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고한 세계에 작은 두리반(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밥먹는 둥근 상) 하나가 다시 놓였다. 강제철거를 이겨낸 두리반(홍익대 앞 음식점)의 주인이 지난 11월18일 오전 서울시 은평구청 앞에 섰다. 녹번 1-2구역 재개발을 반대하는 원주민비상대책위원회와 시민사회단체들이 함께했다. 531일 농성으로 재개발 철거와 맞섰던 그가 다시 재개발 반대 보도자료를 쓰며 두리반을 깔았다. 두리반 싸움이 타결(2011년 6월)된 지 3년여 만이다. 그가 10년 다닌 교회가 재개발 구역 안에 있다.
다시 쓰는 재개발 반대 보도자료
유채림(소설가)씨는 2004년 인천에서 녹번동으로 이사 왔다. 출석할 교회를 찾다 도로 건너 삼일교회(한국기독교장로회)에 나갔다. 교인 수가 40여 명인 작은 교회였다. 1977년 10월 국민주택(박정희 정권이 1973년 도입한 전용면적 85m² 이하 주택)을 매입해 예배 처소로 삼았다. 유채림씨가 교회를 처음 찾았을 때 낡은 지붕에선 비가 새고 마룻바닥은 꺼져 있었다. 5m 높이의 대로변 축대 담장이 기울었고, 얼마 뒤엔 지붕이 내려앉았다. 교회는 2005년 10월 은평구청에 신축 허가를 구했다. 구청 담당자는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될 수 있다’며 불허했다. 교회는 가설건축물로라도 허가해줄 것을 요청했다. 구청은 각서를 요구했다. 재개발이 이뤄질 경우 자진 철거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교회는 각서(“재개발 사업 시행시에 건물 보상을 요구하지 않으며 건축주 부담으로 철거해 적극 협조”)를 쓰고 2007년 1월8일 허가를 얻었다. 같은 해 8월16일 녹번 1-2구역은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됐다. 두 달 뒤 재개발 추진위원회가 승인받았다.
소설가 유채림씨가 서울 은평구 녹번동 삼일교회 안에 섰다. 강제철거로부터 홍익대 앞 식당 ‘두리반’을 지켜낸 그는 재개발 파고에 휩쓸린 삼일교회를 지키려 다시 싸움에 나섰다. 류우종 기자
지난 10월30일 교회는 재개발조합으로부터 ‘불법건축물 건축에 따른 원상회복 통보의 건’이란 내용증명 문서를 받았다. 조합은 건축 허가 당시 교회가 쓴 각서 사본을 첨부해 건물 보상권이 없다고 주장했다. 구청이 조합에 각서를 넘겼다는 사실에 교회는 경악했다.
녹번 1-2구역 재개발사업이 시작되던 2007년은 홍대 두리반으로 명도 소송장(지구단위계획 지역이라며 이주 통보)이 날아든 시점이었다. 그의 삶과 영혼의 터전이 동시에 흔들리고 있었다. 유채림씨는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의 미래가 우리의 뜻이 아닌 칼 쥔 자의 뜻대로 결정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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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번 1-2구역은 오래된 빌라촌이다. 고급 빌라 한 채 없이 낡은 주택들이 언덕 위로 밀집해 있다. 809가구가 이웃하며 살았다. 재개발지구 지정 이후 빈집이 늘어나면서 현재 320여 가구가 남아 있다. ‘헌 집 주고 새집 받을 꿈’에 부풀었던 주민들이 치솟는 분담금을 감당할 수 없어 현금청산자(161가구)로 돌아서는 사례가 늘고 있다. 실거래가의 50%에 못 미치는 감정가를 받은 주민들은 망연하다. 전용면적 18평 빌라를 가진 A씨는 감정가로 7천만원을 받았다. 같은 빌라의 동일 평형을 두고 법원은 1억6300만원의 경매가를 매겼다. B씨 집의 감정가는 9100만원이었다. 같은 조건의 빌라가 2010년 2억2천만원에 팔렸다고 했다. B씨는 “날마다 절망한다”며 말했다. “융자 끼고 어렵게 구입한 집에서 20년을 살았다. 마이너스 통장을 쓰며 빚 갚고 아이들을 키웠다. 감정가대로 집을 넘기면 서울 시내에서 전세도 못 얻는다. ‘왜 우리 집을 놔두고 월세로 살아야 하냐’며 아이들이 운다.”
턱없는 분담금에 깨진 ‘새집 받을 꿈’
재개발 취소(조합원 50% 이상 동의)도 불가능해졌다. 외지 투자자들이 이미 집주인의 68%를 차지하고 있다. 경기, 대구, 광주, 대전 등 전국에서 집을 매입한 것으로 원주민들은 파악하고 있다. 유채림씨는 말했다.
“두리반과 녹번 1-2구역 재개발은 모양새가 흡사하다. 영세한 상인과 주민들을 내모는 자본의 폭력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용역을 고용한 점도 같다. 두리반에 들이닥친 용역들은 집기를 부수고 철판으로 출입을 막았다. 녹번에서도 재개발 반대 주민들은 조합이 고용한 용역들 때문에 공포에 떨고 있다.” 주민 C씨도 “밤늦게 지하철역에 내린 아이들이 ‘용역이 무서워 집에 못 간다’며 울면서 전화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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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은 2013년 7월 총회 안건에 ‘범죄예방용역비’로 5억원을 책정했다. 범죄예방용역비는 2012년 8월부터 재개발조합 총회 자료에서 확인되는 허위사업비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범죄예방용역은 도시및주거환경정비법(도정법)을 근거로 한다. 2010년 부산의 재개발구역에서 한 남성이 예비 여중생을 성폭행하고 주검을 유기했다. ‘김길태 사건’이다. 그 충격으로 2012년 2월1일 도정법엔 ‘범죄예방’을 열쇳말로 하는 2개 조항이 신설(8월부터 시행)된다.
도정법 제30조(사업시행계획서의 작성) 4의 2는 사업자의 의무를 규정한다. 사업시행계획서 작성 때 정비구역 내 가로등과 폐회로텔레비전(CCTV) 설치 등 범죄예방 대책을 포함시켜야 한다는 내용이다. 도정법 제28조의 2(정비구역의 범죄예방)는 시장·군수와 경찰의 의무를 제시한다. 시장·군수는 정비구역 내 주민의 안전 등을 위해 지방경찰청장이나 경찰서장에게 3가지를 요청할 수 있다. ①순찰 강화 ②순찰초소 설치 등 범죄예방을 위하여 필요한 시설의 설치 및 관리 ③그 밖에 주민의 안전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사항.
도정법은 범죄예방에서 공공 영역과 민간 영역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조합이 고용한 민간용역은 주민의 안전이 우려될 경우 범죄예방 ‘시설을 설치’할 수 있다. 재개발구역 순찰이나 범죄예방 ‘활동’은 경찰의 역할이다. 법 개정 당시 전여옥 전 새누리당 의원이 사설경비원 채용까지 가능케 하는 법안을 발의했으나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제외됐다. 한 재개발 법률전문가는 말했다. “대한민국이 언제 국가의 독점적 치안 기능을 민간에 위탁했나. 재개발구역에 용역이 들어온 것은 범죄예방이 아니라 그 자체가 범죄다. 경찰의 역할을 대신 맡기겠다며 책정한 5억원은 조합원의 부담만 늘리는 거짓 사업비다.”
조합은 총 9억6800만원에 3개 업체와 전기·상수도·도시가스의 철거·이설 계약을 맺었다. 품목별로 철거비가 산정되려면 건물·시설을 부수지 않고 개별 업체들이 전기선·수도관·가스관만 따로 뽑아내 이설할 수 있어야 한다.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철거는 보통 구역 전반의 철거를 맡은 한 업체가 건물과 기반시설 전체를 부순 뒤 전기선·수도관·가스관 등을 한꺼번에 고철로 처분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철거업계의 ‘큰손’ 다원이 확산시킨 ‘철거 쪼개기’와 부당이익 창출의 전형(제975호 줌인 ‘철거왕 구속돼도 다원은 안녕하시다’ 참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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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반복되는 ‘철거 쪼개기’
녹번 1-2구역 재개발 조합장은 과의 통화에서 “감정가 산정에 (조합이) 개입한 건 없다. 더 많이 받고 싶어 하는 사람마다 입장 차가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법죄예방 용역을 두고는 “경찰이 범죄예방을 해주나. (경찰은 안 해주고) 법은 하라니까 용역을 쓰는 것”이라고 답했다. 전기·상수도·도시가스의 철거·이설 계약에 대해서도 “다 따로 하라고 해서 한 것이다. 업체들을 다 따로 뽑도록 돼 있다”고 말했다.
유채림씨는 “두리반 농성이 내게 상처로 남아 있다”고 했다. “두리반 싸움을 했기 때문에 재개발·철거의 희생자가 생기면 마음이 쓰여 가만히 있질 못하겠다”고도 했다. “겪어본 사람이 힘을 보태야지 누가 하겠나.”
그가 둘러앉는 곳마다 두리반이 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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