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은 세상을 바꾼다. 혹은 바뀔 수도 있었을 세상이 바뀌지 않게 한다. 아들딸 사이에 의견이 갈렸을 때 제사용 재산은 누가 물려받아야 할까? 최아무개씨는 2006년 배다른 남매 3명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경기도 양평의 공원묘지에 묻힌 아버지의 주검을 넘기라”는 유체인도 소송이었다. 최씨는 배다른 형제들이 아닌 자신이 ‘제사용 재산을 승계받아 제사를 주재하기에 가장 적합한 공동상속인’인 제사주재자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무덤에 묻힌 최씨의 아버지는 1947년 결혼해 최씨를 비롯해 3남3녀를 낳았다. 아버지는 1961년 딴살림을 차렸다. 1남2녀를 또 낳았다. 배다른 남매들은 반박했다. “망인의 생전 의사에 따라 망인의 유체를 이 사건 분묘에 매장한 것”이라고 최씨를 비난했다. 숨진 아버지가 1961년부터 40여 년간 최씨와 왕래하지 않았고 최씨의 양육에 도움을 주지 않은 사실도 거론했다.
국민의 삶을 규정하는 대법원
1·2심은 최씨에게 승소 판결을 내렸다. “최씨가 망인(아버지)의 생존시 부모로서의 공양을 거부하거나 사후 제사를 거부하겠다는 등의 의사를 표현하였음을 인정할 만한 아무런 증거가 없는 이 사건에서, 피고(배다른
남매)들의 위 주장 사실만으로는 망인의 종손인 원고에게 제사를 주재하는 자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는 특별한 사정이 있다고 볼 수 없다.” 이중부정이 난무하는 복문으로 쓰인 판결문의 취지는 옛 대법원 판례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종손이 있는 경우라면, 그가 제사를 주재하는 자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는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종손에게 제사주재자의 지위가 인정된다”라고 2000년 대법원 판례는 말한다.
대법원으로 사건이 올라왔다. 남녀평등이라는 가치를 두고 대법관들이 갈렸다. 박시환·전수안 대법관은 “제사주재자는 우선 공동상속인들의 협의에 의해 정하되,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에는 다수결에 의해 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김영란·김지형 대법관은 공동상속인들 사이에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 가사 소송의 이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개별 사건에서 당사자들의 주장의 당부를 심리·판단하여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수는 보수적이었다. 대법관 13명 가운데 7명은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에는 제사주재자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는 특별한 사정이 있지 않은 한 망인의 장남이 제사주재자가 되고, 공동상속인들 중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망인의 장녀가 제사주재자가 된다”며 1·2심을 그대로 인정했다. 65살 이상 사망자 수가 2009년에 16만9천 명 정도다. 7명 대법관의 판단은 이들의 자녀와 연관된 제사용 재산 상속 갈등의 기준이 된다. 박시환·김지형·전수안·김영란 대법관의 의견이 다수였다면 달라졌을 것이다. 대법원이 국민의 삶을 규정하므로 사회적 약자의 시각이 반영되어야 한다는 시민단체의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민변·참여연대, “후임 대법관 아쉽다”
박시환·김지형 대법관이 11월18일 퇴임했다. 두 대법관은 김영란(2010년 8월 퇴임)·이홍훈(2011년 5월 퇴임)·전수안 대법관과 함께 진보 대법관 5인으로 불렸다. 이들은 강의석씨 판결, 철도노조 업무방해 판결, 삼성 X파일 사건 등 굵직한 사건에서 종교의 자유, 노동권, 삼성 관련 보도의 공공성 등을 옹호하는 소수 의견을 냈다. 2012년 7월 퇴임하는 전 대법관 혼자 남았다. 1988년 군사독재 유산으로부터 사법부 개혁을 주장하는 판사 연서명 운동 당시 박시환·김지형 대법관과 함께 참여했던 이인복·박병대 대법관이 현직에 있지만, 정치·경제·사회 등 핵심 이슈에서 일관되게 진보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박시환 대법관은 사법부 개혁을 주장하는 1988년 연서명 참여, 국가보안법 위헌제청 등 젊어서부터 인권·시민자유 등의 가치를 판결에 담는 데 앞장서왔다. 김지형 대법관은 진보적인 노동법 해석으로 주목받았다. 박시환·김지형 대법관 후임으로 지난 10월 김용덕 법원행정처 차장과 박보영 변호사가 임명 제청됐다. 김 차장은 54살의 서울 출신으로 서울대를 나왔고, 50살의 박 변호사는 전주여고와 한양대를 나왔다. 출신·나이·대학·성별에서 다양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했다고 대법원은 밝혔다. 그러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과 참여연대 등은 논평을 내어 “(두 후보가) 사법부의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인물이라고 평가하기에는 뚜렷한 의미를 남긴 판결과 활동을 확인하기 어렵다”며 아쉬움을 표현했다.
나이, 학력, 출신 지역 등의 다양성이 가치관의 다양성을 법원에 반영할 수 있겠느냐는 게 시민단체의 우려다. 박시환·김지형 대법관은 퇴임사에서 짙은 아쉬움을 표현했다. 김 대법관은 “6년이 지난 지금은 부끄러움이 앞설 뿐입니다. 처음의 다짐과 소망을 얼마나 이루었는지 생각하니 더욱 그렇습니다”라며 “제가 법관으로서 도달하려고 했던 목표는 한 가지였습니다. 고통받는 이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라고 밝혔다. 박 대법관은 “능력과 자질에 비해 저는 너무 과분한 자리에 와 있었으며, 저의 그릇은 이미 넘쳐 흐르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두 법관은 동료와 후배에게 당부를 잊지 않았다. 박 대법관은 “강자의 입맛에 맞게 통제되는 법관, 순치되는 법관으로는 다수와 소수, 강자와 약자의 이익을 두루 살피고 다양한 가치관에 따라 창조적인 법 해석을 통한 사회 발전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라고 밝혔다. “법관을 통제하고 자기 편으로 길들이려는 욕구는 한시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결국 법관의 자율은 법관 스스로가 싸워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라고도 했다. 김 대법관은 “어느 사회가 법관과 법원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갖고 있다면, 그 사회는 매우 소중한 자산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법원 바깥의 기대와 우려
2012년에 김능환·안대희·전수안 대법관이 퇴임하면 그 자리를 다시 이명박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관이 채운다. 6년 전 김지형 대법관은 취임식에서 함석헌의 시를 읊었고, 박시환 대법관은 “법원은 변화의 과정 속에 있다”고 말했으며, 지금은 이명박 행정부의 총리가 된 김황식 당시 대법관은 “이 땅의 공의와 정의를 실현”하겠다고 밝혔다. 사회적 약자의 시선을 내년 대법관 취임사에서 느낄 수 있느냐는 게 법원 바깥의 기대이자 우려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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