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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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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보내는 한철

겨울 추위 견디기보다 힘든 가난한 이들의 여름나기… 장마·폭염으로 농산물값 급등해 밥상엔 짜디짠 밑반찬만
등록 2013-07-31 17:52 수정 2020-05-03 04:27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던 지난 7월25일 최철수(67) 할아버지가 서울 중구 남대문5가의 쪽방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최 할아버지는 “돈도 많이 들고, 더위도 견뎌야 하는 여름이 가장 싫다”고 했다.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던 지난 7월25일 최철수(67) 할아버지가 서울 중구 남대문5가의 쪽방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최 할아버지는 “돈도 많이 들고, 더위도 견뎌야 하는 여름이 가장 싫다”고 했다.

지루한 장마는 반지하 단칸방을 작은 섬 으로 만들었다. 박미영(43·가명)씨는 세찬 장맛비가 낮은 집 안으로 들이칠까 하나뿐 인 창문을 닷새 동안이나 꾹 닫고 지냈다. 그 새 곰팡이는 월세 23만원짜리 방 곳곳을 점 령했고, 퀴퀴한 냄새를 피웠다. 차상위계층 한부모 가족의 가장인 박씨는 고등학교 3학 년인 아들과 서울 노원구 상계동의 작은 방 에서 낡은 선풍기 한 대로 눅눅하고 불쾌한 장마철을 견디고 있었다.

모자를 괴롭히던 장맛비가 주춤하던 지 난 7월25일, 박씨의 단칸방에는 모처럼 창 문이 열려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섬에 갇혀 있는 듯,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는 “여름 에 가장 참기 힘든 건 손가락 두 개 크기만 한 바퀴벌레도, 코를 찌르는 곰팡이 냄새도 아닌 생활비 부담”이라고 했다. 하루 8시간 의 식당일로 벌어들이는 110만원에서 월세· 공과금·교육비 등을 빼고 나면 식비로 남는 돈은 많아야 30만원이다. 그러나 장마철에 물가가 치솟아 4만~5만원을 들고 나가도 장 바구니에 담을 게 별로 없다. “비가 많이 와 서 채소가 금값이 됐다. 고기가 더 싸다. 저 렴한 어묵이나 햄을 볶아서 식탁을 차리곤 한다. 수험생인 아들에게 신선한 음식을 먹 이고 싶은데 마음이 아프다.”

“금값이 된 채소… 고기보다 비싸다”

하루 전날 서울역 광장에서 만난 곽기철 (56·가명)씨도 “여름에 생활이 더 팍팍해진 다”고 했다. 근처 쪽방에서 홀로 며칠을 갇 혀 지내다 비가 그치자 잠깐 바람을 쐬러 나 온 그였다. 조건부 기초생활수급자인 그는 자활근로를 하고 받은 월급 55만~57만원 중 21만원을 방값으로 내고 나머지 대부분을 식비로 쓰는데, 여름에는 몇만원이 더 들었다. “어차피 여름에 쓰는 선풍기와 겨울에 사용하는 전기장판의 전기세는 방값에 포함돼 별 상관이 없다. 겨울에는 집 안에서 꽁꽁 싸매고 있으면 되니 돈이 밥 먹는 데만 들어간다. 하지만 여름에는 집이 찜통이라 무조건 밖으로 나와야 한다. 그러다보니 하다못해 물이나 음료수라도 사먹어야 해 돈을 더 쓰게 된다.”

여름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엄동설한의 겨울 못지않게 저소득 취약계층의 삶을 짓눌렀다. 저소득층의 고단한 여름살이를 추정해볼 수 있는 통계 자료가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이 지난 7월2일 내놓은 ‘저소득층 여름철 체감물가 높다’라는 제목의 보고서다. 보고서는 2003년부터 지난해까지 10년간 월별 물가상승률을 분석한 결과,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7월부터 9월까지 저소득 가구의 체감물가가 고소득 가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급등한다고 분석했다. 실제 저소득 가구인 소득 1분위(소득 하위 20%)의 지난 10년간 연평균 ‘전월 체감물가 상승률’은 겨울철인 12~2월과 여름철인 7~9월에 5분위(소득 상위 20%)보다 오히려 높았다. 여름철에는 그 격차가 겨울철보다 더 벌어졌다. 저소득 계층의 상대적인 물가 부담이 겨울보다 여름에 더 컸다는 의미다.

저소득층 체감물가 부담 7~9월 가장 높아

원인은 저소득층의 높은 식비 지출 비중이다. 7~9월에는 장마로 인한 집중호우, 폭염 같은 변덕스러운 날씨로 인해 농산물 등 식료품 가격이 뛰면서 소비자물가도 상승하는 패턴이 있는데, 저소득층은 식료품 지출 비중이 높아 이런 계절성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소득 1분위 가구의 소비지출에서 식료품 비용이 차지하는 비중을 뜻하는 엥겔계수는 20.79%에 달했다. 소득 5분위 엥겔계수(11.59%)의 2배에 가깝다. 저소득 가구의 또 다른 고민인 냉난방에 들어가는 연료비 비중 역시 7.7%로 고소득층(3.7%)의 2배였지만, 식비 부담에 비할 바는 못 됐다. 김천구 현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의 설명이다. “저소득 가구의 체감물가 부담이 정점에 이르는 시기는 한파로 식료품 가격도 높아지고 난방비도 들어가는 1월이었다. 그러나 고소득층에 비해 전반적으로 체감물가 부담이 높은 계절은 농산물 등 필수품 가격이 상승하는 여름이었다. 저소득 가구의 물가 부담 증가는 가계의 가처분소득을 줄이는 부정적 영향을 가져온다.”

당뇨병을 앓고 있는 최철수 할아버지의 식탁은 비싼 채소류 대신 맵고 짠 밑반찬으로 채워졌다. 최 할아버지가 25만원을 내고 살고 있는 쪽방촌 건물, 최 할아버지가 장맛비가 주춤한 틈을 타 바람을 쏘이러 나가는 모습(위부터).

당뇨병을 앓고 있는 최철수 할아버지의 식탁은 비싼 채소류 대신 맵고 짠 밑반찬으로 채워졌다. 최 할아버지가 25만원을 내고 살고 있는 쪽방촌 건물, 최 할아버지가 장맛비가 주춤한 틈을 타 바람을 쏘이러 나가는 모습(위부터).

올해는 사정이 더 나쁘다. 중부지방에는 장마가 평년보다 길어지고 남부지방에는 폭염이 일찍 기승을 부리면서 농산물 생산량이 크게 줄어든 탓이다. 이례적인 날씨는 식탁 물가를 천정부지로 치솟게 하고 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시금치 소매가격(1kg·상품)은 7월25일 기준 1만357원으로 한 달 만에 2.6배, 적상추(1kg·상품)는 1만6237원으로 2.4배나 치솟았다. 다른 채소와 과일도 적어도 20~30%씩 뛰었다. 변덕스러운 날씨로 조업 일수가 줄면서 수산물 가격도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다.

가뜩이나 가공식품 일색이던 저소득 가구의 식탁이었지만, 올여름엔 채소류·해조류 등 신선식품이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지난 4월 군대를 제대한 뒤 서울의 한 대학가 반지하 자취방에 터를 잡은 문용철(23·가명)씨 사례가 그렇다. 그의 한 달 식비로 허락된 돈은 10만원이다. 밤 9시~새벽 3시에는 호프집에서 일하고 과외 아르바이트를 뛰어 80만원을 벌지만 월세 35만원, 통신비 8만원, 교통비 5만원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다음 학기 등록금 마련도 그의 몫이다. “군대를 가기 전에는 채소가 저렴해서 가끔씩 먹었다. 그런데 요즘은 채소나 과일은 구경도 못한다. 쌀과 밑반찬은 집에 갔을 때 한 번씩 가져오고, 나머지는 조리된 인스턴트로 때운다. 마트에 가면 김치찌개를 5800원에 파는데 물의 양만 잘 조절하면 두 끼는 먹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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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식품이 사라진 식탁을 매일 마주하는 취약계층은 건강을 해칠 위험이 높다. 습하 고 무더운 날씨로 수분은 부족해지고 영양 균형은 깨지기 쉬운 여름에는 더욱 그렇다. 추혜인 살림의료생활협동조합 원장(가정의 학과 전문의)의 설명이다. “단백질과 탄수 화물을 먹어도 칼로리 섭취에는 문제가 없 을 수 있다. 그러나 섬유질이 함유된 채소를 제대로 섭취하지 않으면 아동은 비만·대사 증후군 등 성인병에 걸릴 위험이 높고, 성인 은 그런 병들을 제대로 관리할 수 없다. 비타 민·미네랄 등이 부족해져 만성피로 등에 시 달릴 수도 있다.” 식품 불평등이 건강 불평등 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채소는 한 달에 한 번 고기 먹을 때나…”

서울 중구 남대문5가의 쪽방촌에 혼자 사 는 최철수(67·가명) 할아버지의 저녁상은 단 출했다. 2평 남짓한 쪽방에서 휴대용 가스레 인지로 직접 조리할 수 있는 음식이라곤 멀 건 달걀국과 밥이 전부였다. 멸치볶음·김 치·마늘장아찌·오징어채볶음 등 반찬은 물 가가 저렴하기로 소문난 청량리 경동시장까 지 직접 가서 사왔다. 하나같이 오래 두고 먹 을 수 있는 맵고 짠 음식이었다. 오래전부터 당뇨를 앓아온 터라 신선한 채소류 등을 싱 겁게 조리해서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기초수급비 46만원으로는 하루살 이도 버거웠다. 구청에서는 “신선한 반찬을 가져다주겠노라”던 약속을 지킨 적이 없다. “채소는 한 달에 한 번 고기 먹을 때나 먹는 다. 그나마 요새는 풋고추 정도를 사와서 고 추장에 찍어 먹는 정도다. (당뇨 때문인지) 가끔 숨이 차오르고 정신이 아득해질 때가 있다. 그러면 집 밖에 나가 한참을 앉아 바 람을 쏘이곤 한다.” 장마가 곧 끝나면 맹렬한 무더위가 시작된다. 여름은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

글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지루한 2013년 장마
힘내라, 북태평양고기압!
길고 요란하다. 올여름 장마는 예상치 못한 시기에,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비를 뿌리고 있다. 장마가 왜 이리 변덕스러워진 것일까.
장마는 고온다습한 북태평양고기압과 차고 습한 오호츠크해고기압이 만나 형성된 불안한 전선 때 문에 내리는 비를 뜻한다. 북태평양고기압이 한반도 남쪽에서 올라오는 속도에 따라 장마는 제주에 서 6월19~20일, 남부지방에서 6월22~23일, 중부지방에서 6월24~25일 시작된 뒤 32일 정도 장맛 비를 뿌린다. 그러나 올해는 이같은 전형적인 흐름이 깨졌다. 지난 6월17일 ‘중부지방’에서부터 장마 가 시작된 것이다. 평년보다 일주일이나 빨랐고, 제주와 남부지방은 건너뛰었다. 북태평양고기압이 제주·남부지방을 슬쩍 지나치고, 곧바로 기세 좋게 중부지방으로 올라온 까닭이다.
일찍 시작된 장마는 끝도 없다. 평년이라면 중부지방의 장마는 7월18일 전후로 비가 그쳤을 터다. 그 러나 올해엔 24절기 중 가장 덥다는 대서(大暑)인 7월23일도 가뿐히 넘겼다. 북태평양고기압 세력이 늦어도 7월 말이면 절정에 달해 장마전선을 북한이나 중국 만주 지역으로 밀어내며 장마를 끝내는 데, 올해는 북태평양고기압의 뒷심이 굉장히 약한 탓이다. 기상 전문가들은 장마가 8월 초까지 이어 질 것으로 예보하고 있다. 만약 장마가 8월1일까지만 지속된다고 해도, 1980년 세운 최장 장마 기간 기록인 ‘45일’을 갈아치우게 된다.
‘강수량 양극화’도 이번 장마의 특성이다. 장마전선이 계속 머문 중부지방에는 집중호우가 쏟아 졌다. 6월17일~7월22일 경기도 양평(990mm), 강원도 화천(1040.5mm) 등에 내린 비는 평년 강 수량(366.4mm)을 크게 웃돈다. 반면 전남 완도(99mm), 부산(140.5mm) 등 남부지방(평년 강수량 348.6mm)과 서귀포(86.1mm) 등 제주 지방(평년 강수량 398.6mm)에는 비는 적게 내리고 폭염이 지 속되고 있다. 일찌감치 덥고 습한 북태평양고기압의 가장자리에 들었기 때문이다.
학계에서는 이번 장마를 ‘연구 대상’으로 보고 있다. 오재호 부경대 교수(환경대기과학)의 설명이다. “이례적인 이번 장마는 지구온난화와 연관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3~4년간 패턴을 지켜봐야 한 다. 다만 북태평양고기압이 기세 좋게 올라오다 왜 갑자기 주춤해졌는지는 연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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