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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톨릭 최초의 병역거부!

등록 2005-11-02 00:00 수정 2020-05-03 04:24

신앙을 지키기 위해 결단 내린 고동주씨, 교계의 입장을 묻는다
공식적 지지 입장 밝히기 어려운 상황, 일부 단체 불구속 수사 촉구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내가 배워야 할 모든 것은 성당에서 배웠다.’

그의 스물여섯 인생을 요약한 한 줄일지 모른다. 모태신앙으로 어릴 적 신부를 꿈꾸었고, 가톨릭학생회에서 간부로 활동했다. 그렇게 잔뼈가 굵은 가톨릭 청년이 병역거부를 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고동주(가톨릭대 휴학)씨의 이야기다. 따지자면, 한국 가톨릭 최초의 병역거부자인 셈이다.

유호근씨를 만난 뒤 기도하다

조부모부터 가톨릭 신자였다. 세례를 받던 초등학교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는 “성채를 모시면서 충만했다”고 돌이켰다. 사제가 꿈이었다. 중학교 때는 예비 신학교도 다녔다. 비록 5개월 만에 그만두었지만, 하느님의 길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 한때 새벽기도에 나가면 주는 은총표를 일부러 받지 않았던 적도 있다. 은총표는 주말에 열리는 은총시장에서 물건을 살 수 있는 ‘은총’이었는데도.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 구절을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중학교 때 성당에서 광주항쟁 비디오를 보기도 했고, 부모님을 따라간 수련회에서 노래 <아침이슬>을 배우기도 했다. 고향 제주에서 7살에 올라와 21살 때까지 다녔던 서울 성수동 성당에는 그 모든 추억이 묻어 있다. 그렇게 가톨릭적 심성은 단단해졌다.

대학도 가톨릭대학교였다. 동아리도 가톨릭학생회였다. 가톨릭학생회 친구들과 미사를 드리는 일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2학년 때인 2000년에는 가톨릭대학교 가톨릭학생회의 부회장을 맡았다. 미사도 좋았지만, 노래도 좋았다. 민중가요도, 생활성가도 좋았다. 2001년에는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서가대연) 부회장을 했다. 그는 “부회장 인생”이라며 웃었다. “열심히 일은 하고 싶은데 회장은 겁나니까요.” 그러니까 그는 앞장서는 체질이 아니라 묵묵히 챙기는 사람이다. 대학생활은 즐거웠지만, 마음 한구석은 무거웠다. 군대 문제 때문이었다. 가끔 병역거부자들의 소식을 들었다. 병역거부도 고민해보았다. 그렇지만 자신이 없었다. ‘자구책’으로 산업기능요원 시험을 준비했다. 마음이 없으니 시험도 어려웠다. ‘난 진짜 병역기피자구나….’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2002년 농활대장을 하면서, 효순·미선이 추모집회에 참가하면서, 이라크전 반전운동에 함께하면서 평화의 신념은 단단해져갔다. 하느님이 평화의 원칙을 가르쳐주었다면, 가톨릭학생회에서는 평화로운 삶의 방법을 배웠다.

대체복무의 정당성 인정하는 가톨릭 교리

2003년 여름은 운명의 여름이었다. 병역거부자 유호근씨의 이야기를 읽었다. 4주 군사훈련도 못한다는 사람을 보면서 가톨릭 신자로서 자괴감이 들었다. 유호근씨를 찾아갔다. ‘전쟁 없는 세상’에서 다른 병역거부자들도 만났다. 그리고 기도했다. ‘진심인가’를 되물었다. 그의 병역거부서에는 당시 그의 기도가 적혀 있다. “군대에서 받을 훈련을 상상해봅니다. 적으로 상정되는 인형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 총칼로 찌르고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쏘는 훈련을 하겠지요.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이러한 훈련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저는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복음을 버려야 합니다. 또한 이것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제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버리게 됩니다.” 성경에서 새삼 평화의 말씀을 발견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라.” “원수를 사랑하라.” 제2차 바티칸 공회의에서 채택된 사목헌장은 한줄기 빛이었다. 헌장에는 “양심상의 이유로 무기 사용을 거부하면서 다른 방법으로 공동체에 봉사하려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달리 인간다운 입법 조처를 취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명시돼 있다. 그렇게 서서히 병역거부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편지를 썼다. 부모님께. 신앙인으로 병역거부를 하겠다고 전했다. 병역거부를 하지 않고는 신앙을 지킬 수 없다고 설득했다. 그는 “걱정도 했지만, 믿음도 있었다”고 말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가톨릭 노동장년회 활동을 오래 해온 부모님에 대한 믿음이었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사회운동가로 살고 싶다는 이야기도 해온 터였다. 물론 부모님은 걱정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막을 수 없는 일 아니냐”며 선선히 받아들였고, “우리는 기도하는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아버지는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대학을 다니는 ‘기대주’였다. 다만, 군대를 다녀온 남동생만이 반대했다. 그러나 형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지난 10월11일 입대영장이 나왔고, 19일 병역거부 선언 기자회견을 했다.

가톨릭은 침묵했다. 가톨릭 청년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병역거부를 했지만. 다행히 10월24일 천주교인권위원회와 우리신학연구소가 공동 주최한 긴급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발제를 맡은 강인철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교수는 가톨릭의 평화주의 전통에 대해 다시 일깨워주었다. 가톨릭에는 전쟁을 옹호하는 ‘정의 전쟁론’과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주의’의 흐름이 공존한다. 강 교수는 발제문에서 “정의로운 전쟁론뿐 아니라 ‘양심적 병역거부’와 ‘대체복무’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있는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 교회가 분명하게 재확인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 교수는 또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 ‘정당한 전쟁’의 엄격한 조건이 열거돼 있음을, 미국 주교들이 그 엄격한 조건을 10가지로 세분화했음을 소개했다. 그는 “‘정의로운 전쟁’ 교리는 사실상 모든 종류의 전쟁을 탈정당화하는 수단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고동주씨에게 토론회는 자신감을 주었다. 고씨는 “가톨릭 교리가 전쟁 정당화로 기울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며 “확신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교회에 입장을 요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한국은 많은 신자들이 군대를 가야 하는 사회”라며 “교회가 병역거부에 대해 판단 근거를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입대 전이나 훈련 과정에서 갈등하는 신자들이 있다는 주장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소신은 여전하실까

하지만 침묵은 깊다. 가톨릭 청년이 병역거부를 했지만, 가톨릭 언론은 침묵하고 있다. 가톨릭 공식기구는 물론 가톨릭계 사회단체도 병역거부권 지지 입장을 밝히기가 쉽지 않은 형편이다. 개인적으로 고동주씨를 도와주겠다는 성직자들은 있지만, 단체의 이름으로 나서기는 다들 어려워한다. 고씨는 “병역거부 선언 기자회견에도 성직자를 모시려 했지만 다들 고사했다”며 “가톨릭의 이름으로 병역거부를 해서 더욱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래도 그의 병역거부를 계기로 변화의 흐름도 생기고 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평화를 여는 가톨릭청년 등 가톨릭 단체와 신도 100여 명은10월 24일 성명을 내어 고씨에 대한 불구속 수사를 촉구했다. 고씨는 “병역거부자는 도주의 우려도, 증거 인멸의 우려도 없지만 구속수사를 받고 있다”며 “구속 관행이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참, 2002년 3월 김수환 추기경은 <교육방송>에 출연해 “신앙에 의한 양심적인 병역거부는 존중돼야” 하며, “개인적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것이 국가의 안보를 크게 해치지 않는다면 병역 의무에 못지않은 사회봉사로 대체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 소신이 여전하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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