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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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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통어린이집의 소박한 도전

등록 2005-12-16 00:00 수정 2020-05-03 04:24

춘천지역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힘을 모아 만든 ‘아이들이 행복한’ 집
교사 자격증 취득부터 건물 구입에 도배까지 직접 해내며 보육 문제 실험 중

▣ 춘천 글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정희영(37)씨는 춘천 지역 시민단체 활동가다. 그는 올해 3월까지 강원대 부속병원 노조를 이끌던 상근 간부였고, 지금은 ‘민주주의 민족통일 강원·영서연합’과 ‘춘천 반미여성회’ 등의 시민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춘천 시민들의 숙원이었던 미군기지 ‘캠프 페이지’ 반환 집회에 빠지지 않았고, 매일 오후 7시에 춘천 명동 거리에서 열리는 농민 전용철씨 추모 집회에도 꼬박꼬박 참석하려고 애쓴다.

부모 소득 따라 보육료 차등 부과

그렇지만 정씨는 20개월 된 아들 지우의 엄마이기도 하고, 남편과 떨어져 홀로 육아의 부담을 떠안고 사는 주말 부부이기도 하다. 강고한 자본이나 권력과의 싸움에는 잔뼈가 굵은 그였지만 일하러 나간 사이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보육 문제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정씨는 “처음 1년 동안은 한 달에 45만~50만원을 주고 집에 보모를 들였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아이 걱정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잘 봐주겠으니 걱정 말라”던 보모들은 1년 동안 세 번이나 바뀌었고, 그때마다 지우는 크고 작은 병치레를 했다. “시민단체나 노조 일이라는 게 야근이 잦고, 주말에도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바쁘잖아요. 그럴 때마다 많이 힘들었죠.” 정씨는 지난 11월28일 고 전용철씨 추모 대회 때도 지우를 둘러업고 집회에 참석했다.

보육 문제는 정씨만의 고민이 아니었다. 시민단체 활동가들에게 보육은 쌀 개방이나 미군기지 반환보다 더 어렵고 고된 문제였다. ‘평화와 참여의 공동체 춘천시민광장’, 전국농민회총연맹 강원도 지부, 강원·영서연합, 춘천 반미여성회 등에서 같이 활동하는 상근자들과 고민을 나누기 시작했다. 박봉에 시달리는 시민단체 상근자 형편에 큰 욕심을 낼 순 없었지만, 따뜻하고 안전한 곳에 아이들을 맡기고 싶은 욕심은 뿌리치기 힘들었다. 정씨는 “2003년 말부터 춘천 시민단체 관계자들 사이에 ‘우리 힘으로 어린이집을 만들어보자’는 논의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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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사람들이 모델로 삼은 것은 2000년 인천에서 문을 연 ‘희망세상 어린이집’이었다. 춘천 부모들보다 먼저 비슷한 고민을 했던 인천 시민들은 1999년 ‘좋은 어린이집을 만들기 위한 인천시민협동조합’을 만들었고, 이듬해 부평구 부평동 야산에 3층짜리 건물을 지었다. 희망세상 어린이집의 시작이었다.

출범 5년째인 희망세상은 다른 어린이집과 달리 부모의 소득에 따라 보육료를 차등 부과하고 장애아동과 통합교육을 하는 등 신선한 시도를 선보여 인천 시민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또 달마다 방모임·학부모 간담회 등의 제도를 만들어 어린이집 운영에 학부모들이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었다. 희망세상의 독특한 시도는 2004년 여성부의 ‘특수(시간영장형) 보육 수요조사 정책대안연구’에 모범 사례로 소개됐다.

보육협동조합을 만들다

어린이집을 만들 결심을 한 뒤 닥친 첫 고민은 믿을 만한 교사를 찾는 것이었다. 강원·영서연합 상근자로 활동하던 이현주(27)씨가 용기를 냈다. 그는 “촛불집회 때 엄마 등에 업혀 나오는 아이들을 보면서 너무 안쓰러웠다”고 말했다. 지난해 3월부터 춘천에서 경기도 구리에 있는 경기 동부보육교사교육원에 일주일에 다섯 번씩 오가는 고행이 시작됐다. 이씨는 올해 1월에 보육교사 자격증을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어린이집 만들자는 취지에 공감했거든요. 큰 고생을 했다는 생각은 안 해요. 어차피 저도 아이를 낳아 기를 거잖아요.”

이씨가 자격증을 딴 뒤 어린이집 설립 운동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어린이집을 만들려면 먼저 학부모들로 구성된 보육협동조합을 만들어야 한다. 조합의 이름은 ‘아이들이 행복한 우리 사회를 위한 춘천시민 보육협동조합’으로 정했다. 어린이집으로 쓸 만한 건물을 사들이고, 리모델링을 하고, 아이들을 위한 여러 가지 놀이시설을 만들려면 1억원 가까운 돈이 필요했다. 먼저 아이를 맡기게 되는 조합 정회원들에게 300만원씩 출연금을 받았다. 그 다음부터는 어린이집 설립 취지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후원금을 받았다. 결혼을 안 한 후배들에게는 “너는 이 다음에 아이 안 낳을 거냐”, 이미 아이를 낳아 길러본 선배들에게는 “좋은 일 하는데 돈 좀 보태라”는 설득으로 모금을 했다. 아직 아이를 낳지 않은 사람들은 조합에 ‘장학회원’으로 등록돼, 출산 뒤 정식 조합원이 될 수 있다. 정씨는 “그래도 돈이 모자라 나머지는 은행 대출을 받아야 했다. 너무 자세한 사정을 알려고 하면 다친다”며 웃었다.

시민들은 그렇게 모은 돈으로 춘천시 효자동에 어린이집으로 사용할 집을 샀다. 아이들이 흙장난을 할 수 있게 일부러 마당 넓은 집을 골랐다. 1970년대 지어진 집은 워낙 낡아 이곳저곳 손볼 데가 많았다. 부모들은 초승달 모양이 그려진 벽지와 문에 칠한 파란색 파스텔톤의 페인트를 직접 골라 지난 6월께 공사를 끝냈다. 사람들은 “이제 도배사가 다 된 것 같다”며 낄낄대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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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집은 7월1일 문을 열고 시범 운영을 시작했다. 어린이집의 이름은 통통 어린이집이다. 자격증이 있는 이현주씨가 원장, 정희영씨는 유아담당 교사가 됐다. 인천 어린이집에서 경험을 쌓은 이미숙(39)씨는 실무적인 일을 담당하는 사무장이다. 2개월이 지난 9월1일에 정식 인가가 났다. 어린이집에 들어올 수 있는 아이들은 생후 3개월부터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인 7살까지. 보육료는 0살 아기는 32만원이고, 한 살 먹을 때마다 3만원씩 줄어든다.

텃밭에서는 무가 자라고…

부모들이 직접 만든 시설이다 보니 아이들의 먹을거리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다. 정씨는 “최대한 친환경적인 음식을 먹이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패스트푸드 같은 음식은 전혀 먹이지 않고, 다시다 같은 조미료도 쓰지 않는다. 식재료는 유기농 제품을 사용하려고 애쓴다. 11월30일 식단은 감잣국·멸치볶음·김·김치 등이었고, 아침 간식은 잣죽·과일, 오후 간식은 요기가 되는 떡볶이나 떡 등을 준비한다. “애들이 오전 8시부터 밤 10시(화·수·목에만)까지 어린이집에 머무르기 때문에 이곳에서 하루 세 끼를 해결해야 할 경우가 많거든요. 특히 음식에 신경쓸 수밖에 없죠.” 이미숙 사무장의 말이다.

어린이집 마당에서는 모래 놀이를 할 수 있고, 지난 가을 텃밭에서는 무를 길렀다. “며칠 전에 무를 잘라 무밥도 해먹었어요. 맛있었어요.” 어린이집에서 놀던 연우(7)가 말했다. 어린이집 현관에는 겨울 내내 시래깃국을 끓여먹을 수 있도록 무청을 매달아 말리고 있다. “이제 시작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많이 왔으면 좋겠어요.” 정희영씨가 말했다. <한겨레21>도 ‘사람들이 많이 많이 몰려’와 아이들을 위한 어른들의 소박한 도전이 성공하길 빈다(033-257-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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