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통일문화재단이 지원하는 평양 고등교육도서 인쇄공장 방문기… 인쇄된 재생지 일일이 접고 바느질 제본… “교육은 지원사업 1순위”
▣ 평양=글·사진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북쪽 어린이들을 위한 학습장(공책) 공장 지원사업을 벌이고 있는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이하 통일문화재단) 대표단을 따라 4월18일 북녘땅을 밟았다. 봄이 절정에 이른 평양은 온통 꽃천지였다. 마중을 나온 북쪽 민족화해협의회 일꾼들의 안내를 받아 평양항공역(순안공항)을 빠져나와 시내로 들어서자, 이내 꽃길이 그림처럼 펼쳐지기 시작했다. 가로수로 심어놓은 살구나무 가지마다 화사하게 만발한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어제는 눈까지 왔다”는 민화협 관계자의 말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햇살은 따스했다. ‘잿빛’을 예감했던 북녘땅 평양에서 남녘땅 서울 여의도 윤중로의 벚꽃을 도처에서 느낄 수 있었다.
영어사전을 접는 노동자들
이튿날 오후 가랑비가 날리는 평양 시내를 거쳐 대동강 구역 주택가 한가운데 자리한 평양 고등교육도서 인쇄공장을 찾았다. 지난 1979년 설립돼 300여 명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는 이 공장은 김일성종합대학을 비롯한 북쪽 전역의 대학과 중·소학교 교과서와 어린이용 동화책, 사전류 등을 생산하는 평양의 대표적 인쇄공장 가운데 하나다. 한겨레 통일문화재단은 이곳에서 북쪽 어린 학생들을 위한 학습장을 생산할 계획이다.
“학습장 지원사업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공부하는 북녘 어린이들에게 최소한의 학습 여건을 마련해주기 위한 것입니다.” 김보근 한겨레 통일문화재단 사무총장은 “학습장 공장 설립은 단순히 윤전설비와 종이를 지원해주는 사업이 아니라, 남북 교육교류의 현황을 점검하고 남쪽 어린이들에게도 산 통일교육이 되도록 할 것”이라며 “미래 통일 한반도의 주역이 될 북녘 어린이들에게 남녘 동포와 어린이들의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것이야말로 한반도의 평화로운 미래를 기약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육중한 철문을 열고 공장 안으로 들어서니 미리 연락을 받고 나와 있던 북쪽 관계자들이 반가운 악수를 건넨다. 칠이 벗겨진 4층 건물 전면에 내걸린 “자력갱생만이 살길이다”라는 붉은색 구호가 처연하다. 기사장 백종삼씨 등 북쪽 인사들의 안내에 따라 공장 안으로 들어섰다. 한창 바삐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지만, 놀리고 있는 기계가 더 많았다. 한켠 인쇄기에선 한눈에도 재생지임이 분명해 보이는 누렇게 빛이 바랜 두툼한 종이를 쏟아내고 있었다. 인쇄돼 나온 내용을 살펴보니 중학교 수준의 수학 문제가 가득하다. “수학 시험지냐”고 묻자 북쪽 노동자는 “교과서”라고 짧게 대답한다.
한 귀퉁이에선 40대 여성 노동자들이 둘러앉아 쉼없이 손을 놀리고 있었다. 역시 재생지로 보이는 빛 바랜 종이를 접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인쇄된 내용을 들여다보니 영어사전이었다. 인쇄돼 나온 사전을 한장 한장 일일이 손으로 접고 있었다. 이렇게 수작업으로 하루 3천 장 정도를 접는데, 이를 모아 제본을 하면 각급 학교로 보낼 사전이 완성된다는 게 현장 노동자의 설명이다.
스테이플러 없어 바느질로
작업장 곁에 딸린 창고로 자리를 옮겼다. 여러 가지 인쇄용지가 종류별로 분류된 채 쌓여 있었다. 대부분은 누렇게 빛이 바랬거나 검은빛을 띠고 있었고, 손으로 만져보니 표면은 거칠고 두께는 두툼했다. 모두 재생용지였다. 그나마 확보해놓은 용지도 그리 많지 않아 보여, 만성적인 종이 부족에 허덕이고 있다는 북쪽의 현실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계단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역시 조명을 켜지 않아 어두침침한 작업장에선 젊은 일꾼들이 둘러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작업대 한켠에는 컬러로 인쇄된 종이가, 다른 한켠에는 수북이 쌓인 실이 놓여 있었다. 실과 바늘로 그들이 한땀 한땀 뜨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동화책이었다. 중철(스테이플러) 제본기가 없다 보니, 두께가 얇은 동화책을 묶기 위해 ‘바느질 제본’까지 등장한 것이다.
반대편 한켠에선 제본작업까지 마친 완성된 중학생용 영어 교과서 검수작업이 한창이다. 책 표지를 보니 북쪽에서 수재들만 다니는 곳으로 이름난 ‘평양 제1중학교 4학년용 영어 교과서’였다. 책 내용을 살필 새도 없이 책 중간중간을 잡아 북북 찢어내는 작업반원의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왜 책을 찢고 있느냐”고 묻자 한 북쪽 관계자는 “잘못 인쇄된 부분을 찢어내고 제대로 인쇄된 부분을 붙여넣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학습장 생산을 위해 북쪽은 공장 부지를 제공하는 한편 생산인력 조달과 학습장 생산과 생산된 학습장 분배 등을 맡기로 했고, 우리 쪽은 생산설비와 원료를 제공하고, 공장 건물 기초 보수자재 지원과 생산설비 설치 및 생산에 관한 기술 이전을 약속했다. 인쇄공장 시설이 워낙 낙후하다 보니 생산설비만 제공해선 학습장 생산이 제대로 이뤄지기 어렵다. 이 때문에 통일문화재단은 인쇄기계 및 용지와 제본·절단기 등 생산설비 외에 시설 보수작업도 검토하고 있다. 동행한 김경남 한국엔지니어링 대표이사는 “대부분의 설비가 70년대 중반에 도입된 것으로 보이며, 제본을 비롯한 상당수 공정이 수작업으로 이뤄지고 있다”며 “인쇄설비 등 모든 면에서 어떻게 수많은 교과서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낙후된 상태”라고 말했다.
3월까지 400만 명에게 학습장 1권씩
이날 학습장 공장 견학은 북쪽의 이례적인 ‘배려’ 속에 2시간이 넘도록 이어졌다. 박진원 통일문화재단 기획위원은 “공장 내부를 이 정도로 속속들이 보여준 것은 전례가 없는 일로, 그만큼 북쪽이 절박하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갈수록 벌어지는 남북의 격차는 교육 분야에서도 예외일 수 없다. 전문가들은 “향후 남북 경제공동체 건설에 앞서 고급 노동인력 창출을 위해서라도 북쪽 교육이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며 “대북 투자 및 지원의 제1순위는 당연히 교육 분야가 돼야 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학습장 공장 지원사업이 별 탈 없이 마무리된다면, 내년 3월 새 학년이 시작될 무렵 북쪽 소학교(약 150만 명)와 중학교(약 250만 명)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남녘 동포의 온기가 담긴 학습장 1권씩을 전해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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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지가 누구나요? 동진 누구 열심히 찾나요?”
“누구긴 누구야요. 그 동문 나와 친한 백조 눈동자야요.”
“그나요? 나 몰라시요. 정말 미안. ㅎㅎ”
4월20일 오전 평양 시내 중심가 인민대학습당에서 뜻밖의 장면을 목격했다. 북한이 자랑하는 최고의 공공도서관이자 평생교육원인 그곳 컴퓨터실에서 한 젊은이가 채팅에 열중하고 있었다. 웃음을 뜻하는 ‘ㅎㅎ’은 남이나 북이나 한결같이 사용하고 있었다.
조용히 다가가 “뭐하고 있느냐”고 말을 건네자 적잖이 당황한 듯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얼굴을 붉힌다. 대화 참가자는 모두 9명. 대화 주최자는 ‘타임이즈…’라는 아이디를 쓴 북쪽 누리꾼이다. 모니터 왼쪽 하단을 보니 ‘윈도98’을 사용하고 있음이 분명했고, 북쪽 정부 공식 사이트인 ‘내나라’와 ‘인민대학습당’ 홈페이지, ‘일반대화실’ 등 3개의 창이 떠 있다. ‘어색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하릴없이 앉아 있는 그에게 어렵사리 다시 말을 걸었다.
“누구랑 그렇게 재밌게 애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
“잘 아는 분들인가요?”
“아닙네다.”
“대화 상대가 이 근처에 있는 분들인가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북쪽은 최근 몇 년 동안 뒤처진 경제 회복과 ‘사회주의 강성대국’ 진입을 위한 ‘단번도약’ 전략으로 정보통신 산업 육성에 박차를 가해왔다. 고성능 컴퓨터 등 이른바 ‘전략물자’ 반입을 가로막는 경제제재 속에서도 이미 소프트웨어 개발능력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통일부가 내놓은 자료를 보면 북한에선 이미 지난 2002년 11월 평양을 중심으로 북녘땅 전역에 100여 개의 인터넷 연결망을 구축했다. 또 1300여 기관의 전산망을 인트라넷으로 연결해 인터넷처럼 이메일과 정보검색·채팅 등에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날 인민대학습당 컴퓨터 강의실에선 통계처리 프로그램인 ‘엑셀’ 활용법에 대한 강의가 한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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