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 종이와 기능성 벽지 개발해 성공신화 만드는 미래영상 김석란 대표
전주 출신으로 사진 공부하다 ‘신소재’ 한지 산업화의 가능성에 눈떠
▣전주=글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한지’는 내게 반사적으로 ‘할머니’와 ‘팽이’라는 두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겨울이 지나고 봄볕이 따사로워지면 할머니는 나무 문짝을 떼내 창호지를 새로 갈곤 했다. 겨울을 지내는 동안 창호지는 더럽혀지고, 누더기처럼 여기저기 땜질이 돼 있기 일쑤였다. 손자들이 침 바른 손가락으로 장난 삼아 구멍을 뚫어놓은 탓이었다. 겨울을 버틴 창호지에 할머니가 물을 끼얹어 칼로 말끔하게 긁어낸 뒤 깨끗한 한지를 새로 바르면 방안은 금세 칙칙한 겨울 분위기를 벗어났다.
한지와 팽이의 연결 고리는 닥나무 팽이채다. 한지의 원료인 닥나무를 뚝 부러뜨리면 회갈색 겉껍질과 함께 하얀 속껍질이 치렁치렁 드러나 팽이채로는 안성맞춤이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갔을까 말까 한 1970년대 초반만 해도 닥나무는 마을 근처 개울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오래가고 멋스럽다
시골 출신이라면 한지에 얽힌 기억 한 토막쯤은 다 갖고 있을 법한데, 김석란(44) 미래영상(www.miraehanji.com) 대표에겐 한지에 대한 사람들의 이런 정서적 유대감이 사업의 든든한 추진력인 동시에 엄청난 걸림돌이기도 했다. 미래영상은 ‘한지의 신소재 산업화’를 깃발로 내걸고 있는 전주지역 벤처기업이다. 김 대표는 한지 고유의 장점을 한껏 살린 인쇄용 한지와 기능성 벽지를 개발함으로써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까지 ‘뜻은 좋지만 돈이 되겠느냐’는 회의적 반응에 수없이 맞닥뜨려야 했다.
그가 개발한 한지 브랜드 ‘여백’과 ‘천년사랑’은 일반 한지를 두세 겹 이어붙인 ‘이합지’나 ‘삼합지’를 감광유제로 특수 코팅한 것으로, 사진을 인화할 수 있다. 일반 코팅과 달리 천연 약품을 한지에 배어들게 함으로써 보풀로 인한 인쇄 방해 문제를 해결했을 뿐 아니라 한지의 통기성과 부드러운 질감을 그대로 유지했다는 점에서 호평을 얻고 있다. 2002년 조달청 납품 품목으로 선정된 데 이어 지난해엔 특허청으로부터 특허기술(특허번호 제0515397호)로 인정받는 개가를 올렸다.
전주시, 전북경찰청, 전북대를 비롯한 전북도내 각 기관들에서 상장과 위촉장, 명함 등 갖가지 행정 서식에 미래영상의 한지를 쓰고 있어 사업화 길이 차츰 열리고 있다. 행정자치부 상훈과를 설득해 대통령 표창장을 한지로 만들도록 하는 작업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어 기대를 모으고 있다. A4 크기 1장에 1500원꼴이어서 좀 비싸지만, 오래간다는 장점과 멋스럽다는 점을 인정받은 데 따른 결과다. 미래영상의 특수 한지는 문화재청의 고문서 영인본 제작 사업과도 맞닿아 있어 수요는 한층 늘어날 전망이다. ‘왕세자입학도’ 영인본 제작은 이미 끝났고, 다른 고문서들의 영인본 제작 논의도 이뤄지고 있다.
천년사랑은 잉크젯 프린터를 이용해 사진 인화를 할 수 있어 앨범용 사진이나, 한지에 인쇄한 연예인 브로마이드 사업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는 게 김 대표의 설명이다.
노인복지아파트에 벽지 공급
이런 성과에도 지난 2000년 설립된 미래영상이 지금까지 거둔 기업적 성과는 아직 미흡한 실정이다. 지난 한 해 거둔 매출이 1억2천만원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김 사장을 포함해 상근자가 6명인 회사를 꾸려가기엔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올 하반기부터 그나마 사정이 좀 나아져 한 달에 3천~4천만원의 매출 실적을 거두고 있다. 지난해와 견주면 2~3배 수준이며, “이제 먹고살 만한 정도는 된다”고 김 대표는 말한다. 미래영상 한지가 전주지역을 중심으로 조금씩 알려진 덕분이다.
올 11월 들어 잇따르는 낭보는 미래영상의 기업적 성과에 기대를 모으게 한다. 미래영상은 지난 11월9일부터 나흘 동안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제1회 2005 국제 한지산업 박람회’에서 인쇄용 한지를 선보여 좋은 반응을 얻었을 뿐 아니라 인쇄용지(63X93 크기) 5천 장(4천만원 상당)을 주문받았다. 사업 영역의 확장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인쇄용 한지에 이어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개발하고 있는 기능성 벽지 사업 부문에서는 성과가 특히 두드러진다. 전주지역 건설회사인 지성주택건설이 올1 1월 착공해 내년 11월에 완공할 정읍 지역의 315세대 노인복지아파트에 미래영상 벽지를 공급하기로 한 것. 이에 따른 미래영상의 매출은 10억원에 이른다고 하니 미미한 실적으로 어렵사리 회사를 끌어온 김 대표로선 날개를 단 것으로 보인다.
김영구 지성주택건설 회장은 “질감이 따뜻하고 방음 효과가 탁월해 쓰기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 회장은 “일반 벽지보다 2배가량 비싸지만, 방음 효과가 큰데다 화재 때 유독성 물질을 배출하지 않는 강점 덕에 다른 자재를 덜 쓰는 걸 감안하면 결과적으로 더 저렴한 셈”이라고 덧붙였다. 김석란 대표는 “요즘 나오는 한지 벽지 중 상당수는 한지 무늬를 낸 것에 불과하고, 그나마 나은 경우라도 닥종이에 목재 펄프를 섞은 것이어서 국산 닥나무를 쓰는 미래영상의 한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설명한다.
‘한지의 고장’ 전주에서 태어난데다 사진(서울예전), 영상미디어디자인(숙명여대 대학원)을 공부한 김 대표가 한지의 산업화에 뛰어든 건 어쩌면 필연적인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전주시 덕진구 팔복동 2가에 터를 잡은 미래영상 생산현장에서 만난 김 대표는 “어릴 때부터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듯하다”며 웃었다. “다른 애들 피아노 배울 때 저는 가야금을 배웠습니다. 그게 하고 싶더라고요. 산조연주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제 안에 그런 게 내재해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하.” 그런 그가 한지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전주 우석대 물리학과 재학 시절. 서울예전에 다니다가 집안 사정으로 고향에 내려온 그는 1983년 입학한 우석대에서 학보사 기자 생활을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한지를 이용한 부채 등 전통 공예 취재를 하면서 한지에 대한 식견을 넓혔다.
대학시절의 공부를 살려 1990년부터 전주에 스튜디오를 차려 사진작품 활동을 하던 그는 자연스럽게 한 가지 의문을 품게 됐다. ‘천 년을 간다는 한지로 인화지를 만들 수 없을까?’ “사진의 기본 기능이 기록성·보존성인데,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200년을 못 간다는 겁니다. 더구나 사진작품에 쓰이는 재료는 전부 수입품이거든요. ‘무구정광 다라니경’에서 보듯 한지는 기록 보존성이 뛰어난데다 우리 것이지 않습니까. 이곳저곳 수소문하고 공부하면서 (미국에서 한지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사진작가 이정진씨도 알게 됐고, 감광유제를 쓰면 한지에 인화를 할 수 있다는 걸 배웠습니다.”
남편의 지지 발언에 눈물 흘리다
한지에 감광유제를 코팅해 사진작품 활동을 하던 그가 사업으로 이어갈 뜻을 굳힌 건 1998년이었다. “딸을 낳은 직후였습니다. 한지로 습작품을 만들다 보니 혼자 보기에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벤처의 틈새를 봤던 겁니다. 아이디어와 기술이 있으니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늦게 낳은 딸을 위해 뭔가 뜻있는 일을 해보고 싶기도 했고….” 그렇게 사업에 뛰어든 그는 주위의 수많은 반대에 부딪혔다. 지역에서 화가로 활동하며 지금은 든든한 후원자가 된 남편 조병철(43)씨도 처음엔 심하게 반대했다. ‘아이디어는 좋으나 사업성은 없다’는 게 이유였다.
2000년 산업자원부 기술평가센터로부터 기술을 인정받아 기술신용보증기금으로 어렵사리 저리(연 3%)로 1억원의 자금을 지원받은 뒤에도 어려움은 그치지 않았다. 바로 그해 법인 설립 직후 ‘진승현 게이트’를 비롯한 벤처기업 관련 갖가지 추문에서 비롯된 ‘벤처 거품 붕괴’로 추가 지원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 투자 여력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녀도 돌아온 것은 냉랭한 반응뿐이었다.
“한지란 게 최고의 문화유산이고 벤처사업으로 연결할 수 있는데, 정부와 투자자들을 설득하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벤처’라고 하면 사람들은 ‘실리콘밸리’만 떠올리는데, 전주 ‘촌구석’의, 그것도 여자가 벤처를 하겠다고 하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투자 제의를 했다가 판판이 거절당한 뒤 그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이젠 내 아군이 돼달라”고 부탁했단다. 남편은 그때까지도 사업 길에 나서는 걸 반대하고 있었다. 남편은 “그래, 당신이 옳아. 내가 전폭적으로 지지하겠다”며 반대자에서 후원자로 돌아섰다. 김 대표는 당시를 떠올리며 “사업하면서 한 번도 울지 않았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울었다는 얘기는 끝내 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3학년, 1학년인 아들, 딸 얘기가 화제에 오르자 사업가 엄마의 목소리에 활기가 돌았다. “집앞 떡볶이집 할머니가 하루는 우리 아이들이 한 얘기라며 전해주더군요. ‘우리 엄마는요, 전통한지 연구가예요’ 하더래요. 또 딸아이는 ‘우리 아빠는 그림을 아주 잘 그려요’, 그랬다는 겁니다. 집에선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 그런 얘기를 해본 적이 없거든요.” 엄마·아빠를 자랑스워하는 아이들을 떠올리는 김 대표의 얼굴에 슬며시 웃음이 번졌다. 김 대표는 딸한테 지금 하는 일을 물려주고 싶다고 한다. 회사 이름인 ‘미래’(美來)가 딸의 이름이기도 한 걸 보면, 괜한 생각은 아닌 듯하다. 아빠 따라 ‘화가 하겠다’는 아들을 보고 남편 조씨는 ‘건축가 하라’며 말리는 반면, 김 대표는 “‘화가 하는 것도 괜찮다’고 말해준다”며 웃었다.
‘공예품’에 머물지 말라
김 대표의 미래영상은 인쇄용 한지를 이용한 달력 등의 작품을 내놓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소재의 질을 높이는 데 주력하겠다고 밝힌다. 그게 사업의 기본이라는 생각에서다. 중간재인 일반 한지를 공급하는 ‘전주전통한지원’(전주 한옥마을 안)에 일정한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질적 수준을 확보하고, 나아가 한지를 활용해 아파트 층간 소음을 방지할 수 있는 건축자재 같은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한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어도 ‘공예품’을 만드는 데 머물러 있습니다. 이걸 산업화로 이어가야 합니다. 자칫 예전으로 돌아가는 ‘복고’가 될 수 있거든요. 전통은 머무는 게 아니라 흘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지산업으로 돈을 벌었다는 성공사례를 만들지 않으면 한지의 미래는 없다고 봅니다.” 사업 이력이 쌓이면서 한결 여유로워진 김 대표는 “예전엔 마음이 조급했는데, 이제 길게 보려 한다”고 말했다. “한두 해 하고 말 게 아니고 딸에게 대를 물려 이어갈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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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는 고려시대 이후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품질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중국 등에 대한 주요 수출 품목이었지만, 1919년 신의주에 근대 제지공장(양지공업)이 건설된 뒤 시장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식민지 시대와 해방 이후의 산업화 과정에서 한지산업의 위축은 더욱 가속화됐다.
이승형 전북발전연구원 연구위원은 “일본의 전통 종이인 화지(和紙)의 침투로 한지의 고유한 제지 방법까지 변질됐으며, 이런 변화와 함께 전통 한지는 가격경쟁력에서는 중국·타이산에, 품질경쟁력에서는 일본산에 뒤져 심각한 존립 위기 상황을 맞고 있다”고 말했다. 이 위원은 “한지산업의 생존과 활성화를 위해선 사업체 경영자의 노력이 가장 필요하겠지만, 이미 생산기반이 무너진 상태여서 정부의 실질적인 정책 지원이 필요한 상태”라고 덧붙였다.
김석란 대표의 미래영상이 자리잡은 전북 지역에는 전주한지사업협동조합 소속 7개 업체와 기타 3개 업체가 전통 한지의 명맥을 잇고 있다. 전북 일원에는 이 밖에 기계화한 한지 업체 6곳이 있다. 전통 한지를 활용해 인쇄용 한지를 만드는 곳은 미래영상뿐이다. 전북 지역 외 경남 의령, 전남 곡성, 경기 가평, 강원 원주 등에도 한지 업체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문화관광부에서 전국적인 한지산업 실태 조사를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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