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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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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본법은 ‘기본’이다

문화예술계 진보적 시각 담겨 있는 ‘문화기본법’ 제정 앞둬…
핵심 가치 실현하는 문화정책 구체적인 실천 중요
등록 2013-10-05 15:40 수정 2020-05-03 04:27

문화예술계의 오랜 숙원인 ‘문화기본법’이 제19대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법안소위에서 통과돼 조만간 법 제정을 위한 본격적인 행보를 앞두고 있다. 앞으로 법 제정을 위해 거쳐야 할 단계가 많지만, 여야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법이 아니어서 올해 제정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문화의 가치와 사회적 역할 담겨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박근혜 정부가 이 법의 제정을 문화 분야의 국정과제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기본법은 문화연대가 지난해 각 대선 후보들에게 전달한 문화정책 100대 공약 제안 중 첫 번째 항목이었고, 이 법의 제정 배경과 취지에는 문화예술계의 진보적 시각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법이 참여정부에서 처음 추진된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박근혜 정부가 대선 때부터 지금까지 문화기본법 제정을 일관되게 가장 중요한 문화 정책과제로 삼은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박근혜 정부가 주요 국정과제 중 하나로 제시한 문화융성 정책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데 문화기본법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문화기본법이 문화융성의 구체적인 정책과제들을 명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화정책을 총괄·확대하는 차원에서 이 법이 갖는 상징적 지위는 무시할 수 없다. 문화기본법은 어떤 점에서 박근혜 정부가 중시하는 문화융성 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첫 번째 단추에 해당되는 것이다.
현재 상정된 문화기본법 안에는 비록 한계가 없지 않지만 문화의 가치와 사회적 역할 등에 대한 나름의 새로운 시각이 담겨 있다. 이 법의 제정으로 우리가 고려해야 할 문화정책의 주요 실천 과제를 몇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국민의 문화적 권리가 분명하게 보장될 수 있다는 점이다. 문화기본법 제4조 국민의 권리 조항은 “모든 국민은 성별, 종교, 인종, 세대, 지역, 사회적 신분, 경제적 지위나 신체적 조건 등에 관계없이 문화 표현과 활동에서 차별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문화를 창조하고 문화 활동에 참여하며 문화를 향유할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조항에 따르면 국민은 차이의 권리와 접근의 권리를 보장받는다.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받고, 문화 활동에서 계층적·지역적·성적·성별적·신체적 차별을 받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개인이 자신의 일상에서 문화를 향수할 수 있도록 다양한 문화적 접근 기회를 보장받는다.

문화행정총괄법으로 축소 안 돼

둘째, 문화영향평가를 통해 문화의 공공성과 균형성을 높일 수 있다. 문화기본법 제5조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무 조항을 보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각종 계획과 정책을 수립할 때에 문화적 관점에서 국민의 삶의 질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여 문화적 가치가 사회적으로 확산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문화영향평가는 환경영향평가처럼 대규모 국가 개발 사업이나 기업의 투자 사업이 진행될 때 그것이 문화적 관점에서 타당한가를 평가함으로써 문화공공성을 높이는 제도다. 또한 지역·계층별로 국민의 문화적 향수와 참여가 차별 없이 균형 있게 이루어지는지를 평가할 수 있다. 문화영향평가를 통해 문화공공 예산의 무분별한 낭비를 막고, 대규모 자본투자·난개발 사업에서 문화환경·문화경관·문화접근권의 관점을 지켜낼 수 있다.

문화연대 회원들이 9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표현의 자유를 위한 플래시몹을 하고 있다. 문화연대는 ‘대법원이 2010년 한 단체의 플래시몹을 정치적 집회로 보고, 집회신고를 하지 않은 불법집회로 규정했다‘며 정치적 행위와 예술행위를 구분지어선 안된다는 뜻으로 이 플래시몹을 기획했다. 관리인이 이들이 플래시몹을 하던 도중 허가를 받고 오라며 제지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문화연대 회원들이 9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표현의 자유를 위한 플래시몹을 하고 있다. 문화연대는 ‘대법원이 2010년 한 단체의 플래시몹을 정치적 집회로 보고, 집회신고를 하지 않은 불법집회로 규정했다‘며 정치적 행위와 예술행위를 구분지어선 안된다는 뜻으로 이 플래시몹을 기획했다. 관리인이 이들이 플래시몹을 하던 도중 허가를 받고 오라며 제지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셋째, 문화인력 양성에 대한 좀더 큰 틀의 국가 계획을 수립할 수 있다. 현재 문화예술계에 종사하는 인력은 다른 경제·사회 분야에 종사하는 인력에 비해 활동 영역, 임금수준 면에서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다. 예술 전공자들이 졸업 뒤 사회 진출을 시도할 때 마땅히 들어갈 수 있는 분야도 한정돼 있고 노동조건과 임금수준도 형편없다. 문화산업계의 기층 노동인력도 제대로 된 계약 없이 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소모되고 있다. 이른바 21세기 문화의 시대에 정작 창조적인 문화예술 인력들은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문화기본법은 우리 사회에서 문화예술 인력들이 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고, 창의적 활동에 종사하는 새로운 기획의 계기를 마련해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문화의 창의적 잠재성을 높일 수 있는 높은 차원의 연구와 개발을 본격화할 수 있다. 그동안 문화 분야의 연구·개발은 정책 평가와 정보 확보 수준에 머물러 있거나 지나치게 기술에 의존한 상업적 콘텐츠 개발에 집중했다. 문화가 미래의 중요한 창조적 자원으로 활용되려면 문화의 연구·개발은 문화의 창조성을 중심으로 새로운 유형의 자원 개발로 전환돼야 한다. 자본과 상품을 이롭게 하는 연구·개발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행복을 위해 문화가 어떤 창조적 자원이 돼야 하는지를 문화기본법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문화기본법의 이러한 위상을 실현하려면 이 법이 문화체육관광부만을 위한 행정총괄법으로 축소돼서는 안 된다. 현재 국회에 상정된 법안의 조문을 살펴보면 문화기본법은 문화체육관광부의 문화행정총괄법의 수준을 뛰어넘었다고 보기 어렵다. 특히 이 법조문에 실제로 기술되고 있는 문화권리·문화다양성에 대한 개념 정의가 빠져 있다. 문화민주주의·문화창의성·문화복지 등에 대한 언급이 문화기본법에 충분하게 정의 및 설명되지 못한 것도 아쉽다.

문화정책 실행 체계 구체화돼야

무엇보다 문화기본법의 목적과 이념, 문화진흥 계획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문화정책의 실행 체계가 구체화돼야 한다. 말하자면 이 법이 제정되면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문화의 위상이 얼마나 높아지고, 일반 시민들의 문화적 권리가 얼마나 신장되는지 기대감을 가질 수 있도록 문화재원의 확충, 문화행정 체계의 혁신 등이 이루어질지 의문이다. 따라서 문화기본법 제정도 중요하지만 이 법의 핵심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향후 문화정책의 구체적인 실천이 더 중요하다. 문화기본법이 만들어지면 우리는 과연 행복해질까?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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