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이 침해되는 현장이면 언제 어디든 달려갔던 민가협의 창립 20주년
2000년 이후 인권과 관련한 법적·제도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에 매진
▣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한 개인의 석방을 애걸하기보다는 민주화의 대열에 함께 서는 것만이 고통받는 이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는 지름길임을 믿으며, 민중·민주·민족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발전적인 가족운동을 전개해나가기 위해 민가협을 발기하는 바이다.”
장기수 문제를 공론화하다
20년 전인 1985년 12월12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이하 민가협·상임의장 조순덕)가 창립할 당시의 발기문 일부다. 창립을 선언한 당일 시국사건 관련 구속자의 수는 800명이 넘었고, 회원들은 현판식을 하는 날부터 서울 중부서로 연행됐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는 동안 민가협은 국가 권력에 의한 직접적인 폭력을 감수해야 했던 80년대와 인권의 영역이 사회 곳곳에 퍼지는 90년대를 거쳐 다양한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인권 분야의 중심 주제가 된 2005년 현재와 함께하고 있다. 민가협을 대한민국 인권운동사의 또 다른 이정표로 부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민가협 20년 활동사(표 참조)를 보면 한국 인권운동이 어떤 궤적을 밟아왔는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1990년대 초반까지 민가협의 초기 활동은 ‘집회·시위·농성’이라는 단어로 요약된다. 말 그대로 ‘인권 119’이자 ‘인권 앰뷸런스’였던 것이다. 인권이 침해되는 현장이라면 그곳이 경찰서든, 안기부든, 교도소든, 법정이든지 간에 어느 곳이라도 달려가 긴급구조 활동을 벌이는 게 활동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몸으로 때울 일’이 많았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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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가협의 투쟁 덕에 무소불위의 성역이었던 안기부, 경찰청 보안국 대공분실, 교도소, 경찰서 유치장 등에서 생기는 인권침해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또 이때 민가협이 치중했던 것이 ‘양심수’의 존재를 국내외에 알리고 사회적 의제로 만드는 일이었다. 결국 양심수라는 단어 자체를 부정하고 이들의 석방에 인색했던 정부는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89년 민가협은 ‘고문경관 이근안’을 검거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 정권에 맞서기 위해 “국민들이 직접 검거하자”며 ‘국민수사’를 선언했다. 공개수배 10년 만인 99년 10월 마침내 이씨는 자수해 구속 수감됐다. 이씨 처벌운동은 고문이 공소시효를 없애야 마땅한 반인도적 범죄라는 인식을 전사회적으로 심어줬다.
90년대 민가협이 이룬 성과 가운데 무엇보다 도드라지는 것은, 장기수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90년대는 반독재 투쟁이 인권의 가치보다 상위에 놓였던 80년대를 ‘지양’하면서 인권을 인류 보편의 가치로 받아들이고 이를 사회 곳곳에 대중적인 방식으로 퍼뜨리는 노력이 만발한 시기였다. 민가협은 장기수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이 문제가 이데올로기 대립의 문제라기보다는 인권의 문제라고 호소했다. 이 호소는 상당한 사회적 지지를 받았다. 98년 ‘전향제도’의 폐지도 이런 사회적 지지와 직접 맞닿아 있었다.
특히 사진 한 장 없이, 연고자도 없이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그 무엇 하나 없이 우리 사회에서 완전히 묻혀 있던 30~40년 구금의 초장기수들의 존재를 알린 것은 기적적인 일이었다. 결국 95년 세계 최장기수 김선명씨가 석방됐다. 20세기가 끝나는 99년 12월31일을 마지막으로 모든 비전향 장기수가 풀려나고 그 가운데 상당수가 북으로 송환되는 경이로운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간첩’이라는 단어 하나로 개인이 누려야 할 인권 전체가 묵살당했던 현실이 보기 좋게 뒤집어지는 경험은 그 자체가 하나의 훌륭한 인권교육 과정이었다.
물리적 투쟁에서 문화행사 개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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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민가협의 운동 방식도 물리적인 충돌 중심에서 국제대회 참가, 영화 제작, 문화행사 개최 등으로 다양화했다. 이른바 ‘인권 콘서트’로 불리는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도 연례행사로 굳어졌다. 시민가요제·인권만화전도 열렸다. 8월이면 명동성당에서 벌어진 0.75평짜리 ‘하루감옥체험’에는 수많은 예술인·교수·종교인·언론인 등이 참여했다. 집회도 정례화됐다. 목요일마다 당면한 인권 이슈를 주제로 연 ‘목요집회’가 그것이다. 94년 아르헨티나 ‘5월 광장 어머니회’를 초청한 것은 나라 안팎의 주목을 끄는 국제적인 인권 이벤트였다.
2000년 이후 민가협은 일상적인 인권구조 활동 외에도 그동안의 성과를 바탕으로 인권과 관련한 법적·제도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에 더 치중하고 있다. 이 시기의 활동 내용에 ‘종합보고서 발표’가 자주 눈에 띄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런 배경에는 국제인권법을 개별 국가 차원에서 실현하려고 설치하는 국내법상의 기구를 일컫는, 국가인권기구(국가인권위원회)의 출범에 힘입은 바도 크다. 시민사회가 오롯이 책임져야 했던 인권운동 영역의 일부를 국가가 떠맡은 데서 오는 효과다.
민가협이 이룬 성과는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대거 입성한 ‘민가협 장학생’들의 존재에서도 드러난다. 80년대 중반 이후 시국사건과 관련해 민가협의 도움을 받았던 이들을 일컫는, ‘민가협 장학생’ 가운데는 현직 국회의원들도 많다. 김근태·김희선·권영길·단병호·천영세·박계동·노회찬·유시민·정청래·김태년·고진화·임종석·오영식·이인영…. 이들은 구속 당시 민가협에서 영치금을 받았고 민가협의 석방운동에 빚을 진 바 있다.
그러나 민가협이 오늘에 이른 가장 큰 원동력은 ‘보랏빛 수건’으로 상징되는 ‘민가협 어머니’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민가협 송소연 총무는 “어머니들은 ‘인권지기’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누구보다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며 “한 분 한 분이 모두 당당한 활동가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사실 우리 사회에 민가협 어머니들에 대해서 잘못된 환상이 일부 있다”면서 “자식을 위해서는 물불 안 가리거나 무조건 떼쓰는 비논리적인 존재로 보기도 하는데, 이는 어머니의 이미지를 박제화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회원으로 활동하는 어머니들 가운데는 정작 자식은 몇개월밖에 옥살이를 하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10년 이상 더 열심히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가족의 일로 뛰어들었지만 그 힘으로 투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식 남의 자식의 경계를 허물면서” 사회문제를 보는 통찰력과 혜안, 실천력까지 갖추게 됐다는 얘기다.
11월30일 오후 취재팀이 서울 창신동에 위치한 민가협 사무실을 방문했다가 우연히 마주친 회원 어머니들한테서도 이런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서경순(68)씨는 “시위 도중 숨진 농민의 사진을 보다가 엉엉 울었다”면서 “돈이나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노동자나 빈민의 편에 서는 내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서씨는 또 “약자에게는 한없이 약하고 강자 앞에서는 강한 것이 민가협 어머니들”이라고도 했다. 열린우리당 임종석 의원의 어머니로 여전히 열심히 활동 중인 김정숙(65)씨 역시 “인권이니 민주화니 하는 말을 전혀 몰랐던 전업주부가 민가협에 드나들면서 투사가 됐다”면서 “한창 악이 바칠 때는 내 한 몸 죽어서 어떤 일을 이룰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김씨는 또 “전에는 남의 눈치를 많이 보면서 살았지만, 지금은 우리 손발로 노동해서 먹고산다고 생각하면 떳떳하다”면서 “재벌가는 어디서 어떻게 돈을 벌어서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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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을 넘어 사람다운 사람을”
송 총무는 또 “어머니들은 체계적인 의식화 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소수자 문제 등 다른 인권 문제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높다”며 “여성과 노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어머니들은 소외된 집단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있어서인지 소수자 문제에 쉽게 공감한다”고 분석했다. 회원인 이영(63)씨는 “양심적 병역거부 같은 문제는 처음에는 상당한 거부감이 있었다”면서 “그렇지만 동족을 죽이는 전쟁에 반대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군대 가는 것만큼 힘들다는 대체복무를 하겠다고까지 하는 이 사람들을 존경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말했다. 동성애 문제를 토론할 때는 ‘왜 동성연애자로 부르면 안 되느냐’는 문제 등으로 치열하게 토론한단다. 조순덕(54) 회장은 “인권지기로 자처한 민가협 어머니들이 소수자의 인권을 위해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한다”고 말했다.
채은아 전 총무한테서 “투쟁에서 얻은 경험을 의제화할 줄 아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 임기란(76) 전 상임의장은 2001년 <민주가족> 2월호에 이런 글을 썼다. 임 전 의장은 올해 너무 많은 투쟁 현장을 다니다 지병인 당뇨 증세가 심해져 현재 병원에 입원해 있다.
“그렇다. 우리 민가협 엄마들은 자부한다. 이념과 사상, 정치적 견해의 다름을 뛰어넘어 오로지 사람다운 사람을 염원한다. 늘 정의의 편에서 억울한 눈물을 닦아주고 같이 슬픔을 나누고 기쁨이 있다면 사랑으로 함께하기를 원하거든. 우리 어머니들은 수배, 체포, 고문, 억지 자백, 엉터리 공소장, 터무니없는 구형, 실망스런 판결 모두 배척한다. 양심수란 말이 이 땅에 없어질 때까지 늙은 어미들은 힘껏 싸우려네. 음모 속에 사건을 만들고, 미리 짜여진 심판 따위는 영영 이 지구에서 척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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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가협 20주년을 기념하는 17번째 ‘인권콘서트’(www.1210con.com)는 “50대 중반의 어머니에서 이제 70대 중반의 할미가 된” 민가협의 주인공들에게 초점을 맞췄다. 공연의 이름도 ‘보랏빛 수건’이다.
영화 <송환>을 만든 김동원 감독이 제작해 이날 상영하는 다큐멘터리 <보랏빛 수건>은 민가협 20년 역사를 압축한 기록한 것이다. 다큐멘터리에서는 민가협과 관련한 주요 사건이 당시 영상과 함께 소개되고 이에 대한 당사자의 기억과 증언이 덧붙여진다. 하루감옥체험에 동참했던 배우 김혜수·송강호, 김기덕 감독, 강금실 변호사 등이 등장하고, 장기수들의 석방과 송환 등 역사적인 순간도 만날 수 있다는 게 김 감독의 귀띔이다. 도종환 시인은 민가협 20년에 바치는 헌정시를 낭송할 예정이다.
13번째 출연해 이 공연의 살아 있는 역사로 불리는 정태춘·박은옥씨 부부, 10번째 출연하는 김종서씨, 3번째 출연하는 이은미씨 등은 올해도 어김없이 출연한다. 80년대 노래운동을 대표하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과 록밴드 ‘크라잉넛’이 자발적 참여를 선언했다.
이날 공연에는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의 심리극 ‘나는 간첩이 아니다’도 소개된다. 1983년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 수사관에게 끌려가 ‘고문기술자’ 이근안 등에 의해 간첩으로 만들어진 뒤 16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던 함주명씨에 관한 얘기다. 그는 7월 서울고법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재심이 받아들여진 뒤 무죄를 선고받은 터라 선고 뒤에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갔다”는 탄식과 환호가 교차하기도 했다. 정 박사는 심리극을 통해 1983년부터 2005년까지 22년 동안 ‘간첩’으로 살아야 했던 함씨의 삶으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공연은 12월10일(토) 오후 5시 서울 한양대 체육관에서 열린다. 문의 02-0763-2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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