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반복되는가?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이 박근혜 정부의 첫 통상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2008년 이명박 정부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박상표 ‘국민건강을 위한 수의사 연대’ 정책국장은 “새 대통령이 임기 초에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 한다는 점을 이용해 미국이 오랜 통상 현안을 해결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웬디 커틀러 미국 무역대표부(USTR) 한국담당 대표보는 지난 1월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미 쇠고기) 수입위생조건에는 협의 조항이라는 게 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이 조항을 쓰는 게 유용하다고 (미국이) 판단할 가능성이 있다.” 월령 30개월 이상의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도록 한국 정부에 요청하겠다는 ‘선전포고’다. 광우병의 99%는 30개월 이상 된 소에서 발견된다. 이런 움직임을 한국 정부도 감지했다. 지난 1월15~16일 미국 워싱턴에서 커틀러 대표보를 면담한 최경림 외교통상부 자유무역협정(FTA) 교섭대표의 말이다. “(미국이) 당장 쇠고기 추가 개방에 대한 협의를 하자는 것은 아니었고, 언젠가 추가 개방 문제를 거론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점을 설명했다.” 만일 미국 정부가 쇠고기 협상을 요청하면 한국 정부는 무조건 협상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 2008년 4월 이명박 정부가 합의한 한-미 수입위생조건 협의 조항(제25조)을 보면, ‘두 나라 가운데 한쪽이 협의를 요청하면 7일 안에 상대방이 응해야 한다’고 돼 있기 때문이다.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미국이 쇠고기 협상을 밀어붙이는 이유는 ‘성공의 경험’이 있어서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 미국은 한-미 정상회담을 미끼로 쇠고기 협상을 요구했다. 인수위 인사들은 쇠고기 시장 개방을 잇따라 약속했고 대통령이 취임하자 이를 실현했다. 내부고발 사이트인 위키리크스가 2011년 9월 공개한 주한 미국대사관의 외교문서에 그 내막이 담겨 있다.
2003년 12월 미국에서 광우병에 걸린 소가 발견된 뒤 미국산 쇠고기는 수입이 전면 금지됐다. 당시 한국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액은 연간 8만6천만달러로, 미국으로서는 3대 수출국을 잃은 셈이었다. 2006년 9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재개됐지만 수입 대상을 30개월 미만의 뼈 없는 쇠고기로 제한했다. 2007년 5월 세계동물보건기구(OIE)가 미국을 ‘광우병 위험 통제국’으로 판정하자 미국은 쇠고기 수입 시장을 더 확대하라고 노무현 정부에 요구했다. 협상을 시작했지만 수입이 금지된 갈비뼈·등뼈 등이 검역 과정에서 발견될 때마다 정부는 검역을 중단했다. 그리고 2007년 12월,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됐다.
2008년 1월 인수위가 꾸려지자마자 이 대통령 쪽은 미국과 쇠고기 시장 개방을 논의한다. 2008년 1월17일 인수위에서 활동하던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과 현인택 전 통일부 장관이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와 점심을 먹으며 이 대통령의 방미와 쇠고기 협상을 연계했다. 이 대통령이 4월19일 캠프 데이비드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기에 앞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재개하겠다는 것이었다. 버시바우 대사는 2월19일 이경숙 당시 인수위원장, 3월12일 김병국 당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과 만난 자리에서도 “이명박 대통령이 첫 미국 방문에서 환대를 받으려면 한국의 쇠고기 시장 전면 개방에 먼저 동의해야 한다”고 재차 확인했다. 이 대통령 쪽은 쇠고기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거듭 밝혔다. 다만 정치적으로 민감해 4월9일 총선 전까지는 공식적으로 서명할 수 없다고 ‘양해’를 구했다.
MB가 부시 대통령 만난 날, 협상 타결4월9일 제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이 전체 의석(299석)의 과반수인 153석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틀 뒤인 4월11일부터 두 나라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를 위한 공식 협상에 돌입했다. 불과 일주일 만에 월령 30개월 이상의 뼈를 포함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사실상 완전히 허용하기로 합의했다. 협상 타결 날짜는 이 대통령이 캠프 데이비드에서 부시 미 대통령을 만난 4월18일이었다. 무리한 쇠고기 시장 개방은 촛불로 상징되는 대규모 국민 저항을 일으켰다. 뒤늦게 이명박 정부는 미국과 재협상에 들어가 한시적으로 30개월 미만의 쇠고기만 수입하기로 했다. 30개월 이상의 쇠고기는 ‘한국민의 신뢰가 회복됐을 때’ 수입하기로 한-미 양쪽이 합의했다.
이후 미국은 애초에 합의한 ‘완전 개방 수준’으로 되돌리기 위해 줄곧 기회를 엿봤다. 해마다 늘고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한국민의 신뢰 회복을 보여준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현황을 보면, 2009년 5만t, 2010년 9만1천t, 2011년 10만7천t으로 증가 추세다.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실장은 “30개월 미만의 쇠고기만 수입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30개월 미만 쇠고기의 수입이 증가했다고 해서 광우병 발생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30개월 이상까지 허용할 수는 없다는 지적이다. 미국은 2012년 3월 한-미 FTA가 발효될 때 ‘6개월 내에 쇠고기 협상을 요구하겠다’고 공언했지만 같은 해 4월 광우병이 재발해 잠시 침묵했다. 2008년 4월 총선처럼, 2012년 12월 한국의 대선도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임을 알고 있어서다.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자 미국이 다시 분주해졌다. 한국에 쇠고기 협상을 요구할 명분을 차근차근 쌓고 있다. 첫째, 자국의 수입 규제를 완화해 그동안 금지했던 유럽산 쇠고기 수입을 허용했다. 미국 농무부의 존 클리퍼드 수의검역국장은 “다른 나라에 미국산 쇠고기 제품의 완전한 수입 개방을 요구하고 그 협상력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미국이 쇠고기 협상을 요구할 때마다 한국은 광우병 위험 통제국인 유럽산 쇠고기를 수입하지 않는 미국의 이중 잣대를 지적하며 버텨왔다. 둘째, 지난 2월1일 일본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 조건을 완화해 30개월 미만 쇠고기의 수입을 허용했다. 2003년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한 뒤 일본은 20개월 미만 쇠고기만 수입해왔다. 하지만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협상 참여를 위한 전제조건으로 미국이 쇠고기 수입 확대를 요구하자 일본이 이를 받아들였다. 통상법 전문가인 송기호 변호사는 “일본과 한국을 경쟁시키며 통상 압력을 강화하는 게 미국의 전략”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협상 결과가 한국에 오히려 기회”우희종 서울대 교수(수의학)는 “일본의 협상 결과가 한국에 오히려 기회”라고 말했다. “일본이 이번에 미국에 허용한 ‘30개월 미만의 쇠고기’는 2008년 촛불 덕분에 한국이 지켜낸 수준이다. 5년이 지났지만 국제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범위가 그 정도라는 게 다시 확인됐다. 2008년 당시 정부·여당은 일본이나 대만 등 주변국이 모두 한국처럼 쇠고기 시장을 완전 개방하도록 미국과 합의할 것이라고 했지만 그 주장은 틀렸음이 증명된 것이다. ‘한국민의 신뢰가 회복될 때까지’라는 조건부 제한을 떼어내 일본처럼 30개월 미만의 쇠고기만 수입하도록 공식화해야 한다.”
첫 통상 협상에 실패한 이명박 정부는 임기 내내 ‘촛불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박근혜 정부는 역사를 반복할 것인가?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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