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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굿판’ 악명을 걷어라

‘유서 대필 사건’ 강기훈씨 23년 만에 무죄 선고… 사건을 기회 삼아 노태우 정권은

‘거대한 반동’으로 이끌고, 쌍욕 견디며 사는 동안 유죄판결 책임자들은 승승장구한 죄 많은 세월
등록 2014-02-18 17:17 수정 2020-05-03 04:27
강기훈씨가 2월13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유서 대필 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박승화

강기훈씨가 2월13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유서 대필 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박승화

너무 늦게 온 정의도 정의인가.

‘유서 대필 사건’의 주인공 강기훈씨가 무죄 선고를 받았다. ‘무죄’라는 두 글자를 얻기까지 무려 23년(1991년 7월13일 자살방조죄로 구속 기소)이 걸렸다. 그 세월 동안 죽음의 항거는 ‘배후세력이 조종하는 죽음의 굿판’으로 공격받으며 오욕의 세월을 보내야 했고, 배후의 일원으로 몰린 그는 “하루하루의 삶 자체가 유서 사건의 테두리 안에서 한 발짝도 못 움직이는 신세”로 다만 견디며 살아야 했다.

옭았던 것도 풀어준 것도 필적감정

2월14일 서울고등법원(형사10부 권기훈 부장판사) 무죄 판단의 핵심 근거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의 필적감정 결과였다. 법원은 “1991년의 감정 결과를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국과수 필적감정은 분신자살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씨의 유서를 대신 써준 혐의로 강기훈씨에게 징역 3년형을 선고한 근거였다.

재판부는 유서의 ‘ㅆ’에서 나타나는 특징이 강씨의 글씨체와는 차이가 있다고 밝혔다. ‘보’자도 무죄의 증거로 봤다. “효도라는 것을 해보지 못했지요”라는 문장에서 당시 국과수는 ‘보’를 ‘오’로 해석해 강씨의 필적이라고 판단했다. 재심 재판부는 해당 글자를 ‘오’가 아닌 ‘보’로 봤고, 김씨의 다른 문건들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필체라고 밝혔다. 1991년 감정 대상엔 포함되지 않았던 김씨의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노트와 낙서장도 강씨의 혐의를 벗겨주는 데 한몫했다.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의뢰한 재감정에서 국과수는 이 자료들과 유서의 글씨체가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검찰은 오히려 김씨의 문건들이 조작됐다면서 국과수 재감정을 요구하며 재심을 지연시켜왔다. 진실화해위 재심 권고(2007년 11월) 이후 서울고등법원 재심 개시 결정(2009년 9월)→검찰 재항고→대법원 재심 개시 결정(2012년 10월)을 거쳐 무죄판결이 나기까지 7년이 더 걸렸다.

국과수의 필적감정은 23년 동안 모두 3차례 이뤄졌다. 23년 전 국과수 감정 결과는 강씨를 ‘자살방조죄’로 옭아맸다가, 23년 뒤엔 그를 올가미에서 풀어주는 토대가 됐다. 23년 전 국과수 감정 결과를 근거로 유죄를 선고한 법원은 23년 뒤엔 국과수 감정 결과를 근거로 무죄를 선고했다. 군과 정보기관 대신 검찰이 정권 유지의 전면에 나서 사태를 주도하며 ‘검찰공화국 탄생’의 계기로 삼은 것이 유서 대필 사건이다. 국가기관이 총동원돼 산 자와 죽은 자의 생과 사를 총체적으로 짓밟았다는 뜻이다. 그를 희생양 삼아 노태우 정권은 위기를 돌파하며 ‘거대한 반동’을 이끌었다.

무죄판결이 ‘강기훈의 고난’에 마침표를 찍는 것으로 끝나선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출소 뒤 그는 수모와 모멸의 세월을 살아왔다. “저런 새끼는 죽여야 한다며 길길이 날뛰던 노인과 버스 옆자리에서 알아보고 쌍욕을 하던 사람들”을 그가 견디며 사는 동안, 그를 기소하고 유죄판결을 내린 책임자들은 승승장구했다. 강씨는 1월16일 재심 결심공판에서 밝힌 최후진술에서 그의 기소와 판결에 관여했던 검사들(강신욱·신상규·송명석·안종택·남기춘·임철·곽상도·윤석만·박경순)과 판사들(노원욱·임대화·부구욱·박만호)의 이름을 하나하나 거명했다. 그중 적지 않은 인물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지근거리로 옮겨갔다.

벼랑에 몰린 정권을 유서 대필 사건으로 구원해낸 김기춘 법무부 장관은 현재 박근혜 정부의 ‘공안사건 지휘자’(청와대 비서실장)로 지목되며 ‘왕년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사건 수사 책임자였던 강신욱 서울지검 강력부장은 서울고검장을 거쳐 2000년부터 2006년까지 대법관을 지냈다. 2007년엔 한나라당 박근혜 대선캠프의 법률특보단장을 맡았다. 같은 해 11월 진실화해위가 사법부에 재심을 권고했을 때 그는 “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지 10여 년이 지난 지금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난센스”라며 “특정 단체가 입맛에 맞는 결론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곽상도 검사는 박근혜 정부 초대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냈다.

당시의 김기춘 법무부 장관, 강신욱 강력부장

신상규 주임검사는 서울중앙지검 3차장과 광주고검장을 역임(현재 변호사)했다. 강씨는 “원심 법정에서 재판 내내 나를 비롯한 모든 증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으며 다 같은 패거리라고 광기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최후진술서)며 그를 기억했다. “너희들은 뽕쟁이(마약사범)나 똑같은 놈들”이라던 취조실 발언(1991년 6월24일)도 잊지 못했다.

남기춘 검사는 2012년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회 클린검증제도소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2007년 진실화해위 권고 때 그는 “1991년 당시 증거물로 제출되지도 않았던 김기설씨의 필적을 가져다 감정한 뒤 이것이 옛날 감정 결과와 다르다는 이유로 당시 수사와 재판을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무죄를 유죄로 만든 그들은 아무 말이 없다. 무죄판결을 내린 재판부조차 과거의 잘못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강씨가 무죄판결에도 덤덤했던 까닭이다. 그는 “재판 결과보다 당시 검찰과 사법부가 자기반성의 뜻을 전해줬다면 훨씬 소중하게 다가왔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검찰이 재상고할 가능성이 높으니 대법원에 가지 않겠느냐”고도 했다.

정의를 지연시킨 책임을 묻지 않는 한 ‘너무 늦게 온 정의’는 정의일 수 없다. 그의 무죄는 그를 고난으로 몰아넣은 권력의 책임을 밝히는 시작이어야 한다. 법원은 재심 대상이 아니었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선 징역 1년과 자격정지 1년을 선고했다. 강기훈씨는 현재 간암 투병 중이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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