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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해볼 것 없다, 쿨하게 숙여라

사과는 돈보다 효과적인 갈등 조정 수단… 보상 앞세우기보다 상대 자존감 먼저 살려줘야
등록 2013-06-02 15:56 수정 2020-05-03 04:27

1998년 5월 어느 날 새벽, 통증을 호소하던 형은 병원 응급실로 향한 뒤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의료사고였다. 병원은 사망 원인에 대해 변명으로 일관했고, 유족을 잘 만나주지도 않았다. 결국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한다. 1년6개월의 세월이 흐른 뒤, 법원은 ‘병원 잘못이 확실하니 합의를 보라’는 결정을 내린다. 거액의 보상금을 받았지만, 형을 치료한 의사 누구도 사과를 하지 않았다. 가족은 허탈감에 빠졌다.
의료사고 사과 문화 확산되자 소송률도 감소
미국에 살고 있는 더그 워체식 이야기다. 워체식은 형의 죽음을 계기로 의료분쟁을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의료소송을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탐욕이 아닌 ‘분노’ 때문이었다. 병원에선 사고가 발생하면 숨기고 방어하는 게 일반적이다. 워체식은 2005년 미 전역의 환자와 가족, 의료계, 보험업계, 법률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소리웍스 연합’(www.sorryworks.net)을 설립했다. 이 단체는 ‘진실 말하기’ 프로그램 확산의 구심점이다. 미시간주립대 의료원은 2001년 △피해 발생시 신속·공정하게 사과·보상 △적절한 진료는 강력히 방어 △사고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실수 재검토 등 3가지 원칙을 기반으로 ‘진실 말하기’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의료원을 상대로 제기된 손해배상 청구소송은 제도가 도입된 2001년엔 262건이었지만, 2006년 이후 100건 미만으로 줄어들었다.
솔직하게 잘못을 털어놓고 ‘사과’를 하고 싶어도 막대한 손해를 입을까봐 망설이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사과를 하는 것이 경제적으로도 이득일 수 있다. 사과는 원시적인 ‘갈등 조정’ 도구다. 절대권력을 누리거나 리더의 위치에 있는 이들에게 ‘사과’는 굳이 할 필요 없는 남의 일이었다. 그러나 투명성이 강조되는 시대가 되면서, 선진국에서는 사과의 효용성에 주목하고 있다.
영국 노팅엄대학 의사결정연구와 실험경제학센터(CEDEX)는 2009년 ‘사과의 힘’이라는 연구보고서를 내놓는다. 2007년 11월부터 2008년 4월까지 온라인 경매 사이트 ‘이베이’ 고객 중 서비스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한 고객 632명을 대상으로 조사가 진행됐다. 전자우편을 통해 정중한 사과문을 보냈을 때, 응답자의 44.8%가 불만을 철회했다. 그러나 2.5유로, 5유로라는 금전적 보상을 내건 경우 불만 철회를 결정한 이는 각각 19.3%, 22.9%에 그쳤다. 고객의 화를 누그러뜨리는 건 돈보다 사과였다. 기업의 최고경영자(CEO)가 트위터에 사과 메시지를 내보낼 경우, 기업이 일으킨 사고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국내 연구 결과도 있다(‘CEO 트위터 사과 메시지의 위기관리효과: 트위터 사과 여부·사과 주체·감성적 소구를 중심으로’, 박노일·한정호·정지연, 2012).
적절한 사과를 할 줄 아는 리더는 대중의 신뢰를 얻는다. 특히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사과 리더십’으로 주목받고 있다.
‘사과 달인’ 오바마에게 배워라
2009년 2월 오바마의 정치적 스승으로 불리던 톰 대슐 보건부 장관 지명자가 세금 탈루로 낙마했다. 세금 신고를 하지 않은 사실을 뒤늦게 알고 이자까지 붙여서 14만6천달러를 납부했지만 비판 여론이 가라앉지 않자 백악관에 사의를 표명한다. 대슐을 두둔하던 오바마는 지명을 철회한 뒤 방송 인터뷰에서 “내가 큰 실수를 한 것 같다” “나 자신과 우리팀에 대해 좌절감을 느낀다”는 사과 메시지를 전했다. 시원한 사과와 원활한 소통에 목마른 한국 사회와 비교되는 대목이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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