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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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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군부 헤게모니의 종언

정부와 갈등으로 군 수뇌부 사상 첫 집단 사임… 민주화 기대 속 ‘이슬람식 권위주의’에 대한 우려도
등록 2011-08-11 18:25 수정 2020-05-03 04:26

8월1일 터키 수도 앙카라에서 열린 최고군사위원회. 회의실 최고 상석에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총리가 혼자 앉았다. 지난해는 그의 옆에 합참의장이 앉았다. 에르도안 총리는 테이블 위에 주먹을 올려놓은 채 앉았다. 반면 장군들의 손은 테이블 아래에 내려가 보이지 않았다. <ap>은 이 모습이 터키 역사에서 군부가 정부와의 권력다툼에서 다시 한번 패배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이날 전했다. 외신들은 터키 정치에서 “새로운 시대” “한 시대의 종언” 등으로 평가하며 주목했다.

근대 터키 건국 후예들의 쇠락

이날 최고군사위원회 회의가 주목받은 이유가 있다. 이시크 코사네르 합참의장과 육·해·공군 참모총장 4명은 7월29일 한꺼번에 사의를 밝혔다. 터키 역사상 처음이다. ‘대형 해머 작전’이라 불리는 2003년 쿠데타 음모 혐의로 7월29일 22명 등 여러 장성급을 포함해 250명의 군 장교가 체포되자 군 수뇌부 4명이 동시에 ‘조기 은퇴’를 신청한 것이다. 쿠데타 혐의를 부인해온 군부는 수사에 반발하며 이번 사건에 관련된 장교 10여 명의 승진을 요구하는 등 정부와 갈등을 빚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결과를 두고 외신들은 과거에는 군부와 정부가 갈등을 빚으면 정권이 교체됐지만,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뒤집혀 군부가 물러났다고 평가했다. 후임 합참의장에는 혼란없이 네크뎃 오젤 전 헌병사령관이 8월4일 임명됐다.
오늘날 민주공화국에서 군이 선거로 선출된 문민정권에 복종하는 게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하지만 터키 역사를 보면 이런 변화는 의미가 크다. 터키 어디를 가나 광장에는 한 사람의 동상이 있다. 지폐에도 그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터키 건국의 아버지’ 케말 아타튀르크(1881~1938)다. 오스만제국이 1차 세계대전에 패배해 무너진 뒤 군 사령관이었던 그는 이슬람 왕정인 술탄제도를 폐지하고 공화제 터키의 건국을 주도해 1923년 터키 초대 대통령에 올랐다. 아타튀르크는 오스만제국의 뼈대이던 이슬람을 세속주의 국가 교리로 바꿔놨다. 정치와 종교 분리, 일부다처제 폐지, 여성 참정권 실현, 태양력 채택, 로마자 사용 등의 개혁을 추진해 오늘날 터키 근대화의 토대를 놓았다.
이후 터키 군부는 민간 위에 군림하며 이슬람주의로부터 세속주의를 지키는 국가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해왔다. 그들은 터키 사회를 서구 문명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현대적·세속적으로 발전된 민족국가를 이상으로 지향했다. 아타튀르크의 가르침대로 이슬람과 신으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내·외부의 적들로부터 터키를 지키고 서구화를 내세웠다. 1980년대 말까지 터키 대통령 7명 가운데 6명이 장군이었으니, 군이 정치를 감독하고 개입할 수 있었다. 군부는 냉전시대에는 공산주의를, 냉전 뒤에는 정치적 이슬람과 쿠르드 분리주의를 국가안보의 위협으로 간주하며 민주화를 거부하고 헤게모니를 유지했다고 는 8월1일 전했다.

국민도 반기는 문민정부 우세

그러다 보니, 군부와 정부 사이에 오랜 갈등이 빚어졌다. 군부는 1960년 5월과 1971년 3월, 1980년 9월 쿠데타를 일으켰다. 1997년에는 첫 이슬람 주도 정권이자 에르도안의 멘토였던 네지메틴 에르바칸 정권의 퇴진으로 이어진 군사작전을 벌였다. 에르도안이 2002년 11월3일 선거에서 압승한 뒤에는 그를 제거하려는 쿠데타 음모가 발각돼 무력화됐다. 지금 군부와 정권이 갈등을 빚은 그 음모다.
이후 굳건한 세속주의 전통의 군부와 이슬람에 뿌리를 둔 정의개발당(AKP) 정권 사이의 갈등은 깊어졌다. 군부는 1998년 공중장소에서 이슬람 시를 크게 읽어 종교 혐오를 부추겼다는 이유로 수감돼 4개월간 복역했던 에르도안의 이슬람 정치운동 경력을 의심했고, 군부나 헌법재판소의 세속주의자들이 에르도안을 견제했다. 하지만 에르도안은 2003년 3월 총리에 오른 이후 그동안 세속주의자들이 지배하던 대통령직과 대학, 법원을 차례로 장악했고 이번에 군부까지 꺾었다. 1999년 이후 터키가 유럽연합(EU) 가입을 추진하고 정치·경제적 자유화 및 EU가 요구하는 군부의 탈정치화가 꾸준히 진행된 결과였다.
2007년이 고비였다. 에르도안 정부에서 외무장관을 지낸 압둘라 굴이 군부의 반대 속에 의회에서 대통령에 선출된 것이다. 군부는 총리가 실권을 갖는 터키에서 대통령을 국가 세속주의의 핵심 보루로 여기고 이슬람주의자인 굴이 대통령에 선출되면 정교분리 원칙이 무너진다며 반대성명을 내는 등 야당과 함께 선출에 반대했다. 세속주의자들이 장악한 당시 헌법재판소는 정확한 정족수 규정이 없는데도 의회의 대통령 선거 1차 투표를 정족수 미달을 이유로 무효화시켰다. 이에 정의개발당은 조기총선 카드를 꺼내 승리함으로써 계획대로 굴을 대통령에 앉혀 권력 기반을 더욱 다졌다. 그리고 지난 6월 총선에서 정의개발당이 550석 가운데 327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고 에르도안이 3선 총리에 오르면서 그의 권력이 군부까지 장악한 것이다. 신구 정치 엘리트 간 싸움이 군부의 패배로 끝나가는 것이다.
미국 로렌스대학 터키 전문가인 하워드 아이센스타트 교수는 “경찰이 여당의 완전한 통제하에 놓여 있고 지난 10년간 무장을 해온데다, 야당이 약하고 분열돼 군부가 쿠데타를 벌일 수 없다”고 설명했다. “터키는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고 있고 군부의 수호자적·우월적 지위도 끝나가고 있다”고 일간 편집국장인 아메트 알탄은 평가했다. 일반 국민도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 행사는 과거 쿠데타와 불안정하던 시기로의 회귀로 여겨, 군부의 영향력 쇠퇴를 환영하고 있다.

권력 집중화와 세속주의 포기 우려도

이런 변화가 민주화라는 평가 한쪽에 권력 집중화에 대한 우려도 조심스레 나온다. 은 “군부의 문민정권 복종이 민주화의 표시로서 터키가 가입을 추진하는 EU에서는 환영받겠지만, 에르도안 총리가 국가기관에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에르도안은 3선 총리로 집권 9년차에 접어들면서 각종 현안에서 과감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는 1980년 쿠데타 이후 군부의 감독 아래 쓰인 헌법도 뜯어고칠 계획이다.
그가 대통령 권한을 강화한 뒤 터키를 대통령제로 바꿔 자신이 대통령에 오르려 한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에르도안 총리는 이슬람 운동에 정치적 뿌리를 두고 있지만, 이슬람 가치와 서구식 정당 민주주의를 결합한 ‘터키식 모델’을 앞세워 터키의 현대화와 2003년 이후 연평균 5%의 경제발전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에르도안이 자신은 세속주의자라고 밝히고 있지만, 권력이 강화될수록 이슬람 색채를 드러낼 것이라고 세속주의자들은 경계한다. 에르도안 정부가 알코올 금지지역 및 간통죄 도입 추진, 대학교 내에서 히잡착용 금지 철폐를 추진하는 것 등이 그 예로 거론된다. 6월 총선 승리 뒤 기뻐하는 에르도안 총리 옆에는 정부청사, 학교, 대학에서는 착용이 금지된 히잡을 쓴 그의 아내가 박수를 쳤다.
에르도안의 권력강화를 경계하는 이들은 군부의 집단 사임이 반대세력을 탄압한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는 에르도안 정부의 힘만 키워준 꼴이 됐다고 우려한다. 군부 쿠데타 음모에 대한 처벌은 환영받았지만, 법원 판결 없이 혐의자를 장기 수감하고 관련 증거를 조작하고 있다는 논란도 불거지던 상황이었다. 케말 크리스치 터키 보스포루스대학 교수(정치학)는 <dpa> 인터뷰에서 이번 사건이 “터키 민주주의 진화의 급격한 전환점이 될 수 있지만, 총리의 권위주의적 성향에 따라 민주주의가 제한받는 시점이 될 수 있다. 시간이 말해줄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dpa></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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