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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율] 땅 파면 뭐가 나온다!

등록 2007-05-24 00:00 수정 2020-05-03 04:24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부업이 땅 파는 발굴입니까?” 콧수염 기른 설치작가 차기율(46)씨의 요즘 작업은 이런 의심(?)을 사기에 충분해 보인다. 작품 겸 작업장이 진짜 발굴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는 서울 통의동에 있는 40여 평짜리 옛 한옥집 건넌방 구들장에서 삽과 호미 들고 2월부터 혼자 발굴을 했다. 구들장 덮개돌을 걷어내고 피트(구덩이)를 낸 뒤 아궁이의 불기가 올라왔을 아래쪽 연도의 바닥을 파헤쳐보았다. 구한말부터 1970년대까지의 사발, 옹기, 유리 조각, 면도날, 닭뼈다귀 등이 호미에 걸렸다. 유물들을 고고 분류기준에 따라 정리하고, 구덩이 위에 실로 구획선을 쳤다. 구들장 발굴 현장은 고스란히 설치작품이 됐고, 발굴품들은 인근 갤러리 쿤스트독에 어엿한 현대미술품으로 놓였다.

5월18일 한옥과 쿤스트독 갤러리(02-722-8897)에서 시작한 그의 개인전 ‘도시시굴-삶의 고고학’전(27일까지)은 이런 얼개로 만들어졌다. 사실 차씨는 고고학 애호가다. 2000년 고고학, 예술의 교류를 위해 만든 ‘고고학포럼’ 창립회원이다. 영감이 막히면 연천 전곡리 선사유적, 부천 고강동 제사유적 등을 돌아다닌다. 나뭇조각 같은 유기적 재료들로 설치작업을 해온 그는 ‘미술에만 빠지지 않는 예술 인문주의자’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작업 공간을 고민하다 화랑 쪽 소개로 부근 재개발 지역의 허물어진 한옥과 70년 이상 된 바로 옆 여관 건물을 찾아냈어요. 국내외 작가 15명과 어울려서 서너 달 작업실로 썼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역사와 순환이 내 화두였는데, 이 낡은 한옥은 딱 걸맞는 영감 덩어리였어요.”

통의동은 옛 총독부 청사가 있던 경복궁 옆동네. 하급 관료와 내시들이 살았고 일제 때는 동양척식회사의 사택지 등이 있어 일인들도 많이 살았다. “역사적 부침이 잦은 동네에서 흘러간 옛 소시민의 삶, 그 시간의 역사를 실감하고 싶었어요. 궁리 끝에 직접 몸을 던지는 발굴을 택한 겁니다.”

작가는 신문지로 10번 이상 덧댄 한옥의 옛 벽지를 뜯어내면서 시간의 켜를 색다르게 확인한 것도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발굴한 건넌방과 자연 이끼를 깐 안방은 제 작품이지만 밤에는 고양이들의 놀이터, 화장실이 되지요. 한옥에서 뗀 격자형 유리 문짝들도 미끈한 사각형 조형물로 새로 태어났어요. 전시 그 자체가 순환인 셈입니다.”

차씨는 발굴 작업의 전 과정을 연구 보고서로 낼 예정이라면서 딴생각 하나도 슬쩍 털어놓았다. “남극 해양기지로 날아가 극한 환경과 영감을 결합시킨 설치작업을 할 겁니다. 작품하는데 국경, 날씨 따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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