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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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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누구든, 내 춤을 받아라

등록 2006-03-03 00:00 수정 2020-05-03 04:24

주한유럽연합상공회의소 새해맞이 행사로 초청된 무당 김금화의 한판 굿
힐튼호텔 좁은 계단에서 일흔 넘은 무당과 유럽인들이 신명으로 뭉치다

▣ 이경자 소설가

병술년, 정월 스물엿샛날(양력 2월23일) 저녁이었다. 서울 남산 둔덕에 우뚝 솟은 밀레니엄 힐튼호텔, 로비에서 지하 오크룸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오색찬란한 무신도(巫神圖)들이 내걸려 있었다. 난간에는 작두거리에 쓰일 장안기가 비스듬히 세워졌고, 계단과 계단 사이의 공간에 떡과 오색실과와 삼색나물이 담긴 굿상이 차려졌다. ‘주한유럽연합상공회의소’가 새해맞이 행사로 한국의 굿을 선택한 것이다. 청와대 뒷문을 개방한다고, 문화재청이 인간문화재 김금화 만신을 불러 액막이굿을 하려던 것이 취소된 적도 있는 이 땅에서 정작 유럽인들이 새해맞이로 굿판을 턱 벌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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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한 순간, 작두 위에 오르다

‘보여주기 굿’을 하도록 내준 시간은 딱 30분. 그 시간에 재수와 건강과 행운을 비는 상산맞이와 타살굿과 작두거리를 보여준다고 했다. 서너 시간은 족히 걸릴 굿을 반시간에 몰아붙이고도 굿의 신명을 이방인들에게 전할 수 있다면 그건 명인만의 능력일 것이었다.

굿이 시작되기 전에 굿청의 양쪽에서 김금화 무당의 제자들이 외국인들에게 점을 봐줬다. 그들은 이미 주최 쪽에 예약을 해둔 사람들이었다. 통역이 옆에 있었다. 막 점을 보고 난 한 여성은 “후련하고 시원하다”고 소감을 말했다. 무언가 생각들이 정리되지 않은 게 있어서 답답했는데 이제 개운하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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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해설자의 굿에 대한 설명으로 굿판이 열렸다. 상산맞이 복색을 차려입은 큰무당 김금화가 제자들과 함께 굿당에 올랐다. 그는 동서남북 사방신과 멀고 가까운 산의 신령들을 맞이해서 대접하는 굿을 시작했다. 한복에 갓을 쓰고 대기하던 주최 쪽 간부들과 호텔 총지배인이 신발을 벗고 굿상에 올라갔다. 그들은 방금 무당이 불러 모신 명산의 신령님들은 물론 동서남북 사방의 물길과 하늘길에 행운을 가져다줄 서낭신들에게 술을 따르고 절을 했다.

그저 한 점 빛으로 빗겨낸 상산맞이 끝물에도 김금화 무당은 서양인들에게 깃대점을 쳐줬다. 붉고 푸르고 노랗고 하얗고 파란 다섯 가지 방위의 상징인 오방기의 깃대 끝을 모아잡고 두루마기에 갓을 쓴 상사원에게 내밀자 그가 깃대 하나를 잡았다. 그가 잡은 깃대를 천천히 뽑자 붉은 깃발이 빠져나왔다. 붉은색은 그중 재수를 상징하는 것이어서 무당이 휘두르라고 일렀다. 문자로 말하지 않아도 금방 서로 이해했고 사람들은 함께 좋아했다.

김금화 무당은 선 자리에서 복색을 바꿔서 타살굿으로 들어갔다. 타살굿은 전쟁이나 난리로 세상이 어지러울 때 피를 흘리고 죽어간 여러 군웅신들을 모셔서 위로하고 대접하는 굿이다.

보통 마당에서 하는 타살굿을 이날은 한두 평 넓이의 비좁은 공간에서 해야 했다. 굿에 쓸 돼지는 공기 좋고 물 맑은 명당에서 따로 길렀다. 쌀겨를 먹이고 돼지의 터럭마다 입을 맞춰 고이 길러 군웅신들을 대접할 때 썼다. 김금화 무당은 삼지창에 통돼지의 한가운데를 찔러 곤두세웠다. 삼지창의 대는 어른 주먹만 한 소금 주머니에 세웠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 축원하기 시작했다. 이 소박한 정성이 성에 차지 않을지라도 크게 받으셔서 인간에게 닥칠지 모르는 피를 흘리게 되는 흉한 액을 물리쳐달라고 비는 것이었다. 김금화의 간절한 축원 끝에 돼지가 거짓말처럼 우뚝 섰다. 모여 섰던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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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살굿은 이것으로 ‘보여주기’를 마치고 곧 작두거리가 준비됐다. 무당이 겅중겅중 뛰고 솟구칠 수도 없는 비좁은 무대에 칠성단이 꾸며졌다. 날카로운 작두 위에서 춤추는 작두거리는, ‘비수거리’라고도 부른다. 산이나 바다를 건너온 허물을 벗겨내고 집안이나 식구들에게 든 액운을 모두 막아달라고 소원하는 굿이다.

김금화 무당은 작두거리의 복색으로 갈아입었다. 그는 최선을 다하는 것 같았다. 이미 한-미 수교 100주년이 되던 1982년 5월부터 8월까지 뉴욕에서 로스앤젤레스 등 여러 도시와 대학을 돌며 굿을 보여주기 시작해 유럽은 물론 아시아 여러 나라에도 다녔다. 굿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김금화의 보여주기 굿은 한국인을 느끼고 한국인의 문화와 정신을 짐작하고 엿보게 하는 것은 물론 우리의 복색과 춤과 노래와 악기와 음식을 두루 느끼고 맛보게 하였다. 로마대학에서 교황의 진혼굿을 했고 오스트리아에선 수백 년 된 성당 앞에서 굿을 했다. 올 한 해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 굿을 통해 한국의 민속과 정신문화를 알릴 계획이 잡혀 있다.

작두거리의 복색인 삼동다리를 입고 신장칼을 들고 칼춤을 춘 김금화가 사람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 뒤에 서양 남자 둘을 불러 드럼통 옆에 세운 긴 장안기를 잡게 하였다. 장안기엔 수사납고 액운이 낀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윽고 김금화가 날카롭게 갈아 날을 새파랗게 세운 작두를 받아 ‘놀리기’ 시작했다. 작두를 곧추 들고 혀를 내밀어 천천히 가르고 소매를 걷어 팔뚝을 가르고 치마를 걷어올려서 허벅지와 종아리를 갈랐다. 이렇게 작두 두 짝을 놀린 뒤에 제자들에게 돌려줬다. 곧 두 짝을 하나로 맨 작두가 칠성단에 놓일 것이었다. 남자 둘이 어깨에 맨 작두에 김금화가 두 팔을 걸치고 매달렸다. 사람들이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눈을 감거나 고개를 숙이기도 하였다.

장구와 징과 제금이 격렬하게 울렸다. 김금화의 표정은 비장했고 구경꾼들도 그랬다. 높이 솟구치고 몸을 젖히고 겅중겅중 뛰기 시작한 일흔 중반의 무당 김금화는 맨발로 작두 위에 섰다. 그가 작두날 위에 몸의 균형을 잡고 섰을 때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오랜 축원 끝에 통돼지가 우뚝 섰을 때처럼 그들은 무당과 한마음이 되고 사람을 위해 복을 주고 한을 풀어줄 신명들과 하나가 된 듯했다.

17살에 신 내리고, 참혹한 학대의 나날들

김금화는 작두날 위에서 신의 말을 전해주는 ‘공수’를 줬다. 경제가 좋아져서 모두 소원을 성취하라는 것이었다. 대한민국도 잘살고 유럽도 잘살고 누구나 복을 듬뿍 받아 가시라고 축원했다. 모두들 경건한 표정으로 김금화가 모말에 든 복주머니를 던져줄 때, 그리고 흰쌀을 흩뿌려줄 때 서로 받으려 손을 들었고 받은 사람들은 기뻐했다.

복을 준 김금화가 작두 위에서 내려왔다. 재빨리 칠성단이 치워지자 김금화가 한복을 입은 대표단을 무대로 불렀다. 그들이 손을 잡고 김금화를 따라 덩실덩실 춤췄다. 누구는 무복을 입었고 누구는 모자를 썼다. 무대에 올라가지 못한 사람들도 저절로 어깨가 들썩였고 몸이 흔들렸다. 신명과 흥이 국경과 민족을 넘어선 것이다.

17살에 신이 내려 무당이 된 사람, 한민족의 얼을 앗으려던 일제 시대에 무당으로 살아남아야 했던 가혹한 슬픔, 그리고 정작 해방된 땅에서 굿이 미신으로 몰려 겪어냈던 참혹한 수모와 학대를 김금화는 어디에 감췄을까. 젊어서 한때 무당을 그만두려고 방황했던 것도 이젠 추억이 되었을까. 자기의 땅에서 모독받고도 그 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 시대의 무당 김금화가 또 한 번 세계에 우리 문화를 드높인 한마당, 그 곁에서 존경과 사랑을 보내는 나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무당의 특별한 능력

무당은 일정한 자격을 갖춘 직업인이다. 그러나 그 자격이 학력을 쌓고 임용고시에 합격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된다는 말도 있지만 무당에겐 그것이 통하지 않는다. 이것이 무당이라는 직업과 다른 직업의 본질적인 차이다. 무당이 되려는 기미를 “신이 지폈다”고 하는데 그 지핀 신을 잘 받아 모시면 보통 지식이나 이성으로는 해석이 되지 않는 특별한 능력을 얻게 된다. 이 능력은 죽은 자를 불러들이고 유전자생명의 역사적 경험을 관통하게 한다. 개별 생명체에 대한 경험만이 아니라 집단과 사회와 문명에 대한 통찰까지 가능해진다. 그래서 영험한 무당 앞에선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이렇게 거짓말을 할 수 없게 하는 무당이, 그러나 지식과 이성이 사회를 지배하는 시대, 권력이 한 집단에 뭉쳐지는 때로 접어들면서 핍박의 길로 접어든다.
무당은 생명의 근원인 자연과 소통하는 사람이므로 바른 말을 하지 않거나 못하게 되면, 이미 무당이라고 할 수 없다. 무당은 하늘과 땅의 신명을 불러 삶과 조화시키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을 자연신의 능력으로 해소하는 영험을 획득한 사람이다.
제정일치 시대의 지배계층이었을 무당은 인간에 의해 좀더 세련된 종교가 발생하고 그 종교를 지배계급이 받아들이면서 오랜 쇠락의 역사를 살아내게 된다. 유서 깊은 사찰에 가보면 불교가 어떻게 무속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지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무속이 제의와 통합의 중심 자리를 잃고 그 존재 자체가 수치로 폄하되는 문화 현상에 곤두박였어도 유전자의 경험까지 없앨 수는 없어서 무당은 이제껏 뒷골목에 점집의 형태로 혹은 ‘문화재’라는 미명으로 살아남아 사람들의 불안과 방황과 고통에 ‘기생’하는 신분이 되었다. 무당을 폄하하고 굿을 미신으로 학대한 결과는 우리가 설익고 돈에 눈이 먼 무당을 키워내게 되었고 이것이 사회병리현상의 하나로 자리잡아가는 추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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