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5일, 경기도 내 학교 중 처음으로 ‘9시 등교’를 시행한 의정부여중의 바뀐 시간표다. 얼핏 등교 시간이 늦어져 그만큼 늦게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은 다른 학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일찍 등교를 시키는 중학교도 대개 아침 9시나 9시10분에 1교시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성인보다 더 짧은 청소년 수면 시간중학교 근무 경험이 있는 경기도 지역 공립고 김찬호(43·가명) 교사는 “도내 초·중학교에선 1교시 시작 전까지 30~40분 동안 자율학습을 시키거나 책을 읽게 한다. 이런 학습이 그다지 효과적이진 않다”고 말했다. 의정부여중도 4년 전까진 학생들을 아침 8시30분까지 학교에 오게 한 뒤, 30분간 책을 읽게 했다. 혁신학교로 지정된 뒤, 이런 시간을 없앴다. 등교 시간 10분 뒤 곧바로 1교시를 시작한 것이다. 이충익 의정부여중 교장은 “10여 년 전에는 경기도 지역 초·중학교 등교 시간이 9시였다. 그런데 서울 쪽에서 등교 시간을 앞당기자 경기도가 따라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의정부여중에서는 기존 등교 시간에 맞춰 학교에 오는 학생들을 위한 독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전교생 가운데 15명이 조기 등교를 신청했다. 9시 등교제를 시행한 지 나흘이 지난 8월29일까지 학교에 오는 학생은 줄어드는 추세다. 이 학교는 등교 시간을 늦추기 전, 교사·학생·학부모 의견을 수렴해 학교운영위원회 심의를 거쳤다. 9월1일부터 경기도교육청은 도내 초·중·고교의 등교 시간을 9시로 늦춘다는 방침이다. 8월27일 경기도교육청 조사 결과, 도내 2250개 초·중·고교 가운데 83.9%인 1807개교가 9시 등교제를 시행할 예정이다. 이에 대해
보수 성향 학부모 단체인 공교육살리기학부모연합은 8월28일 경기도교육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학교 실정에 따라 등교 시간을 정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하라”며 반발했다.
대한민국 청소년들은 ‘가뜩이나 피곤한’ 성인들에 비해서도 수면 시간이 짧다. 미국수면재단이 제시한 청소년기 적정 수면 시간은 하루 8시간30분~9시간15분이다. 지난 8월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가 서울 지역 중·고교생 2919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해 발표한 자료를 보면, 평일 하루 평균 5시간48분만 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갤럽이 지난해 19살 이상 남녀 1만2959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 성인들의 평균 수면 시간은 6시간53분이었다.
강승걸 가천대 의대 교수팀은 최근 1년간 인천 지역 중·고등학생 4145명을 대상으로 수면 시간과 정신 건강의 연관성을 연구했다. 그 결과, 하루 평균 7시간 미만으로 자는 청소년은 이보다 많이 자는 경우보다 우울함이 더 강하거나 자살 위험이 높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소년들이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건 인권적 차원에서 마땅히 추진돼야 한다. 그러나 9시 등교제가 실효성을 확보하려면 단순히 ‘8시 등교냐, 9시 등교냐’라는 논쟁 틀을 넘어선 다차원적 검토가 필요하다.
0교시 없앤 자리에 들어선 1교시경기도에 사는 초등학생 학부모 신아무개(44)씨는 9시 등교제에 대해 “도대체 왜 이런 정책이 나왔는지 모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지난 교육감 선거에서 진보 성향 후보를 뽑았다. “우리 동네 초등학교 등교 시간은 8시40분이에요. 직장이 멀어 일찍 집을 나서는 엄마들은 빈 운동장에 아이를 방치해놓고 가는 경우가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등교 시간을 9시로 늦춰버리면, 아이가 위험한 상황에 노출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직장 다니는 엄마들은 30~40분 때문에 도우미를 써야 하느냐며 불만을 성토해요.” 배경내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는 이런 ‘불안’에 대해 교육청이 성실히 답할 것을 주문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의 경우엔 학교가 교육뿐 아니라 보육의 기능까지 겸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배경내 활동가는 “아이들이 서로 손잡고 등교하는 시대가 아닌 상황에서 ‘안전한 등굣길’에 대한 부모들의 걱정은 클 수밖에 없다”며 “지역 공동체와 교육청 등이 이런 고민을 덜어주는 제도와 대안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장 대학 입시를 걱정해야 하는 고등학생들의 경우엔 사정이 더욱 복잡하다. 초·중학교와는 달리 아침 8시10분 혹은 8시30분에 1교시가 시작된다. 등교 시간을 늦추면, 자연히 종례 시간도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 학생들 중에는 이런 이유로 9시 등교를 반기지 않는 경우가 있다. 저녁 시간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청소년들은 하교 시간이 늦어지면 경제적 타격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런데 왜 고등학교 1교시는 9시 이전에 시작하게 된 것일까.
다수의 교사들은 2000년대 이후 아침밥을 먹이자며 폐지된 ‘0교시’의 여파라고 분석한다. 아침 일찍 학교에 오게 한 뒤 1교시 전에 보충수업·자습을 시키는 ‘0교시’가 없어진 시간대에 1교시를 밀어넣었다. 아침이 아닌 방과후에 보충수업을 붙이는 조삼모사식 꼼수를 발휘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한 학교가 등교 시간을 앞당기면, 지역사회에선 ‘경쟁’이 붙게 마련이다. 결국 입시 위주의 교육, 수업일수나 수업시수를 줄이지 않고서는 등교 시간을 늦춘다고 해도 ‘제대로 쉴 수 없는 상황’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주 5일 수업제가 실시된 뒤, 수업시수는 조정되지 않아 학생들의 여가 시간은 되레 줄어들었음을 눈여겨봐야 한다. 2011년 한국청소년정책분석평가센터는 주 5일 수업제 부분 도입(2005년) 전후 청소년의 여가 시간을 분석했다. 청소년의 하루 평균 여가 시간은 2004년 4시간33분에서 2009년 4시간8분으로 짧아졌다.
본질적으로 교육을 바꿔야 해경기도 일산에 사는 김민숙(43·가명)씨는 본질적으로 학교 교육의 철학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그는 중학교 1학년 아들을 키우고 있다. “8시20분까지 등교하는데, 그렇게 일찍 학교에 가서 무엇을 하나 싶다. 주변을 둘러보면 좋은 대학을 졸업한다고 (인생이) 잘 풀리는 것도 아니고, 잘 풀려봐야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인데 40대 되면 회사에서 나와야 되지 않나. 더구나 아이가 학교에서 자신도 모르게 경쟁심을 품게 되는 것 같아 걱정된다. 공부량도 너무 많다. 학습량이 줄어들면 공부에 흥미가 없던 아이들도 챙길 수 있지 않겠나.” 특히 수업시수 축소는 정책적 결단이 필요한 복잡한 문제다. 유성상 서울대 교수(교육학)는 “7차 교육과정 개정에서 문과 수학에 미적분이 없어졌다가 2009년 개정 때 다시 포함됐다. 학생 복지와는 상관없이 미적분 전공자 및 사교육 시장의 이해관계와 ‘대학에서 미적분을 가르쳐야 하느냐’는 반발 등이 결합돼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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