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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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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마을의 마지막 여름

등록 2006-08-18 00:00 수정 2020-05-03 04:24

‘동남권 유통단지’ 조성 위해 강제철거된 비닐하우스촌 11가구… 떠나면 살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15평 구호 텐트로 내몰리다

▣ 글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대부분의 독자들이 눈여겨보지 않았겠지만, 지난 8월8일 주요 조간신문들은 ‘동남권 유통단지 공사 가시화’라는 기사를 톱으로 지역 수도권면을 도배했다. 기사는 “서울시가 동남권의 물류 거점으로 조성 중인 송파구 문정동 일대에 2008년 12월까지 15만4천 평 규모의 ‘동남권 유통단지’를 완공하는데, 이를 위해 SH공사와 용역업체 직원 220명이 투입돼 주택 20개 동의 행정대집행을 마쳤다”는 내용을 담담하게 전하고 있다.

완공된 유통단지에는 청계천 주변에서 옮겨오는 상인 6138명이 가·나·다 3개 블럭으로 나뉘어 입주하고, 물류시설 조성을 위한 민간자본도 유치된다.

그 신문 기사들이 보지 못한 것

별로 놀라울 것도 없는 건조한 행정 기사에서 설핏 피냄새를 맡게 된 것은 ‘행정대집행’이라는 다섯 음절로 구성된 단어에 눈길이 끌렸기 때문이다. 서울시 출입기자들이 매달 첫째와 셋째 월요일에 열리는 정례간부회의(8월7일은 첫째 월요일이었다) 자료를 그대로 베끼지 않았다면 ‘동남권 유통단지 순조로운 출발’과는 조금 다른 기사를 썼을 것이다. 기사에 담긴 ‘팩트’들은 잘게 파편화돼, 그날 있었던 장지마을의 비극을 전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행정대집행이 이뤄졌다는 것은 국가가 동남권 유통단지 예정 터에 들어서 있던 건물을 (강제로) 철거했다는 뜻이고, 그것이 ‘주택’이라는 것은 그 안에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뜻하며, SH공사는 그 사람들의 반발을 무력화하기 위해 철거용역 200명을 동원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김복수(71) 장지마을 부녀회장은 “용역들이 마을로 들어온 것은 8월3일 오전 7시30분이었다”고 말했다. 장지마을은 지하철 8호선 복정역 근처에 자리한 비닐하우스촌으로 1980년대 초부터 도심 빈민들이 몰려들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지난 2002년 한국도시연구소 조사 결과 53가구가 살고 있었지만, 동남권 유통단지 개발을 위한 SH공사의 철거 위협으로 주민은 2006년 8월 현재 11가구로 줄어들었다.

그날 아침, 평소 보상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자주 찾아오던 SH공사 직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놀란 주민들은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그는 “물을 마시러 왔다”고 답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마을은 이미 포클레인을 앞세운 철거용역 200명에게 완전히 포위된 뒤였다. 갑자기 들이친 용역들은 비닐하우스로 쳐들어가 주민들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김씨는 “서너 명이 노인 하나를 잡고 끌어내는데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옷가지도 건지지 못한 채 집 밖으로 밀려났다. 용역들은 옷가지는 자루에 넣고 전자제품은 끌어내 비닐을 씌워 근처 공터에 처박았다. 동원된 인력은 SH공사 직원 28명과 용역업체 직원 200명이었고, 철거된 건물은 주택 20동, 교회 1동, 컨테이너 1동이었다. 경찰관·소방관·한국전력 직원·서울시 상수도사업본부 직원들이 나와 철거 작업을 지켜봤다.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 이후 수없이 되풀이된 눈물 어린 호소에도, 2006년 8년 대한민국에서 강제철거라는 야만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8월7일, 주민들은 천주교 빈민사목위원회가 긴급 지원한 넓이 15평짜리 텐트를 쳐놓고 속수무책으로 쏟아지는 여름 뙤약볕을 피하고 있었다. 전화순(69)씨는 갈아입을 옷을 미처 챙기지 못해 며칠째 옷을 빨아 넌 뒤, 마르지 않은 옷을 다시 입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저녁에는 주민 20여 명이 한데 뒤엉켜 선잠을 자고, 아침이 되면 각자 일터로 흩어진다.

주소찾기 소송은 승리했건만…

장지마을은 얼핏 보기에 서울 강남 주변에 산재한 30여 개의 비닐하우스촌 가운데 하나로 보이지만, 2001년 한국 빈민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주소찾기 소송을 승리로 이끈 곳이다. 싸움이 시작된 것은 1999년 1월19일 새벽 2시 문정2동에 위치한 화훼마을(장지동 610 일대)에서 터진 화재 사건 때문이다. 이 화재로 비닐하우스 117동이 완전히 불에 타 사라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소화전과 수돗물 등 기초적인 생활시설 설치조차 거부당하는 무허가 비닐하우스촌의 인권 문제가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고, 도하 신문들은 앞다퉈 비닐하우스 문제를 특집으로 다루는 기획 기사들을 쏟아낸다. 그러나 주민들이 식수로 쓰는 지하수가 심각하게 오염됐다는 보도(2004년 5월29일치 1면) 이후에도 수돗물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유는 간단했다. 공무원들의 눈에 주민들이 사는 비닐하우스촌은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니었다. 그곳은 행정권력이 인정하지 않는 ‘무허가’ 건물이 들어선 허허벌판이었다. 공무원들은 “수돗물을 넣어달라”는 외침을 거부했고, “우리도 수급권자로 인정해달라”는 요구에는 “주민등록 전입신고를 받아줄 수 없다”며 차갑게 돌아섰다. 이에 따라 강동·송파시민단체협의회(현 위례시민연대)와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등은 2000년 8월9일 서울행정법원에 ‘주민등록 전입신고 거부처분 취소’ 소송을 냈고, 2001년 1월과 6월에 각각 열린 1심과 2심에서 잇따라 승소했다. 대법원 패소를 예상한 송파구는 상고를 포기했다(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으면, 비슷한 싸움을 벌이는 다른 지자체도 판결에 구속된다). 여전히 ‘주민등록 등재’를 목표로 투쟁 중인 다른 지역과 달리 장지마을 주민들은 주민세를 내는 어엿한 송파구 주민이다.

SH공사는 “무허가 비닐하우스지만 주민등록이 등재돼 공공임대 아파트를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송파구에는 당장 들어가 살 수 있는 공공아파트가 없어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져야 한다. 한 가구당 1천만원 정도 하는 보증금도 부담이다. SH공사 관계자는 “주민들 사정은 딱하지만, 무리한 요구에 끌려다니다 공사 일정에 차질을 줄 순 없다”고 말했다.

뙤악볕 아래서 “공공아파트를 달라”

철거 이후 김난원(72)씨네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는 송파구 가락시장에서 20년 가까이 생선 장사를 해왔다. 1월부터 철거 위협에 시달리다 장사를 접었고, 지금은 벌이가 없다. 같이 살던 두 아들 가운데 한 명은 고시원에 입주했고, 다른 한 명은 회사에서 숙식을 해결한다. 그는 “생선은 여름에 잘 썩어 한 달 벌이를 예측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봉자(59·가명)씨는 가락시장에서 경매에서 떨어진 채소를 주워다 노점에서 판다. 운이 좋으면 하루에 3만원도 벌지만 공칠 때도 있다. 그는 “새벽 4시까지 시장에 나가야 하기 때문에 이곳을 벗어나면 살 수 없다”고 말했다. 가락시장에 기대 사는 주민들은 “송파구에 있는 공공아파트를 달라”고 외쳤다. 장지마을 11가구의 마지막 안식처가 된 구호 텐트 위로 8월 여름 뙤약볕이 무심하게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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