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평택에서, 영국인 단 존스(66)는 바쁜 몸놀림으로 작품을 완성해가고 있었다. 그는 “앞으로 두 시간밖에 안 남았다”고 웃으며 붓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캔버스는 주민들이 버리고 떠난 대추리 빈집의 한쪽 구석이다. 그림을 보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걸어가는 미군 병사의 발 아래 짓눌린 대추리는 서서히 죽음의 땅으로 변하고 있다. “그림 왼쪽에 탱크와 망루들을 더 그려넣을 예정입니다. 아직 파괴되지 않은 오른쪽에는 주민들의 웃는 얼굴과 집들을 그려야 하고요.”
단 존스는 국제인권단체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의 인권교육위원(education officer for Amnesty International)이다. 그는 성공회대 인권평화센터의 초청으로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사들에게 인권교육 방법론을 강의하기 위해 지난 8월3일 한국을 찾았다. 김정아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는 “그는 인권이 짓밟히는 곳을 찾아 이에 저항하는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뭐라고 말하면 정확할까요. 영국판 걸개그림이라고 하면 와 닿을까요?” 오두희 평화바람 활동가가 덧붙였다. 인권운동사랑방 쪽에서 한국을 찾은 존스에게 대추리를 평화촌으로 만드는 프로젝트에 참여해달라고 부탁했고, 존스는 이에 흔쾌히 응했다. 그는 앰네스티 활동가가 아닌 한 사람의 예술인(artist)으로 대추리를 찾았다고 했다.
그는 “대추리의 비극을 언제 처음 접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아마 1~2년 전쯤이었을 겁니다. 평소 알고 있던 한국 친구를 통해 들었죠.” 존스는 영국 등 유럽 사회에서는 대추리의 비극이 평화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하는 단계라고 말했다. “미국의 군사주의에 저항하는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철조망에 둘러싸인 논밭과 주민들의 끈질긴 삶의 모습이 눈물겹네요.”
존스가 한국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987년이다. 그는 “최루탄과 진압 경찰이 난무하던 시절 한국을 처음 찾았다”고 말했다. 이후 광주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고, 그동안 5~6차례 한국을 더 찾게 됐다. 존스는 “빨리 그림을 끝내야 한다”며 허름한 시골 벽지 앞에서 다시 붓질을 시작했다. 1987년과 2006년, 그 20년 동안 한국 사회는 얼마나 변해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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