에 형이 뇌경색으로 쓰러지고 이듬해엔 아내가 쓰러졌다. 아내는 자꾸 지갑이나 카드를 잃어버렸다. 병원에 가니 뇌종양이라고 했다. “제가 그러고 있는 동안 아내가 신경을 많이 썼으니 그랬겠지요. 가장의 수입은 완전히 끊겨버리고요.” 수술을 받았지만 완치되지 않았다. 아내는 여전히 한 달의 절반 이상을 병원에 가야 한다.

회사도, 가정도 엉망이 되고 나니 혼란스러웠다. 잊을 만하면 들려오는 동료들의 부음에 극단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친구들 생각이나 생활이 눈에 세세하게 보이니까 오죽하면 그런 선택을 했을까 헤아릴 수 있었어요. 미리 알았다면 만류라도 했을 텐데요.”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파업의 구호는 김승태씨를 비롯한 해고노동자들에게 은유가 아니었다.

슬픔에 젖어 있을 수는 없었다. 당장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얼마 되지 않는 퇴직금은 생활비로, 병원비로, 노모의 부양비로 금세 동이 났다. 50대 후반이 된 제조업 노동자가 일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30년 직장에서 밀려난 뒤, 김승태씨의 삶은 계속 변두리로 밀려나고만 있다.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삶이다. 지난 10월엔 비정규직으로 3년 동안 일했던 공장에서도 ‘구조조정’을 이유로 갑작스런 계약 해지를 통보받았다. 그 뒤 급하게 일자리를 구한 공장에서 그는 하루 12시간 근무하는 ‘수습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선택의 폭이 좁으니 남보다는 근무시간이 길고 일도 많이 해야 하지요.”

여전히 그는 쌍용차 관련 뉴스를 꼭 챙겨본다. “신형 코란도 이후에 신차가 안 보인다”고 말하는 그에게 쌍용차는 투쟁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늘 걱정스러운 ‘내 식구, 내 집’이다. 지난 11월13일 대법원은 2009년 단행한 쌍용차의 정리해고는 부당하다는 2심 판결을 깨고, ‘정리해고는 필수불가결한 결정이었다’는 취지로 사건을 원심으로 돌려보냈다. 대전에서 생업을 이어가는 김승태씨는 서울 대법원에 동료들과 함께 가지 못했다. 언론을 통해 소식을 들었다. “쉽지 않은 판결이 나겠구나 예상하긴 했지만 가슴이 쿵 내려앉았어요.” 지난 6년, 거리에서 보낸 ‘해고노동자’의 오명을 지우고 명예로운 은퇴를 할 수 있을 거란 기대는 무너졌다.

우리가 계속 싸워올 수 있는 버팀목

올해 말이면 정년을 넘기지만, 김승태씨의 싸움은 끝난 것이 아니다. 정년을 넘긴 해고노동자는 해고무효 소송에서 승소하더라도 복직 즉시 퇴임하게 된다. 김씨는 “하루를 출근하더라도 이건 명예의 문제”라고 말했다. “이대로 끝낸다면 제 삶은 해고자와 패배자의 것으로 남겠지요.”

회사 대신 후배들이 나섰다. 지난 12월6일 서울 양천구 신정동성당에서 금속노조 쌍용차지부는 정년을 맞이한 해고 조합원을 위해 은퇴식을 열었다. ‘쌍용차 해고자의 특별한 은퇴식 좋은 이별’이라고 이름 붙인 행사에는 김승태씨 말고도, 해고 대상자가 아닌데 옥쇄파업에 참여해 징계해고됐던 박아무개(59)씨 등 두 명의 조합원이 초대됐다. 2009년 정리해고 사태 뒤 정년을 맞는 첫 조합원들이다.

은퇴식을 총괄 기획한 쌍용차 해고노동자 김성진(43)씨는 행사 취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해고자가 오래 투쟁하는 동안 가족들은 굉장히 답답해할 수밖에 없거든요. 선배들 본인에게도 그렇지만 특히 그 가족들에게 선배들이 우리가 계속 싸워올 수 있는 버팀목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대전=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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