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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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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다방의 커피향은 별다방보다 짙어라



도서관보다 맛있고 카페보다 지적인 북카페…
토론과 참여 문화 기반으로 진화 중
등록 2010-09-30 11:16 수정 2020-05-03 04:26
‘후마니타스 책다방’은 다양한 논의와 문화가 형성되는 공간으로서 북카페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한겨레 류우종 기자

‘후마니타스 책다방’은 다양한 논의와 문화가 형성되는 공간으로서 북카페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한겨레 류우종 기자

서울 지하철 6호선 상수역에서 합정역 방향으로 큰길을 따라 걷다 보면 ‘후마니타스 책다방’을 만날 수 있다. 인문사회과학 전문 출판사 후마니타스가 지난 8월 말 선보인 북카페다. 정민용 후마니타스 주간은 홈페이지를 통해 책다방을 이렇게 소개했다.

“오늘 옆집 족발집 아주머니가 책다방이 뭐하는 곳이냐고, 아무나 가도 되냐고 물어보시더군요. 후마니타스 책다방은 카페는 카페인데, 안에 출판사가 있고요, 책이 아주 마~~않은 곳입니다.”

끊임없는 대화로 문화를 소통하는 공간

정 주간의 설명대로 후마니타스 책다방을 들어서면 카페 오른쪽에 출판사 편집부가 보인다. 맞은편에는 카페 바가 자리를 잡고 있는데, 그 뒤쪽을 보면 다시 출판사 영업부 등 사무공간이 숨어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북카페이면서 출판사인 공간이 바로 후마니타스 책다방이다.

북카페를 북카페답게 만드는 것은 역시 책이다. 책다방 곳곳에는 상당한 양의 책이 꽂혀 있다. 사회성 강한 책을 만들어온 후마니타스의 관심사를 반영하듯 정치학과 사회학 원서 등 인문사회과학 서적이 대부분이다. 이름이 꽤 알려진 북카페라 하더라도 읽을 만한 책 한두 권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이곳 책다방은 다르다. 대다수 북카페가 책을 인테리어 소품으로서의 ‘북-’으로 취급하는 것과 달리 책다방은 책을 책 자체로 대접하겠다는 생각이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책다방에 북카페가 아닌 책다방이라는 이름을 선물한 데에는 그런 뜻이 숨어 있다.

책다방 곳곳에 대형 테이블과 원탁이 놓인 것도 눈에 띈다. 스타벅스와 카페베네 등 여전히 한국 사회를 점령하고 있는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에서는 언젠가부터 3명 이상이 합석할 수 있는 테이블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4인 테이블을 2인 테이블로 쪼개고 각각의 손님이 최대한 시선을 마주치지 않도록 자리를 배치하는 것이 카페의 상술인지는 모르겠으나, 무엇보다 이용자의 행태부터 과거와 많이 달라진 것이 사실이다.

지금도 커피를 사이에 놓고 대화를 나누는 단체 손님이 있기는 하지만 조용히 혼자 카페를 찾아 노트북을 펴거나 이어폰을 꽂은 채 스마트폰에 매달리는 이용자가 과거보다 크게 늘었다.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무선인터넷 수요가 늘어나며 상당수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은 무선인터넷 서비스를 무기로 내세운다. 카페라는 공간이 과거에 비해 점점 개인화하고 있는 것이다.

책다방의 주인이기도 한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마치 전자도서관 같은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은 책다방의 모델이 아니라고 말했다. “우리도 가능하다면 많은 사람이 책다방을 찾았으면 하죠. 하지만 이들이 마치 도서관에 온 것처럼 조용히 왔다 가는 것을 바라는 건 아닙니다. 그런 모습보다는 독자가 언제든 원하면 책다방을 찾아 말을 걸 수 있게 하자, 그렇게 대화가 끊이지 않는 공간으로 만들자,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기업이 소비문화 양식의 하나로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을 포착했다면, 책다방은 다른 측면에서 카페의 가능성을 주목하고 있다. 저자와 독자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공간, 즉 책다방을 중심으로 다양한 논의가 형성되고 또 이를 통해 주제별 소문화를 형성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를 위해 책다방에서는 개업과 동시에 매주 수요일 최장집 교수의 정치철학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전은 물론 제임스 매디슨과 알렉시스 토크빌까지 두루 다룰 예정이다. 10월9일부터는 매주 토요일 정치학 연구모임도 함께 연다. 후마니타스가 출간 예정인 을 주제로 강독을 한다.

사적 욕망뿐만 아니라 공적 토론이 함께 오가는 개방된 공간을 꿈꾼다는 점에서 후마니타스 책다방의 원형은 17세기 후반 영국에서 유행한 커피하우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영국 등 유럽에 활발히 들어선 커피하우스는 단지 커피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계층 구분 없이 누구나 출입해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타인의 생각을 경청하는 정치적 공간이었다. 자연스럽게 대중적이면서 민주적인 공간이 생긴 것이다.

체화당을 연 이신행 연세대 명예교수는 북카페가 지닌 공론의 생명력을 말한다. 한겨레 류우종 기자

체화당을 연 이신행 연세대 명예교수는 북카페가 지닌 공론의 생명력을 말한다. 한겨레 류우종 기자

상업성에 바스라지기도…

토론과 대화가 억압된 사회는 커피하우스도 막았다. 소련 시절 모스크바에 커피하우스가 금지된 것이 대표적이다. 물론 술집도 거의 없었다. 커피하우스가 있다 해도 일반 식당 형태여서 차를 다 마시면 곧바로 일어나야 했다. 이따금 웨이터가 서비스를 제공하는 레스토랑이 있었지만 이런 곳에는 반드시 꽃이나 촛대가 있었다. 그래야 그 밑에 마이크를 숨겨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웨이터는 이렇게 도청된 정보를 정기적으로 국가보안위원회(KGB)에 보고해야 했다. 이 모든 것이 커피하우스의 역할을 잘 알고 있던 스탈린의 작품이었다.

후마니타스 책다방처럼 출판사가 열린 문화공간을 만들려 했던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근처에 있는 ‘잔디와 소나무’는 출판사 ‘좋은생각’에서 운영하던 북카페였다. 좋은생각에서 발간한 신간을 보기 쉽게 서재에 진열해놓았을 뿐만 아니라 족욕을 즐기면서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많은 관심을 모았던 곳이다. 하지만 좋은생각은 최근 잔디와 소나무의 운영권을 다른 개인 사업자에게 넘겼다. 좋은생각 관계자는 “임대료 등 경영상의 문제 때문에 북카페 사업을 그만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경기도 파주에 있던 ‘한길사’의 북카페 ‘윌리엄 모리스’도 얼마 전 문을 닫았다. 한길사는 원래 북하우스라는 별도의 건물을 세워 그 안에 북카페 윌리엄 모리스와 이탈리아 식당 포레스타 등을 운영해왔다. 이 가운데 윌리엄 모리스는 더 이상 문을 열지 않는다. 곽명호 한길사 영업이사는 “북하우스 공간에 여유가 있다 보니 굳이 서점과 커피하우스를 한 공간에 넣기보다 분리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커피를 마실 사람은 포레스타에서 커피를 마시고, 책을 볼 사람은 역시 북하우스 안에 별도로 마련된 서점으로 가면 된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그래도 된다. 하지만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보고 싶은 사람이 찾을 수 있는 장소는 분명 사라졌다.

‘현암사’가 2005년 서울 아현동에 공들여 문을 연 북카페 ‘세상으로 열린 집’도 얼마 전 뜻하지 않게 문을 닫았다. 현암사는 2005년 당시 사옥을 증개축할 때부터 이미 저자와 독자가 만날 수 있는 사랑방으로서의 북카페를 꿈꿨다. 건축가 권문성씨는 이런 현암사의 요구를 수용해 자연과 어우러진 북카페, 세상으로 열린 집을 만들었다. 지붕에는 반투명 유리를 써서 해가 온종일 내부를 비추도록 했고 바닥과 계단에는 목재를 많이 썼다. 복도는 꽃길로 꾸몄다. 현암사는 세상으로 열린 집을 말 그대로 세상을 향해 열어놓았다. 누구든 원하는 사람은 세미나실과 북카페를 활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08년 현암사 사옥 부지가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되는 바람에 현암사는 서교동으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으로 열린 집의 운명도 거기서 끝이었다.

성공 조건, 남다른 커피맛·차별화한 접근

몇몇 북카페가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상업성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실 북카페는 훌륭한 사업 아이템이 아니다. 북카페의 특성상 술이나 음식을 판매하기 어렵고 한번 들어온 손님은 쉽게 빠져나가지 않으니 ‘테이블 회전’도 잘되지 않는다. 북카페를 찾는 손님의 대부분은 3~4시간 이상 머무는 경우가 많다. 쉽게 말해 점심 먹고 들어온 손님이 저녁 먹기 전까지 자리를 차지하는 사례도 부지기수다.

후마니타스 책다방에 앞서 카페의 사회적 기능을 고민했던 이신행 연세대 명예교수는 북카페의 성공 조건으로 두 가지를 강조했다. 하나는 남다른 커피맛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기반과 접근 방법부터 기존 카페와 차별화해야 한다는 조언이었다.

2000년대 초반 이화여대 공대 옆에 ‘체화당’이라는 이름의 북카페를 연 이 교수는 강단에 있을 때부터 줄곧 시민사회 운동의 방법론을 연구했다. 이를 위해 1990년대 중반 ‘신촌민회’라는 이름으로 신촌 지역의 자치조직을 꾸린 이 교수는 2002년부터 자신이 살던 집 1층과 지하를 신촌민회의 아지트, 카페 체화당으로 개조했다. 동티모르 공정무역 커피인 ‘피스커피’만을 취급하는 1층에는 카페와 서재 등을 만들어놓았고, 지하는 각종 세미나와 공연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었다. 카페에서 발생하는 모든 수익금은 이 교수가 2005년 체화당에 세운 풀뿌리사회지기학교 기금으로 쓰인다. 이 학교에서는 풀뿌리 사회운동을 이끌 ‘사회지기’를 키워내고 있다. 체화당이 곧 풀뿌리학교의 캠퍼스인 셈이다.

역사가 깊다 보니 벌써 성과가 나타났다. 풀뿌리학교를 거친 졸업생 가운데 등단 작가가 탄생했고, 외신기자도 나왔다. 체화당 간사 가운데 한 명은 1년 전 독립잡지 를 창간했다. 무엇보다 큰 성과는 체화당을 중심으로 다양한 논의와 토론이 이뤄지며 북카페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청년문화에 관심이 많은 이 교수는 공론장으로서의 북카페가 아직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모든 어젠다를 국가주의적 잣대로 재단하는 것은 대단히 졸렬한 생각입니다. 국가 수반이 커뮤니티를 형성할 수도 있지만, 청년들도 각 지역의 북카페를 중심으로 전 지구적 어젠다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거죠. 풀뿌리학교 등의 형태로 북카페가 동네와 마을의 정체성을 대변하고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각 지역에서 북카페를 중심으로 다양한 토론이 오가고 거기에서 공공성이 확보된다면 간디가 말한 것처럼 지역과 마을의 해방, 자기 자율성 획득도 가능하리라 봅니다.”

‘마을카페 네트워크’ 마련은 이 교수와 체화당이 최근 관심을 쏟고 있는 사업이다. 신촌의 체화당과 더불어 홍익대 앞 ‘노란코끼리’, 충무로 ‘얼티즌’ 등이 함께 참여하고 있는 마을카페 네트워크 사업은 2009년 12월 ‘지속 가능한 카페공동체’를 목표로 출범했다. 북카페답게 1차적인 목표는 북클럽 조직이다. 초기에는 카페별로 독서토론 그룹을 만든 뒤 점차 영역을 넓혀 지역 사회나 국가 전체의 이슈까지 두루 다루겠다는 생각인데, 아직 본격화 단계는 아니다. 이 교수는 “마을카페 네트워크에 가입하는 카페가 50여 개만 넘으면 스타벅스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체화당(왼쪽)을 연 이신행 연세대 명예교수. 한겨레 류우종 기자

체화당(왼쪽)을 연 이신행 연세대 명예교수. 한겨레 류우종 기자

비오는 날 천막 공연장의 커피맛처럼

“체화당 등 마을카페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북카페는 우선 커피로 스타벅스를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성공적인 북카페로 자리잡으려면 첫째는 커피 맛이고 둘째는 기반과 접근 방법입니다. 커피 체인점이 상업성과 편의성을 기반으로 한다면 다른 북카페는 다양한 주제별 토론과 강연을 통한 참여, 청년문화를 무기로 할 수 있어야죠. 예전에 비 오는 날 카페 앞마당에 천막을 쳐놓고 공연한 적이 있었어요. 그럴 때 마시는 커피 맛이 쉽게 잊혀질 수 있겠습니까.”

스타벅스 커피가 ‘그냥 커피’라면 다양한 기억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인 체화당 커피는 ‘T.O.P’라는 뜻이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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