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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 정의는 더디게 왔다

대법원 부부 강간죄 첫 인정… 유죄 근거 되는 ‘강제성’ 수위는 여전히 모호
등록 2013-05-22 18:08 수정 2020-05-03 04:27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부부 사이의 강간죄를 인정한 대법원 판결이 지난 5월16일에 나왔다. 이혼한 부부의 강간죄 성립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은 2009년에 있었지만 결혼한 부부에 대해선 첫 판단이다. 대법원은 1970년엔 “실질적인 부부 관계가 유지될 때는 설령 남편이 강제로 아내를 간음했다고 해도 강간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며 부부 강간을 인정하지 않았다. 43년 만에 대법원 판결이 바뀐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시대가 변했으니까.
1970년 첫 판결 땐 강간죄 불인정
ㄱ(45)씨는 아내 ㄴ(41)씨와 2001년 결혼해 자녀 2명을 뒀다. 부부싸움이 잦아진 2010년 10월 ㄱ씨는 부엌칼로 ㄴ씨를 위협해 강제로 성관계를 가졌다. 그 뒤에도 흉기를 사용한 강제적 성관계는 두 차례 더 있었다. 보다 못한 친정 식구들이 ㄱ씨를 신고했고 검찰은 특수강간 혐의로 기소했다. 2012년 1·2심은 “부부 사이라도 폭행·협박 등의 강제로 성관계를 할 권리까지 있다고 할 수 없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대법원도 이를 인정하며 징역 3년6개월에 정보공개 7년, 위치추적전자장치(전자발찌) 부착 10년을 확정했다.
핵심 쟁점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형법 297조 강간죄 규정 조항 중 ‘폭행·협박을 동원해 부녀를 간음한 경우’의 부녀에 아내도 포함되느냐다. 대법원 다수 의견은 ‘그렇다’고 판단했다. “부녀란 기혼이든 미혼이든 여자를 가리키는 것이므로 법률상 아내도 강간죄의 대상으로 봐야 한다.” “(결혼이) 성적으로 억압된 삶을 참아야 할 의무까지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피할 수 없는 결론이었다. 강간죄의 대상이 이미 지난해 12월 형법 개정 때 ‘부녀’에서 ‘사람’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6월19일부터는 남편을 강간한 경우에도 처벌되는데, 아내를 제외한 기존 대법원의 판례를 유지한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여성가족부 관계자는 “형법이 개정돼 아내든 남편이든 배우자 강간을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고 말했다. 6월까지는 한시적으로 아내만 피해자가 될 상황이다.
두 번째 쟁점은 폭행·협박이 어느 정도면 부부 강간죄를 인정할 수 있느냐다. 이번 사건에선 부엌칼이 등장해 유죄로 인정했다. 하지만 뺨을 때리거나 욕을 했다면 어땠을까? 대법원이 밝힌 기준은 애매하다. “반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이나 협박을 가해 아내를 간음한 경우”에 강간죄를 적용해야 한다. 어느 정도의 폭행과 협박이 있어야 하는지는 “폭행에 이르게 된 경위, 평소 부부간 관계, 폭행 당시와 그 이후 사정을 종합해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결국 구체적인 판례가 쌓여야 명확한 기준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가벼운 말다툼 정도를 동반한 부부간의 성관계까지 강간죄로 인정하긴 어렵다”고 설명했다.
프랑스는 일반 강간죄보다 엄중 처벌
유럽과 미국은 부부 강간죄를 1980년대에 인정했다. 미국은 1984년 뉴욕주 항소법원에서 유죄로 인정했고, 영국은 1991년 최고법원이 배우자 강간 면책조항을 공식 폐기했다. 프랑스는 1981년 첫 판례 이후 부부 강간죄를 일반 강간죄보다 더 엄하게 처벌한다. 다만 일본은 “부부 강간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판례를 유지한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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