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도 모르게 묻어둔 ‘인민군 군의관’기억을 55년만에 털어놓은 류춘도 할머니…“부모와 조부모 세대 누구도 피해갈 수 없었던 역사를 젊은이들이 알아줬으면”
▣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1950년 6월28일 전쟁 발발 사흘 뒤 서울 혜화동 서울여자의과대학 병원에는 인민군 부상병들이 들것에 실리거나 홀로 깽깽이를 치면서 들어왔다. 어제까지 국군이 치료받던 공간에 그와 비슷한 얼굴의 “모자에 별이 달리고 땀냄새가 좀 다른 듯한” 이들이 모여들었다. 절대화할수 없는 체험이겠지만, 어제의 국군 장교들이 장교라서 먼저 치료를 요구했다면 오늘의 인민군 군관들은 병들이 치료받은 뒤 나중에 받겠다고 했다. 인민군들은 강당에 학장, 교수, 의사, 학생, 병원 청소부, 식당 아주머니, 심부름하는 사환아이까지 한자리에 모여 앉게 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똑같은 얘기를 들려줬고 어린 사람에게도 반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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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울여의대생이던 그는 “피부로” 사회주의를 느꼈다. 해방공간에서 유달리 사려깊고 똑똑했던 친구들이 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날 새벽 육군 참모총장을 태운 지프차를 마지막으로 대통령과 군 수뇌부가 모두 한강 다리를 통과한 직후 수천명의 피난민이 건너고 있던 인도교와 철교 두개를 사정없이 폭파해버린 이승만 정권은, 그러고도 승리를 확신하는 대통령의 녹음방송을 오전 11시까지 라디오로 내보냈다. 배신감에 치를 떨던 그는 마음이 가리키는 길을 따랐다. 병원에서 부상자들을 치료하다가 남하하는 인민군의 뒤를 따라나섰다. 서울의 대학생들 상당수가 유격대에 앞다퉈 자원할 때였다.
친구 박정자, 혁명투사에서 양로원까지
산부인과 개원의로 명성이 높은 류춘도(78)씨가 50년 넘게 ‘가슴속에 묻어뒀던 이야기’를 책으로 냈다. ‘어느 의용군 군의관의 늦은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벙어리새>(당대 펴냄)는 전쟁의 실상과 역사의 격류에 휩쓸렸던 사람들의 얘기를 생생하게 전한다. 책에서 그가 가장 먼저 불러낸 이는 친구 박정자다. 이화여대 국문과에 다니던 박정자는 작은 몸피에 하얀 얼굴을 한, 조용하고 사색적인 친구였다. 책을 많이 읽던 정자는 경찰에 쫓기더니 어느 날 사라졌다. 6월28일 오후 정자는 깨끗한 녹색 군복에 긴 가죽군화를 신은 신념에 찬 혁명투사의 모습으로 그의 앞에 나타났다. 류씨가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고 부산집에 내려가 있던 1951년 초 어느 날 정자는 아낙네로 변장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 류씨가 차려준 찬밥을 허겁지겁 먹고는 아무 말 없이 떠났다. 그를 다시 본 것은 1952년 여름 류씨가 ‘부산여자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고초를 겪을 때 같은 경찰서 어두컴컴한 복도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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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무니없이 날조된 사건이었지만 수괴로 지목된 박정자는 38년 하고도 몇개월을 갇혀 있다가 풀려났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고향 진주에 갔으나 일가친척으로부터도 동창들로부터도 외면당했다는 얘기를 몇년 전 우연히 진주 출신 여의사들 모임에서 들었다. 류씨는 전국을 수소문해 한 양로원에 있던 그를 찾아냈다. 당당하고 명민하던 여성 혁명투사는 온데간데없고 흐릿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노인이 앉아 있었다. 긴 세월 아무도 면회 오지 않던 감옥살이는 정자의 몸뿐 아니라 정신까지 황폐화했다. 장기수 명단에도 없고 어느 기록물에도 등장하지 않는 ‘박정자’와 ‘박정자들’을 얘기하며 류씨는 “역사의 어둠에 묻힌 그들에 견주면 나는 덤으로 산 셈”이라고 말한다. 정자가 인민군이 아니었다면, 전쟁통 부산 땅에서 붙잡히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여성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완전무결하게 세상에서 유폐되지는 않았으리라는 게 류씨의 짐작이다. 박정자는 1999년 류씨가 시집 <잊히지 않는 사람들>을 펴내며 장기수들과 교류할 때 같이 가자고 손목을 끌어도 한사코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이, 내가) 뭘 했다꼬…”가 이유였다.
국군 총부리에서 도망치고 병원에 파묻혀
인민군을 따라 전라도까지 내려갔다. 광주훈련소에서 어린 간호보조원을 대신해 전방으로 갈 부대의 위생담당 요원을 자처한 류씨는 고된 행군길에 올랐다. 밤을 낮 삼아 걸어 구례로 함양으로 의령으로 나아갔다. 인민군과 미군의 격전이 한창이었던 남강변의 한 야전병원에서 일하다 부상병들을 거창 후방병원으로 후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가던 길에 미군 ‘쌕쌕이’의 기총소사에 달구지를 몰던 이와 부상병들은 모두 죽고 그만 살아남았다. 그 뒤로도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긴다. 퇴각하던 인민군 트럭들이 줄줄이 십자포화를 맞을 때 마침 그가 탄 차가 엔진 고장으로 뒤처진 덕에 살아남았고, 낙오돼 혼자 헤맬 때 국군의 눈에 띄어 남강 귀신이 될 뻔한 적도 있다. 부상당한 그가 낙오를 자처하자 인민군 군관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집어넣어준 지폐 몇장 때문이었다. 이승만이 발행했으나 유통하지 않았던 지폐였기 때문이다. 총을 겨눴던 국군은 “이 꼬뮤니스트” 하며 방아쇠를 당기려 했고, 순간 뒤에서 그를 잡아챈 미군 덕분에 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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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형무소에서 여자 포로들과 갇혀 있다가 우여곡절 끝에 통행증을 얻어 따르던 거지아이 칠동이를 데리고 부산 집에 도착한 것은 전쟁 발발 반년 만인 1951년 1월이었다. 반년이지만 6년, 60년을 살아낸 것 같은 심정이었다. 피아골 달빛 아래 말고삐를 잡아끌던 해맑은 소년병과, 그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키가 큰 인민군 군관과, 부나방처럼 폭염에 뛰어들던 빨치산들과, 인분을 뒤집어쓴 부하의 입에 밥을 떠넣어주던 인민군 지휘관과, 유격대로 자원했던 그때 그 친구들은 어느 두메에 묻혔는지 어느 강물에 떠내려갔는지 알 길이 없다. 50년 세월을 건너뛰어 그는 지리산으로 남강으로 기억을 찾아나섰다. 집필에 꼬박 3년이 걸렸다.
왜 지금에야 이 얘기를 꺼냈을까. 그는 “행여나 그것이 발효돼 밖으로 새어나가면 어쩌나 하는 심정”으로 응어리를 꽁꽁 동여매고 살아왔다고 한다. 서슬 퍼런 시절 가족들의 안전도 고려했지만, 자신의 상처도 너무 커서 “담을 쌓고” 지냈다. 병원은 그에게 “도피처이자 안식처였다”. 부산여자간첩단 사건에서 풀려나자마자 류씨는 의사면허시험에 합격했고 곧이어 결혼했다. 남편 고 김정수(서울대 수학과 교수)씨는 199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늘 든든한 울타리였다. 아내의 ‘전력’에 걸려 번번이 뜻을 접어야 했을 때에도 내색 한번 하지 않던 남편이었다. 덕분에 자녀들은 이런 사연을 전혀 몰랐다. 1999년에 시집을 냈을 때 자녀들의 충격은 컸고, 이번에 책 출간도 만류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2002년 미선이 효순이 사건이 난 뒤 슬픔에 떨며 썼던 시가 북쪽에서 노래로 만들어진 바람에 류씨는 1년 전부터 공안당국의 조사를 받았고, 지난 7월 국가보안법상 통신회합죄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류씨는 자녀들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너희와 의식이 다르다. 이제 혈압도 오르고 밤중에도 가슴이 벌컥거리는데 언제 어떨게 될지 모르겠다. 기어이 쓰고 가야겠다.”
오랜 세월 묻어뒀기 때문일까. 기억의 빗장을 열자 몸과 마음으로 아팠던 모든 것들이 원형 그대로 생생하게 떠올랐다. 사람들의 눈빛, 음성, 체취까지도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그는 오감으로 반응하며 글을 썼다. 리영희 선생이 그의 책을 읽고 감상문을 써보냈다. 오랜 세월 속내 털어놓을 친구 한명 없이 ‘벙어리처럼’ 살아온 그는 리영희 선생을 만나 “우리 친구 하자”고 청했고, 리영희 선생은 “친구 말고 동무 하자”며 그를 꼭 껴안아줬다고 한다. 그는 그날 밤 설렘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기억의 일단을 털어낸 류씨는 이제야 “살아남은 자로서의 소명을 조금은 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부모와 조부모 세대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었던 역사를 젊은이들이 알아줬으면 한다”면서 “남쪽만이 내 조국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리영희 선생과 ‘동무’가 되다
류씨는 고문 후유증으로 한쪽 귀를 거의 쓰지 못하지만, 인터뷰를 하는 동안 눈물을 흘리다가도 따뜻한 웃음을 지었다. 눈물과 웃음이 한 얼굴에 사이좋게 어울리는 모양이 인상적이었다. 서울 방배동 그의 집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마당에서 사진 촬영을 했다. 현관에서 슬리퍼를 찾아들고 마당쪽 창문으로 나서는 그의 경쾌한 동작에서 가난했지만 정이 넘쳤던 고향 마을 경북 금릉군 남면 지경리의 야트막한 토담을 뛰노는 다섯살 어린 소녀가 겹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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