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위령제 개최 사실도 몰랐다”

등록 2008-06-13 00:00 수정 2020-05-03 04:25

북파공작원 유족회 하태준 회장 “우리 아버지 제사를 옆집 가족이 땅바닥에서 드리다니…”

▣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72시간 릴레이 국민행동’이 시작된 6월5일, 촛불문화제는 서울시청 앞 광장의 ‘테두리’에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난데없이 등장한 ‘북파공작 특수임무수행자회’(수행자회)의 ‘전사자 합동위령제’가 광장 한가운데서 열렸기 때문이다. 이들은 1972년까지 대북 특수임무에 투입됐다 희생된 7726명의 위패를 광장 바닥에 설치하고 위령제를 열었다. 이들은 촛불문화제에 참석한 이들과 잦은 말싸움을 벌였다.

취재 결과 수행자회는 애초 경기 판교 금토리 충혼탑에서 열려던 행사를 6월4일 서울시청 앞 광장으로 갑자기 변경했다. 또한 수행자회 대표들이 지난 6월4일 청와대로 초청돼 이명박 대통령을 만난 사실이 드러났다. 촛불문화제 저지를 위해 급조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부분이다. 수행자회의 일부 지부에서는 회원들에게 ‘촛불시위 반대집회’라고 통지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6월6일치 3면 보도).

은 위령제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유족들의 모임인 ‘HID 대한민국 특수임무수행자 유족동지회’(유족회)의 하태준 회장을 인터뷰했다. 뜻밖에도, 정작 희생자의 유족들은 위령제 개최 사실도 몰랐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유족회는 위령제를 의도적인 촛불집회 방해공작으로 생각한 시민들의 쏟아지는 항의와 욕설에 시달려야 했다.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라고 했다. 하태준 회장은 “서울시청 앞 위령제는 우리 아버지 제사를 옆집 가족이 땅바닥에서 지내는 격”이라며 “희생된 이들과 유족들을 두 번 모욕했다”고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이른바 HID로 불리는 북파공작원 관련 단체는 2곳이다. 육군 휘하의 ‘설악개발단’ 출신이 중심이 된 수행자회와 민간인 출신 북파공작원 희생자들의 가족 모임인 유족회가 있다. 이번 위령제는 수행자회가 주도했다.

수행자회가 시청광장 위령제에 설치한 위패의 주인공들은 누구인가?

=북파공작 희생자 8천여 명 중에서 99.8%를 차지하는 민간인 희생자들이다. 우리 유족들의 가족이다.

수행자회가 미리 유족회에 동의를 구했나?

=우리에게 동의를 구했으면, 그런 행사가 열리지도 못했다. 사전에 알았으면 우리가 막았다. 행사 자체가 급조된 것이다. 희생자들의 명예를 한 번 더 실추시킨 행위다.

수행자회에 법적인 책임을 물을 생각은 있나?

=이번에 국민의 질책을 확실히 들었다면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없을 것으로 본다. 법적으로 문제 삼을 생각까지는 없다. 우리 위령제를 당신들이 지내면 안 된다. 최소한의 도리로, 남의 위패를 쓰려면 구두상으로라도 동의를 얻고 협의 아래 진행해야지. 유가족 한 명 없는 위령제가 세상에 어디 있나. 내 아버지 제사를 옆집에서, 그것도 땅바닥에서 드리면 어떻게 용납할 수 있나.

이전에 유족회가 위령제를 드린 적이 있었나?

=유족회는 2006년 5월1일부로 보훈처 산하 사단법인이 됐다. 서울시청 앞에서 행사를 한 수행자회는 2008년 1월 사단법인으로 등록됐다. 사단법인으로 지정받기 전까지는 우리 북파공작원 희생자들은 민간인이라 현충원에 유해도 위패도 모시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의 항의와 노력으로 정부는 2005년부터 전사가 확인된 분들을 대상으로 전사통지를 해왔고, 우리는 이들의 위패를 현충원에 모시는 행사를 해마다 열어왔다. 위령제는 그런 의미가 있는 곳에서 해야 한다. 그런데 서울시청 앞 광장은 그럴 곳이 아니다. 뜻있는 시민들이 위령제에 함께할 수 있도록 명분 있는 장소에서 열어야 한다. 촛불집회로 사람들이 들끓는 장소에서 위령제를 지내면, 본심이 뭐든 (집회 방해로) 오해할 수 있다.

수행자회와 위령제를 함께 치러왔나?

=위령제는 우리 유족동지회가 해마다 해왔는데, 수행자회가 위령제를 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급조한 것이다. 시청 앞 광장의 위패를 봤나? (봤다) 베니어합판 쪼가리에 워드로 이름을 인쇄한 종이를 못질해서 위패라고 만들었다. 위패를 그런 식으로 만드는 사람이 어디 있냐. 그것은 죽은 자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유족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희생자들에 대한 예우를 갖춘 행위를 했어야 한다.

위령제 중단을 요구했나?

=공식적으로 중단 요구를 했고, 앞으로도 하지 못하도록 중단 요구를 할 것이다. 우리는 유가족의 입장에서 요구하는 것이다. 기자도 위패를 봤다고 하니까 하는 말인데, 그게 어찌 영혼을 달랠 수 있는 위패냐. 정말 희생자들을 모욕한 것이다. (촛불집회에 참석한) 많은 국민들이 위패를 향해 얼마나 욕을 했겠나.

6월5일부터 시청 앞 광장에서 위령제를 지낸다고 하니까, 유족회에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나도 항의 전화를 밤 12시30분까지 받았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우리 유족 대표들이 가서 수행자회에 항의하고, 일부 위패를 되찾아왔다. 그런 상황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니까 이번에는 위로와 사과 전화가 오기 시작하더라.

그간 북파공작원들의 진실이 완전히 가려져 있다가, 우리의 노력과 의 보도(269호 표지이야기 ‘북파공작원 실종·사망 7726명!’) 그리고 영화 등을 통해 그 진실이 알려지면서 우리의 명예가 일부 회복됐다. 그런데 국민들이 다시 오해를 하게 생겼다. 억울하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4월2일부터 한겨레 로그인만 지원됩니다 기존에 작성하신 소셜 댓글 삭제 및 계정 관련 궁금한 점이 있다면, 라이브리로 연락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