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네팔 카트만두의 국제공항에 도착하자, 정.확.한. 한국어 발음으로 한 남자가 인사를 건네왔다. 한국인 가이드겠거니, 고개를 돌리자 그가 서 있었다. 구릿빛 피부에 짙은 쌍커풀이 진 커다란 눈, 네팔 사람 어눕 쿠마르 구룽(40). 외우기 힘든 이름 대신 그냥 김민수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어쩜 그렇게 한국말을 잘 하냐”는 인사치레에, “한국에서 6년 정도 일했다”는 말이 돌아왔다. 6년이란 말에, 프레스 기계에 손가락 3개를 잃었던 열아홉 네팔 여성 먼주 타파와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 철폐를 외치며 분신했던 소설 속 네팔 남자 카밀(박범신 )이 떠올랐다. ‘그에게도, 토끼몰이식 단속에 숨죽이던 밤이 있었겠지?’ 첫 만남의 서먹함을 깨려다가 되레 어색함만 더해졌다.
짧은 침묵을 먼저 깬 건 그였다. “김민수란 이름, 한국에서 일할 때 삼촌 같던 사장님이 붙여준 이름이에요. ‘어눕 쿠#$%…? 에이, 부르기 어려워. 그냥 민수해. 내가 김씨니까 너도 김씨하고.’ 이렇게 된 거죠.” 사장은 같이 일하던 다른 친구 둘에게도 김민철, 김민기란 이름을 붙여줬단다. 네팔인 김민기씨는 가수 김민기씨만큼 노래를 잘하느냔 누군가의 질문이, 대화의 불씨를 되살렸다. 노래 얘기가 나오자, 그의 한국말 실력은 대부분 노래방에서 쌓은 것이란 얘기로 이어졌다. 귀로 듣고 입으로 흥얼거리던 노랫말들이 노래방 화면에 떴고, 박자에 맞춰 글자색까지 변하니 한글 교재로 그만큼 좋은 게 없단다. 그의 18번곡은 박정운의 , 외국인들이 가장 쉽게 배우는 노래는 설운도의 라고 그는 귀띔해 줬다.
예상대로 그는 불법 체류 노동자였다. 그가 지나온 시간은 오롯이 1990년대 이후 한국, 그 자체였다. 그의 발끝엔 성장엔진을 돌리며 수많은 이주 노동자들을 불러들였던 1990년대 초반의 한국과,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시절 휘청이던 한국도 있었다. 그가 네팔 땅을 밟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조차, 미국발 금융위기에 경색된 한국의 그림자가 서려있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한국은 동남아시아 노동자들에게 ‘기회의 땅’으로 이름을 높이고 있었다. “한국 가면 돈 벌 기회가 널렸다.” 다녀온 이들이 전하는 말들은 그에게도 달콤한 유혹이었다. 대학까지 졸업했지만 일자리는 나질 않았다. 4남매의 장남으로서 영 위신이 서질 않던 터라 한국은 더욱 간절했다. 딱 한 번만 더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겠다는 결심으로 2천달러를 마련해 브로커를 찾아갔다. “취업하려고 그동안 타이핑과 컴퓨터, 영어 실력을 갈고 닦았다”는 그의 말에, “그런 건 다 필요 없다”고 브로커는 잘라 말했다. 스물네살 되던 해인 1992년, 그는 마침내 한국 땅을 밟았다. 15일짜리 관광비자. 입국 심사관은 “잠시 있다 갈 사람이 아닌 줄 뻔히 알면서도” 그를 무사 통과시켜줬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벌렁거리지만, 돌이켜보면 “(일손이 많이 부족했던) 그땐 다 그랬다.”
내복도 입지 않은 그에게 1월 찬바람이 부는 거리는 서럽도록 추웠다. 그는 네팔인 브로커에게서 한국인 브로커에게로, 또다시 서울 수유리의 한 봉제공장 사장의 손에 넘겨졌다. 고용 계약서는 물론 없었다. 여권은 뺏겼고, 돌아갈 비행기 삯을 임금에서 떼겠다고 했다. 공장으로 가던 길은 그야말로 “팔려가는” 길이었다.
제단 보조와 청소, 원단 나르기 같은 허드렛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 9시부터 밤 11시까지 하루 꼬박 일만 했지만, 일은 쉽사리 손에 붙질 없었다. 매번 욕부터 돌아왔다. “어이그, 바보” 소린 양반 축에 속했다. 그렇게 일하고 받은 첫 월급은 22만원이었다. 이후 경기도 구리로, 또 남양주로 옮겨 다니며 6년 동안 가구공장, 아파트 건설현장 등에서 일했지만, 가장 많이 받았을 때도 월급은 90만원을 넘지 않았다.
기독교 신자이던 한 사장은 힌두교, 이슬람교도들이 그득한 공장에서 하루 종일 알아들을 수도 없는 찬송가를 틀어대기도 했다. 한창 인기를 끌던 드라마 를 보려고 야근을 안 하겠다고 하는 민수씨 등에게, ‘볶음밥’을 당근책으로 내놨던 사장도 있다. 네팔의 고향집 밥과 그나마 조금 더 비슷한 볶음밥. 향수병을 자극해 늦은 시간까지 그들을 묶어뒀던 셈이다. 물론 야근 수당은 따로 없었다.
1993년 11월, 산업연수생제도가 시행된 뒤부터는 맘 놓고 돌아다니기도 쉽지 않았다. 갑자기 들이닥친 단속 반원들에게 동료들은 굴비처럼 줄줄이 엮여갔다. 뒷산에 올라 하루 종일 숨었다 나오면, 톱밥과 먼지로 뒤범벅된 옷을 입은 채로 고향에 보내진 동료들의 얘기들이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했다.
그러던 중 아파트 건설현장의 설비공사를 하는 김정복 사장을 만났다. 그에게 민수란 이름을 붙여준 그 사람. 그 무렵엔 일도 제법 손에 익어 “이제야 돈 좀 벌겠다” 싶었다. 하지만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한파가 닥쳤다. 한국 사람들도 일거리가 없어 공치기 십상이던 날들이 계속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맹장병까지 찾아왔다. 수술비로 250만원이 필요했다. ‘금의환향’할 작정으로 모아뒀던 110만원을 다 털어 넣고도, 140만원이 모자랐다. “이렇게 죽는 구나”싶었을 때, 이주노동자 단체와 동료들이 십시일반 병원비를 모아줬다. 김 사장 가족은 수술을 받은 그의 곁에서 밤새 병상을 지켜줬다. 퇴원 뒤, 갈 곳이 없어진 그에게 한 달 동안 공짜로 숙식을 제공했던 것도 그다. 자신도 일감이 떨어져 인력을 줄일 판이었다. “그 분은 저에게 사장이 아니라 신이에요, 신.”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몸은 나아졌지만, 경기는 좀체 풀릴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1998년 4월, 결국 고향으로 돌아갈 가방을 챙겼다. 6년 3개월, 모아둔 돈은 바닥났고 짐 가방엔 한국산 전기밥솥과 오디오 밖에 챙길 게 없었다. 하지만 떠나던 날엔 아쉬움의 눈물부터 앞섰다.
한 번 맺어진 인연은 네팔에서도 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그는 지금, 한국에서 일했던 동료들과 함께 ‘네팔-한국프렌드십 패밀리’란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한국으로 일하러 가는 ‘후배’들에게 한국말도 가르치고, 현지의 식습관, 문화 등을 알려주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몰라서 겪어야 했던 힘겨운 시행착오들을 피할 수 있게 돕자”는 취지다.
한국에서 찾아온 의료봉사단의 통역을 도와준 것이 계기가 돼, 2000년부터는 관광 가이드로 나서게 됐다. 2002~2003년엔 히말라야 트레킹이 인기를 얻으면서 한국인 관광객들이 제법 늘어났다. 매일 카트만두와 포카라, 불교성지 룸비니로 가는 이들이 줄을 이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욕먹는 처지였는데, (가이드니까)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내 말에 따라 움직이는 처지가 됐죠.(웃음)” 우스갯소리 하듯 말하는 그의 말이 아팠다. 하지만 시인 박노해씨와 소설가 박완서씨를 비롯한 수많은 문인들과 개그맨 박수홍씨 등 방송인, 의료봉사단 등 “한국에선 감히 만나보지도 못했을 사람들을 만났으니 출세했죠”라며 웃는 그의 말엔 가시가 없는 듯 했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휩쓸고 간 뒤 네팔을 찾는 한국인 관광객 수는 3분의 1 가량이나 줄었다고 한다. 공치는 날이 그만큼 늘어난 셈이다. 하지만 그는 한국부터 걱정한다. “한국이 정말 잘 됐으면 좋겠어요. 한국은 아직도 못 사는 많은 나라 노동자들에게 희망과 같은 나라거든요.”
카트만두(네팔)=글·사진 이정애 기자 한겨레 국제부 hongby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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