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 한센인 이행심 할머니의 사연 담아 전국 순회 중인 다큐멘터리 </font>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이행심(79) 할머니의 소록도 생활은 올해로 76년째다. 소록도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은 일제 지배가 안정기에 접어들던 ‘쇼와 9년’(1934) 10월의 일이다. 할머니의 고향은 강진으로, 한센인이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을 잡고 네 살 때 섬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는 식민지 조선의 몇 안 되는 엘리트 계층에 속했던 의사였다. 부모님이 왜 병에 걸렸는지 이제 와 알 도리는 없다.
나란히 누워 조근조근 뱉어낸 지난날
다큐멘터리 감독 박정숙(36)씨가 소록도를 처음 찾은 것은 2002년이었다. 고향이 순천인 박 감독은 여름휴가차 우연히 소록도를 찾았다. 섬에서 노인들의 한 많은 사연들을 보고 또 듣고서 언젠가 노인들의 사연을 화면에 담아볼 생각을 했다. 박 감독은 2003년께 섬을 다시 찾았고, 우연한 기회에 이 할머니의 사연을 듣게 됐다. 박 감독이 촬영 장비를 챙겨 섬으로 내려간 것은 2004년 3월의 일이다.
할머니를 설득해 카메라 앞에 앉히긴 했지만 촬영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한센인들은 상대에게 마음의 문을 열기까지 카메라 앞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할머니는 박 감독의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았고(그 때문에 대부분 쓸 수 없는 화면들이었다), 말끝마다 점잖게 존대말을 붙였다.
“불편하겠지만, 하룻밤 여기서 자고 갈래요?” 얘기를 풀어가던 할머니가 박 감독을 보며 말했다. “그게, 고민이 되더라고요. 임신 6개월이어서 육체적으로 힘든 때였거든요.” 할머니와 함께 저녁을 지어 먹고, 나란히 누워 조근조근 뱉어내는 지난 얘기들에 웃고 울며 하룻밤이 지났다. 이행심 할머니의 소록도 70년 생활을 담아낸 박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는 그렇게 탄생했다. 가수 이미자의 노래 는 할머니의 18번이다.
섬으로 들어온 할머니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보육소’였다. 한센병은 일반인들의 예상과 달리 유전되는 병이 아니다. 부모님은 소록도 ‘환자 지대’로 밀려가고, 환자가 아니었던 할머니는 ‘직원 지대’에 있던 보육소로 옮겨졌다. 부모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은 한 달에 한 번 있던 면회 시간뿐이었다.
병원에서는 수시로 아이들이 병에 걸렸는지 확인하려 들었다. 간단한 실험이 이어졌다. 솔잎으로 아이들의 팔을 찔러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면 보육소에 남았고, “아프지 않다”고 하면 부모의 품으로 돌려보내졌다. 철이 든 아이들은 엄마가 보고 싶어 “아프지 않다”며 고통을 참았다. 할머니도 손등이 빨갛게 부어오를 때까지 고통을 참은 끝에 어머니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열세 살 먹던 해 3월에 어머니가 숨졌고, 20일이 더 지나 아버지도 숨졌다. 일본이 저지른 전쟁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할머니는 아침이면 일어나 바다로 나가 바지락을 캤고, 학교에 가서 소나무를 찾아 송진을 따야 했다. 점심 때는 벽돌을 굽고, 흙을 퍼 나르고, 집에 돌아와 가마니를 짰다. 그는 “해방이 되고 강제 노동이 없어져 좀 편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와중에 어느새 할머니의 몸에도 나균이 침투해 육신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출산 금지로 닭장에 숨어서 아이 낳아
해방 이후 할머니의 삶은 달라졌을까. 고된 노동의 시간은 줄었지만, 세상의 편견은 여전했고, 어떤 면에서는 더 심해지기도 했다. 당시 병원에서는 한센인의 임신을 금지하고 있었다. 일반인들에게는 새로운 사실이겠지만, 소록도 의사들은 한센병이 유전이 아니라는 것과, 전염병이긴 하지만 전염력이 매우 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실험을 한다고 환자의 몸을 커다란 침으로 찔러 후유증으로 죽는 일도 있었다.
지금의 할아버지를 만난 것은 서른여섯 살 때였다. 6개월 동안 데이트를 하고 결혼했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974년의 일이다. 꿈속에서 까만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고 달이 굴러오는 것을 받아 치마 속에 숨겼다. 전임 조창원 원장은 임신할 자유를 줬지만, 새로 부임한 신 원장은 임신을 금했다. 섬에서 배를 타고 나오면 마주하고 있는 동네 녹동에 가서 천을 사 허리에 감았다. 낮에는 들과 바다로 일 나가서 숨고, 병원 직원들이 보이면 닭장 안에 숨었다. 그때 할머니는 병으로 왼쪽 다리가 없는 상태였다. 마흔에 겪는 노산이었다.
해산 날이 다가왔다. 할머니는 닭장에서 닭이 울면 같이 신음하고, 고통을 참았다가 다시 닭이 울면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산고를 겪은 끝에 아들을 낳았다. 1975년 겨울밤 12시10분이었다. 할머니는 혹시 병이 옮을까봐 젖을 먹이지 못했고, 아이의 입에 DDS(한센병 치료약) 한 조각을 쪼개 물렸다.
그러나 출산 사실을 끝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병원에서는 “아이를 남에게 주든지 퇴원을 하든지 하라”고 말했다. 광주에 살던 남편의 형이 아이를 떠맡았다. 그 집에 보낼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할머니와 남편은 새벽 4시에 일어나 바다로 나가 바지락을 캤다. 바지락이 가득 담긴 대야를 들고 펄을 지나던 할아버지는 한쪽 다리가 부러져 결국 잘라내야 했다. 할머니를 ‘작은엄마’라 부르던 아들은 지금도 가끔 부부를 만나러 섬을 찾는다.
한센인들의 지난 고통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한센인 피해사건의 진상규명 및 피해자 생활지원 등에 관한 법률’(이하 한센인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것은 지난 9월20일. 법은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서 한센인 격리 정책이 없어지는 1963년 2월8일까지 수용시설에 격리 수용돼 폭행, 부당한 감금, 동의 없는 단종수술을 겪은 사람들에게 의료 지원금을 지원하는 것을 뼈대로 하고 있다. 한센인들에게 얼마나 큰 의료지원금이 돌아가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기존에 의료지원금을 받고 있던 노인들은 새 법이 시행되면 지원금에서 그동안 받던 돈을 뺀 차액만 받을 수 있다. 한센인들의 인권을 위해 활동해온 조영선 변호사는 “법은 한센인들에 대한 국가의 직·간접적인 가해를 부인하고 있고, 피해 사건의 범위도 크게 축소해 실효성에 의문이 간다”고 말했다.
한센인 특별법 지원대상도 아니라니
할머니가 겪은 지난 고통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응답은 무엇일까. 할머니는 폭행당하지 않았고(당했다 해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부당하게 감금됐던 적은 없으며, 여자이기 때문에 동의 없는 단종수술을 당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할머니는 한센인 특별법의 의료지원 대상에서 제외될 것이다.
박 감독은 할머니의 사연이 담긴 영화를 들고 전국 순회 상영회를 열고 있다. 내년 3월에는 일본에도 간다. 한센인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한센인권연구회를 만들어 법 개정 운동을 펼쳐나가기로 했다. 할머니는 이제 나이가 들어 자주 아프고, 한 번 아프면 오래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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