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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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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 못해 터진 군내 성폭력

등록 2001-02-21 00:00 수정 2020-05-03 04:21

‘이 중위 사건’ 계기로 다양한 사례 접수… 감추기 급급한 국방부에 뭘 기대해야 하나

“1990년대 전체를 군대의 성폭력 문제와 싸우는 데 쓴 것 같다.”

미국 해군학교 교수이자 여성장교인 조지아 샐더가 미군을 두고 한 말이다. 미군 안에서 성폭력 문제가 노출되기 시작한 것은 1991년 ‘태일 훅 사건’을 통해서였다. 해군장교들이 집단적으로 여성장교들과 여성시민들을 성추행한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고위관계자들이 해임됐고 광범위한 조사가 이뤄졌다. 여군들이 입을 열기 시작하면서 비슷한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장군님, 따님을 생각하세요”

최근 불거진 ‘이 중위 사건’은 우리 군에서도 성폭력 문제가 드디어 곪아터지기 시작했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사건의 요지는 육군 0사단장인 김아무개 소장이 부하인 이아무개 중위를 여러 번 성추행했다는 것. 김 소장이 1999년 12월 회식 때 술을 따르는 이 중위의 엉덩이를 만졌고 회식이 끝난 뒤 따로 불러 입을 맞추려고 했으며 그뒤로도 여러 번 집무실·공관에서 억지로 입을 맞췄다는 게 이 중위쪽 주장이다.

육군은 2월8일 이 중위 주장의 신빙성을 인정해 김 소장을 보직해임시키고 정직 3개월의 징계를 내렸다. 김 소장은 이에 불복해 국방부에 항고했고, 이 중위 주장에 대해서는 “절대로 사실이 아니며 피해자는 오히려 자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재미 여성학자 권인숙씨는 이 사건을 두고 “성폭력 사건이 별로 불거지지 않았던 군대라는 조직의 여성 문제가 이제 사회에 표출되기 시작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긴장감이 먼저 들었다”고 전제한 뒤 “(그 긴장감은) 들춰보면 너무 겉잡을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느낌’이 너무 정확했던 것일까. 사건이 여론을 타면서 지금까지 베일에 싸여 있던 군내 성폭력 문제가 서서히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2월8일 문을 연 한국성폭력상담소(소장 최영애) 사이트(www.sisters.or.kr)의 ‘군대 내 성폭력을 말한다’의 토론방은 연일 시끌시끌하다. 특히 ‘사건 이면의 진실’을 알리는 이 중위 어머니의 호소문이 오른 뒤 현역과 예비역 여군들이 잇따라 ‘심중 고백’을 토해내고 있다.

“제가 군에 처음 들어왔을 때 여군 선배들이 소위였던 저를 데리고 장군이 주관하는 회식에 참석했습니다. 그 장군은 신문지상에도 오르내린 예비역으로 군에서는 신망과 존경을 받아왔던 분입니다. 그러나 애정어린 술잔을 주시며 격려해주신 것까지는 좋은데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저와 선배를 양팔에 안고 볼을 부비며 제 티셔츠 사이에 10만원짜리 수표를 넣어주시더라구요.… 반발하거나 피할 수 없는 그런 분위기였다고 변명하고 싶습니다. 나중에 생각하니 참 기분이 더럽더군요. 저 또한 스스로 한심했고요. 그런 일들이 얼마나 비일비재했는지는 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현역 여군대위)

“소위 때 일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난 그때 여군 하사들과 생활했다. 하루는 인접 중대장이 얼굴이 뻘개져서 사무실로 들어왔다. 중대원 중 한명이 기막힌 일을 당했단다. 글쎄 백주대낮에 사무실에서 상관으로 모시는 장군이 이 하사의 손목을 끌고 사무실 안에 따로 준비돼 있는 침상이 있는 내실로 끌고 들어가더란다. 차를 가지고 들어갔던 이 하사는 멋도 모르고 들어갔다가 이 장군이 가슴을 더듬고 입술을 훔치는 통에 놀라서 찻잔을 내던지고 사무실을 뛰쳐나왔단다. 중대장은 대대장과 함께 장군의 상관인 소장을 만났다. 소장이 하는 말.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 이해해라. 다시는 그런 일 없도록 하마….’ 결국 그 하사만 보직이 바뀌고 없던 일이 됐다.”(현역3)

파면 팔수록 더 나올 것

“초임 하사 시절 여군 상관의 당번을 지냈는데 그곳을 자주 찾던 장군과 상관 등 3명이 강남의 일식집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양주 2병을 비웠고 2차로 룸살롱을 갔다. 또 엄청난 술을 마셨다. 장군이 돈을 지불하라며 지갑을 여군 상관에게 주자 여군 상관이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장군이 문을 걸어 잠그고 내게 다가와 손과 입으로 접촉을 시도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고 ‘장군님 따님을 생각하십시오’라고 얘기하면서 그 자리를 간신히 모면했다. 정신없이 거리를 방황하다 부대로 복귀했다.… 근무 시절 나뿐 아니라 다른 여군 장교·하사관들이 여러 번 장군들의 또는 여군 상관의 이해관계가 얽힌 남자들 회식자리에 끌려 나가는 것을 보았고 우리는 그곳에 끌려나가는 이들을 ‘기쁨조’라 일컫기도 했다.”(예비역 하사)

여군들의 기막힌 사연에 동조하는 남성들의 목소리도 간간이 들리고 있다. 한 예비역 병장은 현역 시절 겪었던 일을 증언했다. “우리 사단은 회식이 많은 사단이었습니다. IMF라고 영외회식을 영내회식으로 바꾼 것은 좋았는데…. 회식숫자는 줄어들 줄 모르더군요. 어느 회식에서였습니다. 식사하고, 술 마시고…. 그러다가 나중에 노래방 기계 돌리고… 춤추고 그러는데… 사단장이 참모들 부인들과 돌아가면서 어설픈 블루스를 췄죠. 거의 춤이 목적이 아니라 신체접촉이 목적이었죠. 사단장 자신이 증언이라도 하듯 춤추다가 들어와서 이런 말도 했답니다. ‘거 00 참모 마누라가 젤 가슴이 빵빵하더구만…. 젖꼭지가 막 찌르던데… 하하’ (참 어이없죠?) 그러다가 또 춤을 추는데 옆에 지켜보는 참모들은 사단장 춤추는 거 옆에서 박수나 쳐대고 있었죠. 자기 부인한테 뭔 짓이냐고 그러면 괜히 찍히고 나중에 진급에 나쁜 영향이 될 테니까요.”

여군 하사관이 되려고 준비하던 한 고3 여고생은 어처구니 없는 사례들을 접하고 나서 충격을 받았는지 “여군에 가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고민을 적고 있다.

상담소쪽은 현재 비공개 제보도 받고 있다. 여군이 워낙 소수여서 겪은 사례를 폭로하는 순간 누가 올렸는지를 추적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영애 소장은 “지금까지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며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심각한 사례들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이 중위처럼 모든 것을 버릴 각오를 하지 않고는 피해사례를 공개적으로 밝히기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여군들과 여성운동계는 이 중위 사건이 앞으로 계속될 군내 성폭력 문제 해결의 시금석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때문에 이들은 국방당국이 김 소장에 대해 정직 3개월과 같은 가벼운 징계가 아닌 ‘파면’ 등 중징계를 내리는 동시에 재발방지를 위한 장기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와 함께 △이 중위가 김 소장에 대한 고소를 취소하는 과정에서 군 고위관계자가 개입했는지 △김 소장이 육군 징계위원회가 열리기 전 이 중위 부모에게 현금 1천만원이 든 굴비상자를 보냈는지 △김 소장이 이 중위를 비방하는 유인물 작성·배포 과정과 관련이 있는지 여부 등 당사자들 사이에 의견이 팽팽히 맞서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전면적인 재조사가 이뤄져야 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국방부 ‘함구령’이 문제 키운다

한 현역 여군은 “김 소장은 보직해임 조처를 받은 이후에도 구명운동을 벌인다는 핑계로 이 중위를 무능하고 행실이 나쁘다는 식으로 매도하며 사건의 원인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파렴치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며 “이는 절대권력을 가진 장성이라는 계급을 이용해 성폭력 피해자를 두번 죽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이 국방부에 의해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별로 없어보인다. 최근 이 입수한 이 사건 관련 문건들을 보면 국방당국은 근본적인 문제해결 방식보다는 미봉책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듯하다.

사건이 언론에 알려지며 물의를 빚자 국방당국이 작성해 일선에 내려보낸 첫 문서는 엉뚱하게도 ‘언론접촉 보도절차 준수’(2001년 1월19일치)였다. 문서는 “한 영관급 장교가 기자와 만나 이야기한 내용이 보도돼 당사자는 물론 군의 명예가 실추됐다”며 “언론과 접촉을 삼가고 불가피한 접촉이 있을 경우 해당부서장에게 보고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또 “친분관계가 있는 기자와 사적인 대화중에 나오는 사실도 보도기사의 소재가 될 수 있으며 그 소재가 부정적일 때는 기자와의 친분관계가 기사의 방향에 크게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기자접촉 요령’이라는 별지까지 붙여 안내하고 있다.

‘성적 군기문란 사고방지 대책강구 특별 강조지시’(2001년 1월26일치)라는 제목의 두 번째 문건은 나름대로 재발방지 대책에 고심한 흔적이 엿보인다. 문서는 사전예방책의 종류로 △특별 정신교육 △여군 고충처리와 근무여건 보장 △남녀 단독근무·단독잔류 방지 △회식 때 서열을 무시한 좌석배치 지양 △음란물 색출·차단활동 등을 들었다.

그러나 이 문서 역시 군인복무규율을 강조하며 더이상 이 문제가 외부에서 거론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를 보였다. “군인이 국방 및 군사에 관한 사항을 군외부에 발표하거나, 군을 대표하여 또는 군인의 신분으로 대외활동을 하고자 할 때는 국방부장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대목이 그것이다. 사실상의 ‘함구령’인 셈이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한 여성장교가 언론과 인터뷰를 한 뒤 곧바로 징계받은 일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군내 성폭력 문제가 그렇게 심각하다면 왜 여성장교들이나 하사관들은 들고 일어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질문이 돼버린다.

변변한 전문가 한 명도 없이…

국방당국이 지닌 더욱 큰 문제는 군내 성폭력 문제에 대해 그야말로 무지하다는 사실이다. 한 현역 여군은 “김 소장의 행동보다 이 중위가 더욱 힘들어한 것은 주변 사람들의 냉랭한 반응과 철저한 무관심이었다”며 “군에는 성폭력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전문가가 없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논의조차 제대로 되지 못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성폭력 피해자가 가지는 첫 번째 증상이 대인기피증이라는 상식조차 모르는 이들이 어떻게 제대로 된 카운슬링을 할 수 있느냐”며 “사회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군내 성폭력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대한민국 군대가 21세기 초에, 미국이 20세기 말에 그랬던 것과 똑같이 군내 성폭력 문제에 휩싸이지 않으려면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이 제대로 짜여져야 한다. 안전망 구축의 실질적인 책임을 진 국방당국은 이 중위가 육군 징계위원회에서 했다는 다음과 같은 말을 기억해야 할지도 모른다. “위원님들, 30년 썩은 별 하나 아까워하지 마시고 전후방에서 피어나는 어린 새싹 같은 젊은 장교들을 보아주십시오.”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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