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양연수(59)씨가 고향인 전남 나주를 떠나 서울에 온 것은 1963년, 그의 나이 15살 때였다. 중학교를 채 마치지 못한 그에게 돌아올 마땅한 일자리는 없었다. 공부를 이어갈 꿈도 자연스레 꺾였다. 남대문시장에서 청계천 주변으로 옮아가며 이어온 44년의 노점상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의 인생에 전환점을 찍은 것은 1970년 정부의 ‘남대문시장 현대화 계획’ 발표였다. 남대문시장을 헐고 노점상 1천 명을 정리한다는 계획에 당사자인 노점상들은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성격 괄괄한 양씨는 동료 노점상 500명을 이끌고 중구청에 거세게 항의하며 싸웠다. 그의 인생에서 첫 시위였다. 처음으로 투옥된 것도 그때였다.
‘80년 광주’는 저항의 삶에 한층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고향 동네가 당하니 화도 나고, 책을 좀 읽다 보니” 세상 물정을 알게 돼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 없었단다. 노점상을 조직하고 ‘민주사회주의연맹’ 같은 운동단체 활동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986년엔 전국노점상연합(전노련)을 결성해 초대부터 4대까지 회장을 역임하고, 1989년엔 전국빈민연합 상임의장을 맡았다. 그 뒤로도 지금껏 줄곧 노점을 지키면서 노점상들의 생존권 싸움을 앞장서 이끌어왔다. 그러는 동안 그에겐 ‘여섯 번 투옥, 6년 넘는 감옥 생활’이란 훈장 아닌 훈장이 붙었다.
‘빈민운동의 역사’ 그 자체인 양씨의 계좌에 12월13일 5천만원이라는 거금이 입금됐다. 돈을 보낸 쪽은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 빈민운동을 비롯한 민주화운동에 줄기차게 나선 데 따른 보상이었다. 보상 소식을 미리 전해들은 양씨는 가족회의를 거쳐 노숙자 등 빈민들을 위한 가칭 ‘더불어 사는 집’ 재단에 내놓기로 일찌감치 결정했다. “보상금을 타려고 빈민운동을 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양씨는 말했다.
그가 설립준비위원장으로 있는 ‘더불어 사는 집’ 재단에는 이수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 김지예 전 민주노총 부위원장, 박형규 사단법인 광개토대제 기념사업회 사무총장 등이 이사로 참여하고 있다. 재단은 노숙인들을 모아 귀농 생산공동체를 꾸리는 것을 주요 사업으로 정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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