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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격대장 안상수의 이중플레이

비정규직 시행 유예안 협상 제안하면서 날치기 상정 유도… 힘 실어준 MB에 보은
등록 2009-07-09 17:04 수정 2020-05-03 04:25

한나라당이 7월1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환노위)에서 비정규직 보호법 시행 3년 유예안의 기습 상정을 시도했다. 안상수 원내대표가 취임한 뒤 국회에서 법안을 놓고 민주당과 벌인 첫 ‘전투’다. 표면적으론 안 원내대표가 이긴 것처럼 보인다. 그는 법안 상정 시도 뒤 비정규직 보호법의 시행을 1년6개월 유예하는 데 자유선진당·친박연대와 합의함으로써 민주당을 향한 압박 강도를 더욱 높였다. 하지만 내용을 따져보면 손에 쥔 것이 별로 없다. 민주당은 “이미 7월1일로 법이 시행된 마당에 유예는 말도 안 된다”며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시행 유예안 상정의 법적 효력도 논란거리다. 양쪽이 ‘강 대 강’ 대결 구도로 치달으면서 미디어법 협상도 더욱 어려운 국면에 놓였다.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6월30일 추미애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을 찾아가 비정규직 보호법 시행을 3년 유예하는 한나라당 개정안을 상정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추 위원장이 이 요구를 거부하자 안 원내대표는 크게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고, 다음날 한나라당 소속 환노위 간사인 조원진 의원은 유예안의 기습 상정을 시도했다. 사진 한겨레 김봉규 기자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6월30일 추미애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을 찾아가 비정규직 보호법 시행을 3년 유예하는 한나라당 개정안을 상정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추 위원장이 이 요구를 거부하자 안 원내대표는 크게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고, 다음날 한나라당 소속 환노위 간사인 조원진 의원은 유예안의 기습 상정을 시도했다. 사진 한겨레 김봉규 기자

사실 비정규직법 시행 유예안 상정 시도 과정은 치밀한 원내 전략 아래 결행된 일이라기보단, 한나라당 소속 환노위 간사인 조원진 의원이 벌인 해프닝에 가깝다. 조 의원은 “7월5일까지 처리되지 않으면 의원직을 사퇴하겠다”고 공언하는 등 비정규직 보호법 시행 유예에 ‘올인’하다시피 했다. 그런데도 추미애 환노위원장(민주당)이 “여야 합의안을 가져오라”는 말을 되풀이하자, 급기야 7월1일 오후 “위원장이 회의 진행을 거부했다”며 추 위원장 대신 한나라당의 시행 유예안을 상정해버렸다. 이날 오전엔 안상수 원내대표가 비정규직법을 논의하자며 한나라당과 민주당, 선진과창조의모임 등에 원내대표·정책위의장 6자회담을 정식 제안한 터였다. 조 의원에겐 “6자회담을 제안했는데 우리끼리 법안을 올리면 회담이 안 된다. 법안을 상정하지 말라”는 당부도 한 상황이었다.

개회 선언부터 법안 상정, 폐회 선언까지는 불과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법안을 날치기 상정한 뒤 조 의원은 안 원내대표를 찾아가 “지시를 어기고 그냥 상정해버렸다. 죄송하다. 저쪽이 6자회담도 거부해 그 방법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에 안 원내대표는 “이미 그렇게 된 걸 어떻게 하겠나”라고 답했다. 당 안에선 “조원진 의원이 ‘의원직 사퇴’라는 말을 이미 뱉었고, 추미애 위원장은 꿈쩍도 하지 않으니 별수가 있었겠느냐”는 ‘불가피론’이 나왔다.

지시 어기고 사고 친 간사에 “어쩌겠나”

문제는 초선인 조 의원이 안 원내대표의 당부에도 한나라당 단독으로 법안을 상정할 수 있었던 배경에 있다. 하루 전날인 6월30일 안 원내대표는 추미애 위원장을 찾아가 법안 상정을 요구했다. 김형오 국회의장이 한나라당의 ‘본회의 직권상정’ 계획에 난색을 드러내자, 명분을 만들어주려는 수순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당연히 추 위원장은 여야 합의가 먼저라며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안 원내대표는 “도대체 이런 위원장이 어디 있느냐. 실업 사태가 발생하면 위원장이 책임지라”고 격렬히 항의한 뒤 자리를 떴다. 잔뜩 격앙된 채로 그는 조원진 의원에게 “(내일도 추 위원장이 법안을 상정하지 않으면) 웬만하면 우리 의원들끼리 한번 시도해보라”고 지시했다. 다음날 6자회담을 제안하고, 조 의원에게도 다시 “상정 말라”고는 했지만, 이미 안 원내대표의 뜻이 시행 유예안 강행 쪽에 기울어져 있었다는 이야기다.

안 원내대표는 목표가 정해지면 좌고우면하지 않고 모든 방법을 동원해 달성하는 저돌적인 스타일로 유명하다. 2006년 9월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를 둘러싼 줄다리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한나라당은 ‘코드인사’와 임명 절차의 문제를 들어 전 후보자의 자진 사퇴 또는 임명 철회를 요구했다. 국회 법사위원장을 맡았던 안 원내대표는 “여야 간 의사 일정 합의가 안 됐다”며 인사청문 요청안 상정을 계속 거부했다. 인사청문 요청안의 국회 처리 시한 마지막 날엔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가야 한다”며 일방적으로 사회권을 한나라당 간사인 주성영 의원한테 넘긴 채 회의에 불참해 결국 청문회를 무산시켰다.

이명박 대통령은 안 원내대표의 이런 돌파력을 높이 샀다. 지난 5월 한나라당 원내대표 경선에서 박근혜계 ‘황우여-최경환’ 조로 쏠리던 판세를 뒤집은 것도 이 대통령이었다. 정두언·이춘식 의원 등 안국포럼 출신 의원들은 “대통령의 뜻”이라며 ‘안상수-김성조’ 조로 이명박계 표 결집을 시도했고, 결국 95 대 62로 이겼다. 이 대통령은 2007년 대선 땐 민주당의 ‘BBK 실소유주 의혹’ 공격을 막으려고 만든 ‘클린정치위원회’의 위원장을 안 원내대표에게 맡기려고도 했다. 당시에도 그가 원내대표를 맡고 있어 이 계획은 무산됐지만, 그만큼 이 대통령이 안 원내대표의 ‘돌격대장 스타일’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증명해준 것이다.

“웬만하면 우리끼리” 이미 강행 속내

안 원내대표 당선 뒤 한나라당이 ‘이명박 직할 체제’로 개편됐다는 평가가 나온 건 이 때문이었다. 이명박계 의원들은 “여당은 대통령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입법으로 뒷받침을 해야 하는데, 홍준표 원내대표는 민주당에 너무 끌려다니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안상수 원내대표는 강력한 추진력으로 대통령을 도울 것”이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비정규직 보호법 시행 유예안 상정 시도 과정을 되짚어보면, 이런 기대감이 정확히 반영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평소 ‘고용의 유연성’이 지론인 이 대통령은 “노동 유연성 문제는 연말까지 최우선으로 해결해야 할 국정 최대 과제”라고까지 표현하며 비정규직법 개정을 촉구했다. 대야 협상을 책임져야 하는 안 원내대표는 나서서 강경론을 펴지는 않았지만, 한나라당 소속 환노위원들이 법안 상정을 강행할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줬다. 법안 처리 실무를 맡은 조원진 의원은 ‘사고’를 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골칫거리 하나를 해결한 셈이 됐다.

안 원내대표는 이강래 민주당 원내대표와 만나기로 하는 등 비정규직법 협상을 완전히 중단한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한나라당 안에서도 김성태·현기환 의원 등은 “민주당의 주장대로 일단 시행부터 하고, 정규직 전환지원금 지급을 어떻게 할지부터 논의해보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안 원내대표는 “우리는 법 시행을 유예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최악의 경우엔 우리끼리(1년6개월 시행유예에 합의한 자유선진당·친박연대와 함께) 처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도 7월2일 “근본적인 것은 고용의 유연성이다. 국회가 적절한 기간을 연장하고, 그 기간에 근본적 해결책을 세워야 한다”고 못박았다. 이 때문에 민주당과의 거리를 좁힐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원내 전략도, 법안 처리 마스터플랜도 없어”

한편에선 이번 논란이, 자구 하나하나가 쟁점인 미디어법 협상을 더욱 험난하게 만들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민주당은 이미 문방위 소속 의원 8명이 “미디어법이 통과되면 의원직을 사퇴하겠다”고 밝히는 등 배수진을 친 상황이다. 이에 안 원내대표는 “이번 임시국회 때 반드시 미디어법을 처리한다는 건 국민 앞에 수십 번 한 약속이기 때문에 이젠 더 말하기도 싫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한나라당 안팎에선 비정규직법에 미디어법까지 한꺼번에 밀어붙일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전망이 점점 힘을 얻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당직자는 이렇게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습상정으로 비정규직법은 물론 미디어법까지 스스로 민주당과의 협상 여지를 좁혀버렸다. 너무 꼬였다. 하지만 뾰족한 원내 전략도, 법안 처리 마스터 플랜도보이지 않는다. 언제, 누가, 어떻게 이 꼬인 상황을 풀 수 있을지 답이 없어 갑갑하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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