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vs 반이명박. 현재 정국 구도다. 블랙홀처럼, 이 대치 전선이 다른 모든 쟁점을 삼키고 있다. 그러나 물밑에서 새로운 논점이 꿈틀거리고 있다. 제3의 길 논쟁이다. ‘노무현 이후’를 도모하는 ‘반이명박’ 세력이 한 번은 넘어야 할 고개다. 조만간 치러야 할 작은 홍역이다.
지난 7월22일 오후, ‘진보의 미래 발간위원회’는 ‘사람 사는 세상’ 홈페이지(knowhow.or.kr)에 노무현 전 대통령 유고집 발간 계획을 공개했다<font color="#003366">(770호 줌인 ‘노무현이 남긴 진보의 미래’ 참조)</font>. 이와 함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긴 다섯 편의 원고 전문도 처음으로 일반에게 공개했다. 각각 올해 1월23일, 1월27일, 2월8일, 3월20일, 4월7일에 작성됐다. 200자 원고지 350장의 비교적 많은 분량이지만, 처음의 생각을 다듬고 발전시킨 것이어서 중첩되는 내용이 적지 않다. 그가 남긴 글을 살펴보면,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은 별로 없다. 대부분의 내용은 ‘진보 세력의 새로운 미래’에 대한 것이다.
기존 좌파를 ‘진보 원리주의’로 해석그 핵심은 한국형 제3의 길의 모색이다. 4월7일 작성한 메모에서 그는 “진보주의의 대안과 전략은… 진보 원리주의와 제3의 길로 갈린다”고 썼다. ‘진보 원리주의’라는 단어는 학계나 정계에선 쓰인 적이 없다. 기존 좌파를 지칭하기 위해 노 전 대통령이 고안한 개념으로 보인다. 같은 메모에는 “진보주의 정치 세력의 한계. 노동운동의 한계와 좌절. 역량의 한계와 역량을 초과하는 의식·이념의 과잉, 노동환경의 변화, 그리고 이기주의”라고 쓴 대목이 있다. ‘진보 원리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적 시선이 녹아 있다.
노 전 대통령의 관심은 진보 원리주의와 구분되는 “제3의 길, 또는 신중도주의, 중도 진보주의”에 쏠린다. 1월27일에 쓴 글에서 “대체적으로는 제3의 길이 대세인 것 같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참여정부에 대한 노 전 대통령의 자평이 드러난 대목이 있다.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는 진보의 정권이었는가? …제3의 길, 유럽의 진보주의 기준으로 평가해보자. 그래도 한계는 분명하다.” 3월20일에 쓴 이 글에서 노 전 대통령은 ‘제3의 길’을 잣대로 삼을 때조차 참여정부를 진보 정권으로 평가하기에 한계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퇴임 이후 그가 완성하려던 프로젝트의 핵심이 이 대목에 있다. 그는 참여정부의 한계를 넘어서는 한국형 제3의 길 노선을 정립하려 했던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이 정치적 민주주의라는 화두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면, 오는 10월로 예정된 유고집 발간은 경제적 민주주의, 특히 제3의 길에 대한 화두를 부활시킬 것으로 보인다. 제3의 길은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가 1998년에 주창하고, 영국 블레어 정부가 그 이념을 공식 표명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노선이다. 유럽의 기존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수정해 시장과 경쟁의 요소를 수용하려는 태도로 평가된다.
한국형 제3의 길을 정립하겠다는 노 전 대통령의 의지는 다섯 편의 메모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책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유고에서 제러미 리프킨의 , 폴 크루그먼의 , 로버트 라이시의 등을 읽었고, 여기에서 영감을 얻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세 권의 책 모두, 미국 또는 유럽형 제3의 길에 대한 모색을 담고 있다. 버클리대 교수이기도 한 로버트 라이시는 미국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냈다. 프린스턴대 교수인 폴 크루그먼은 미국 오바마 정부의 탄생에 적잖은 기여를 했다.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교수인 제러미 리프킨은 ‘미국 모델’보다 ‘유럽 모델’이 더 미래지향적이라고 판단한다.
서구 제3의 길 놓고도 학계·정치권 평가 갈려
학계에서 한국형 제3의 길 논의가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김대중 정부의 ‘생산적 복지’, 노무현 정부의 ‘사회통합적 시장경제’ 등의 지향이 서구식 제3의 길의 한국적 아류라고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좀더 들어가면, 의견이 분분하다. 참여정부의 공과에 대한 판단부터, 제3의 길 노선의 현실 적합성에 대한 의견까지 서로 갈린다. 노 전 대통령의 ‘유지’를 둘러싸고 장차 논쟁이 예상되는 이유다.
“예를 들어 제3의 길을 추구했다는 미국 클린턴 행정부나 영국 블레어 정부의 평가부터 논쟁거리다. 현재 세계 경제위기의 핵심은 금융위기인데, 두 정부 모두 세계경제의 금융화를 주도했다. 한국에서 제3의 길을 논하는 사람들은 이 대목에 둔감하다.” 이병천 강원대 교수의 말이다. 미국과 유럽이 택했던 제3의 길 자체가 회의의 대상이라는 이야기다.
그런 제3의 길조차 수용을 거부하는 민주당 우파의 문제도 있다. 민주당은 지난 5월 이른바 ‘뉴민주당 플랜’을 발표했다. 발표 직후 “강부자를 끌어안는 한나라당 2중대가 되겠다는 프로젝트”라는 비판을 안팎에서 들었다. 그런데 원래 작성된 초안은 조금 달랐다. 이 입수한 ‘뉴민주당 선언’ 초안을 보면, “새로운 진보, 유능한 진보, 합리적 진보, 자유진보주의” 등을 민주당의 새로운 비전으로 제시했다. 민주당의 당면 과제로 “진보 정치의 현대화”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민주당이 발표한 최종안에서는 ‘진보’라는 단어가 모조리 빠졌다. 대신 “공정한 분배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높였지만 성장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목소리가 작았다”고 자평하면서 “중도적 관점과 개혁적 지향”을 강조했다. 복지와 성장의 동반 조화보다 “민간 부문의 성장이 핵심 전략”이라고 밝혔다. 한국식 제3의 길을 표방한 초안보다 더 오른쪽으로 변질된 것이다.
서구의 제3의 길이 사실상 신자유주의를 자초했다고 평가하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입장까지 고려하면, 노 전 대통령이 던진 ‘한국형 제3의 길’ 화두는 여러 논란이 불가피하다. 때마침 이런 문제를 본격 거론하겠다고 벼르는 이들이 적지 않다. 김형기 경북대 교수는 제3의 길 논의를 이끌어온 학자로 평가되는데, “추모의 시기가 끝났으니, 이제부터는 참여정부의 공과를 제대로 논쟁해야 한다”고 밝혔다. 8월 중에 참여정부 인사 및 이에 비판적인 인사들을 두루 한자리에 모아 공개 토론회를 열겠다는 계획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font color="#1153A4">[한겨레21 관련기사]</font>▷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진보 정권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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