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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선] 범죄자이기 전 환자를 위해

등록 2009-12-09 15:47 수정 2020-05-03 04:25
박광선씨.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박광선씨.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지난해 겨울, 대구 구치소의 한 수감자가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수감 환경 개선을 요구한 그의 단식은 열흘간 이어졌다. 의대를 갓 졸업하고 공중보건의로 대구구치소에서 일하기 시작한 박광선(29)씨는 고민에 잠겼다. 그에게 강제로 영양제를 투여해야 할까, 단식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할까. 아무리 찾아봐도 국내에는 그와 관련한 뚜렷한 기준이 없었다. 학교에서도 배운 적이 없없다.

절박한 심정으로 인터넷을 검색하던 중 그는 세계보건기구(WHO) 유럽 지역사무소 홈페이지에서 (이하 )을 발견했다. 2007년 5월 네덜란드에서 출간된 지침서는 이미 러시아어·중국어·알바니아어 등 총 12개 언어로 번역돼 여러 나라에서 활용되고 있었다. 자살·전염병·약물중독 등 구금시설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질병의 종류와 상황에 따른 지침은 상세했다.

단식투쟁에 나선 수감자에 대해 은 “의사는 수용자가 죽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고 안내하고 있었다. 박씨에게 이 문장은 ‘큰 울림’이었다.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그는 지침에 따라, 수용자가 단식투쟁을 하는 동안 강제 급식을 실시하지 않는 대신 몸 상태를 세심히 살폈다.

그는 이 지침을 구금시설에서 근무하는 동료 의사들에게 소개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구금시설 수용자들의 건강에 대한 고민을 나눠온 의사들도 이를 접했다. 20대 후반~30대 초·중반의 젊은 공중보건의 13명이 의기투합했다. 을 국내에 번역 출판하기로 했다. 지난 11월 말, 한국판이 마침내 발간됐다.

어려움도 많았다. WHO 유럽 지역사무소로부터 한국어판 번역권을 승인받는 과정이 오래 걸렸다. 민간이 번역권을 요구한 전례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국가의 경우 법무부 등 정부가 번역에 나섰다. 번역과 출판 과정에서 젊은 공중보건의사들은 법무부와 보건복지가족부에 예산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은 ‘감옥 인권 지침’이다. 지침은 “의료진은 어떤 형식으로도 사형 집행에 관여해서는 안 되며, 사형 집행 직전에 시행하는 검사를 해서도 안 되고 사망을 확인하거나 사망진단서를 발행해서도 안 된다”고 권한다. 또한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에 감연된 수용자에 대한 강제 검사나 강제 격리는 비윤리적이며 비효과적”이라고 말한다.

번역작업을 이끈 박씨는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HIV 감염자를 강제 격리 수용하고 있고 마약·알코올 중독 등에 관한 체계적 치료 시스템이 미비해 국제 기준에 비춰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영등포교도소에서 근무하고 있는 박씨는 현재 보건복지가족부 중앙배치기관 공중보건의사협의회 대표를 맡고 있다.

책 발간 직후인 지난 11월29일 공중보건의사협의회는 국가인권위원회와 함께 구금시설 내 수용자 건강권 보장을 위한 토론회를 열었다. 앞으로 젊은 공중보건의들은 ‘한국형 구금시설 건강권 보장을 위한 지침서’를 펴내는 것을 목표로 공동 작업을 해나갈 계획이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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