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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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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고 먹고 일하는 새로운 호찌민들

빈민층 교육 뒤 질 좋은 일자리 제공, 공정여행과 소액대출 연계,

어린이 작품 상품화 등 선순환 구조 일군 베트남 사회적 기업들
등록 2014-06-21 12:51 수정 2020-05-03 04:27
거리를 떠도는 취약계층 청소년들에게 요리와 영어 등을 가르쳐 취업시키는 베트남 사회적 기업 ‘코토’(KOTO)의 수강생이 하노이의 코토 레스토랑에서 칵테일을 만들고 있다. 엄지원

거리를 떠도는 취약계층 청소년들에게 요리와 영어 등을 가르쳐 취업시키는 베트남 사회적 기업 ‘코토’(KOTO)의 수강생이 하노이의 코토 레스토랑에서 칵테일을 만들고 있다. 엄지원

“이리로 오세요.” “오토바이는 거기 세워둬요.” 깡마른 아이들 서넛이 겁없이 오토바이 앞으로 뛰어든다. 관광객이 굽는 고기 연기와 10대 소년의 손에 들린 담배 연기가 베트남 하노이의 뒷골목에서 뒤섞인다. 호객하는 아이들 중엔 어른 허리만큼 자라지 못한 꼬마도 있다. 8살이나 되었을까. 뛰어놀 만한 놀이터도, 제때 끼니를 챙겨주는 부모도 없을 소년에게 밤거리의 호객은 최초의 직업인 동시에 그나마의 여흥인 듯 보였다.

가난은 누구에게나 무거운 짐이다. 그 짐을 지고 갈 힘도, 떨쳐낼 힘도 없는 아이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1986년의 ‘도이머이’(‘쇄신’을 뜻하는 말로, 베트남 공산당 제6차 대회에서 제기된 경제개혁 슬로건) 이후 도약하는 국가경제임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은 아직 아시아에서 가난한 나라 중 하나다. 2010년 기준 베트남 정부의 자료를 보면, 400만 명 넘는 아이들이 빈곤·장애·질병과 싸우고 있다. 그중 2만8천여 명이 위험한 환경에서 일하고, 2만1천여 명은 거리를 떠돈다. 아이들은 더디게 늘어나는 국부의 마지막 수혜자가 될 것이다.

한때 덩(22)도 거리의 아이였다. 가족도, 집도 없었다. “전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랐어요. 당연히 내가 뭐가 될지도 알 수 없었죠.” 지난 5월31일 아침 하노이의 코토(KOTO) 레스토랑에서 만난 덩이 느리지만 잘 정돈된 영어로 말했다.

두 번째 가족이 따뜻하게 감싸는 그곳

2년 전 우연히 인터넷에서 코토를 알게 된 것은 그에겐 큰 행운이었다. 코토는 단순한 레스토랑이 아니다. 가난한 청소년들에게 요리와 서비스를 가르쳐 고급 레스토랑과 호텔에 취업하도록 돕는 교육기관이다. “처음엔 걱정했어요. 교육비가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싶었어요.”

교육은 무료였다. 새 형제·자매, 그들과 함께 지내는 새집까지 생겼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마치 두 번째 가족 같은 공기가 감돌고 있었어요. 모두가 제게 웃어주었지요.” 덩의 꿈은 바텐더다. 2년의 교육과정을 모두 마치고 나면 그에겐 코토의 협력기관인 오스트레일리아 박스힐 인스티튜트의 졸업 증명서가 주어진다. “이젠 제가 원하는 건 뭐든 될 수 있어요.”

그런 청년을 자랑스럽게 바라보는 이가 있다. 코토의 설립자이자 대표인 지미팜(42)이다. 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를 둔 팜은 어린 시절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해 살아왔다. 20대에 찾은 모국에서 마주친 빈곤의 풍경은 그를 충격에 빠트렸다.

1999년 그는 자비를 들여 하노이에 작은 샌드위치 가게를 열었다. 지금은 하노이와 호찌민에 식당 2곳과 교육센터 1곳을 둔 코토의 전신이다. 그곳에서 팜은 거리의 아이들 9명을 설득해 요리와 영어를 가르쳤다. 사람들의 눈길은 곱지 않았다. “돈을 벌기 위해 아이들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구미권에서는 이미 1970~80년대에 ‘사회적 기업’이라는 개념이 통용되기 시작했지만 아시아 대부분의 나라에선 생소하게 여겨지던 때였기 때문이다. 설립자인 팜도 ‘사회적 기업’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 “저는 단순한 직업학교를 만드는 게 아니라 가난한 아이들이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돕고 싶었고 그들에게 가족을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팜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코토는 세계적인 ‘사회적 기업’ 성공 모델로 자리잡았다. ‘가난한 아이들은 무지하고 게으르다’는 편견을 뚫고 2002년 배출된 첫 졸업생들은 베트남 내 특급 호텔·레스토랑에 취직했다. 주베트남 외국대사관에 취직한 학생도 있다. 지난 15년 동안 700여 명이 코토를 졸업했고, 100% 취업에 성공했다. 팜은 2년 안에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에도 ‘코토 서울’을 설립할 계획이다.

노 원, 티치 원(Know one, Teach one)

무엇보다 바람직한 것은 코토가 일궈낸 선순환 구조다. 1기 졸업생 중 한 명은 코토처럼 사회적 기업 방식으로 운영하는 레스토랑을 하노이에 열어 성황리에 운영하고 있다. 아이들은 연어처럼 가족을 찾아 돌아온다. 학생들 중 20% 정도가 졸업한 뒤 쌓은 경험을 코토의 후배들과 공유하고 있다. 업체 이름이자 캐치프레이즈인 ‘노 원, 티치 원’(Know one, Teach one·한 가지를 알면 다른 이에게 가르쳐라)의 정신이 전승되는 것이다.

민간부문이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두지 않았던 베트남의 계획경제에서 시민사회는 몇 년 전까지도 별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기업가 정신 또한 싹틀 여지가 없었다. 개혁·개방 이후인 1999년에야 비로소 베트남 정부는 비정부기구(NGO)를 인정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사회적 기업은 여전히 별도의 법적 지위를 갖지 못하고 있다. 재정 지원은 당연히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베트남의 사회적 기업가들은 정부의 적은 지원에도 불구하고 민간 영역에서 사회 혁신을 통해 빈곤과 환경 등 사회문제를 해결하려 고군분투하고 있다. 왼쪽부터 BM의 로안응우옌 대표, KOTO의 지미팜 대표, CSIP의 팜끼에우오안 대표, TOHE의 팜티응안 대표. 엄지원

베트남의 사회적 기업가들은 정부의 적은 지원에도 불구하고 민간 영역에서 사회 혁신을 통해 빈곤과 환경 등 사회문제를 해결하려 고군분투하고 있다. 왼쪽부터 BM의 로안응우옌 대표, KOTO의 지미팜 대표, CSIP의 팜끼에우오안 대표, TOHE의 팜티응안 대표. 엄지원

그럼에도 사회 혁신으로 불평등 문제 등을 해결하려는 사회적 기업가들은 코토 이후 꾸준히 늘고 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부동산 투자회사에서 일하다 사회적 기업을 위해 일하는 로안응우옌도 그중 한 명이다. 올해 25살인 응우옌은 공정여행과 ‘마이크로크레디트’(소액대출)를 통해 지역사회를 돕는 ‘블룸 마이크로벤처스’(BM·Bloom Microventures)의 대표다. ‘삶을 바꾸는 여행’을 모토로 한 BM은 외국인 여행자들에게 하노이에서 70km 떨어진 호아빈 지역 사회를 체험하는 상품을 제공하고 그 수익을 해당 지역의 농가에 소액대출을 해주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최근에는 농가의 홈스테이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응우옌은 대표가 된 뒤 24시간 업체가 돌아가는 일에만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게 가장 힘들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녀가 돈을 벌기 어려운 이 일에 자신의 삶을 거는 이유는 하나다. “사회적 기업이라는 말은 뒤늦게 알았지만 저는 경제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기업 경영과 공익을 매칭하는 일에 늘 관심이 있었습니다. 저는 다른 이들을 도와주는 일이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돈을 모으는 일에는 큰 관심이 없어요.”

2008년부터 베트남의 사회적 기업을 육성하고 있는 민간 사회적 기업 지원센터(CSIP·Center for Social Initiatives Promotion)의 팜끼에우오안 대표는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사회적 기업 네트워크가 확대되고 있는데 특히 젊은 층의 관심이 폭발적이다. 여러 대학들 안에서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사회적 기업에 대한 기획안을 만들어 우리에게 지원서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CSIP는 지난 5년 동안 52개의 사회적 기업을 육성했고 이를 통해 20만여 명의 취약계층이 혜택을 입었다. CSIP가 지원한 베트남의 사회적 기업은 나라 안팎의 각종 시상식에서 40여 개의 상을 휩쓸었다.

‘3꿍 정신’을 안고 사는 베트남 젊은이들

역사가 짧고 정부 지원도 거의 없지만 베트남의 사회적 기업이 선전하는 데는, 베트남의 상호부조 전통이 일조한다는 견해도 있다. 하노이에서 만난 한 사회적 기업가는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유교정신과 호찌민의 호혜주의가 흐르고 있다. 더불어 사는 것에 대한 고민이 많은데, 이런 정신과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결합되면 앞으로 사회 혁신의 가능성이 무한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베트남 사람들에게 여전히 ‘민족의 스승’으로 추앙받는 호찌민 주석은 평생 ‘3꿍 정신’을 강조했다. ‘함께 산다(꿍아)·함께 먹는다(꿍안)·함께 일한다(꿍땀)’는 뜻이다. 미국의 역사학자 윌리엄 듀이커는 저서 에서 호찌민에 대해 “유교적인 정신으로 볼 때 서구의 산업주의는 탐욕과 꼴사나운 자기 확장의 욕망으로 비쳤다. 반면 공동의 노력과 소박한 생활, 부와 기회의 평등을 강조한 사회주의는 유교적 전통과 일치한다”고 평가했다. 활짝 열린 시장경제의 기회 속에서 왜 베트남의 유능한 젊은이들이 사회적 기업에 관심을 갖는지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취약계층 어린이에게 미술교육을 하고 그 작품으로 소품을 제작해 판매하는 사회적 기업 ‘또헤’(TOHE)의 설립자 팜티응안도 사회적 기업의 개념을 배운 뒤 이 일에 뛰어든 것이 아니었다. 돕고자 하는 마음과 아이디어가 먼저였다. 남편과 함께 중견 광고미디어 회사를 운영해온 응안이 또헤를 설립한 것은 2009년의 일이다.

한 시민단체와 협업으로 바닷가 지역 빈곤가정 어린이들에게 미술수업을 한 뒤 자꾸만 아이들과의 기억이 맴돌았다. 시민단체는 재정적 어려움을 겪자 프로젝트를 중단했다. 그런 방식으론 ‘지속 가능성’이 없음을 깨달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벼락같은 깨달음을 얻은 곳은 여행지였다. “나는 12살에 이미 라파엘로처럼 그렸지만 아이들처럼 그리는 데엔 평생이 걸렸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피카소의 메시지를 읽었다. 아이들의 그림과 닮은 피카소의 그림이 그려진 각종 소품도 보았다. 응안 부부는 그것들을 보고서야 입을 모았다. “아이들의 그림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영혼을 볼 수 있고, 아이들에게 도움도 줄 수 있어.”

또헤의 사업과 프로젝트는 다음과 같이 순환한다. 빈곤가정 또는 장애인 보호시설의 아이들에게 미술수업을 한 뒤 그림을 스캔하고 누가 언제 그린 작품인지 꼼꼼히 기록한다. 그림의 저작권에 대해선 아이들을 보호하고 있는 시설이나 학교, 부모와 계약서를 주고받는다. 수익을 돌려주기 위해서다. 업체의 이름인 ‘또헤’는 이 모든 의미를 아우른다. 베트남의 민속 장난감인 또헤는 쌀로 빚은 인형이다. “갖고 놀다 배가 고파지면 먹을 수도 있는 장난감이니, 아이들을 위한 교육과 수익사업을 동시에 벌이는 업체의 취지에 꼭 부합한다”고 응안은 설명했다.

배고프면 먹을 수 있는 쌀로 만든 인형처럼

스캔한 그림은 노트북 가방이나 작은 손지갑, 앞치마, 장갑 등에 인쇄해 하노이의 매장에서 판매하거나 외국에 수출한다. 그림을 인쇄하면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준다. 엄연한 ‘작가’로 대우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1천여 명의 아이들이 이 수업에 참여했다. 수익금 일부는 미술캠프를 열거나 기자재를 지원하는 데 쓰인다.

다만 아직까진 재정이 문제다. “베트남에선 어려움이 많아요. 정부 지원도, 우리를 재정적으로 보증해줄 인맥도 적죠.” 응안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지난번에 서울을 방문했을 때 한국 젊은이들이 또헤의 제품에 많은 관심을 보여 기뻤습니다. 아시아 안에서 사회적 기업들이 서로 많이 교류하며 시장을 넓혀가는 게 해법일 것 같습니다.”

하노이(베트남)=글·사진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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