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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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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악마를 만나지 않았다”

등록 2005-09-07 00:00 수정 2020-05-03 04:24

한반도의 ‘조정자’ 결심한 전미변호사협회 한국평화프로젝트팀 에릭 시로트킨…미국의 적대적 대북인식 전환 주장, 곧 미 의회에서 북한에 대해 증언

▣ 글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에릭 시로트킨(54)은 동북아 한 귀퉁이에 매달려 있는 한반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거의 알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2003년 변화의 계기가 불현듯 찾아왔다. 그해 북한에서 미국과 캐나다의 법률가를 초대해,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이후 한국 관련 책과 자료를 접하게 되면서, 한반도의 “작은 조정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곧바로 전미변호사협회(National Lawyers Guild USA) 내에 ‘한국평화프로젝트’(Korean Peace Project)를 만들었다. 한국평화프로젝트는 40~50명의 변호사들과 평화 활동가들이 중심이 되고 있다. 미국과 북한간 대표단 교환, 학생 교류, 법률 서적 교환 등이 주된 프로그램이다. 단체가 추구하는 것은 “미국 정부의 태도를 바꾸고 한국인들의 평화 의지를 뒷받침하는 것”이다.

“내가 사는 주에 2천개의 핵무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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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의 의장을 맡은 시로트킨씨에겐 이번이 첫 방한이다. ‘아태 지역의 평화·인권·공존’을 주제로 9월2~3일 서울에서 열린 제4차 아시아·태평양 지역 법률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앞서 그는 변호사 등 단체의 다른 회원 4명과 함께 평양에서 열린 8·15 해방 60주년 행사에 참석해,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을 만났다.

<한겨레21>은 지난 8월31일 안국동 느티나무카페에서 시로트킨을 만났다. 그는 나라 밖의 일에 무관심한 대부분의 미국인들과 달리, 국제 사회에 대한 ‘부채 의식’을 잔뜩 지닌 미국인이었다. 그는 “미국이 나머지 세계에 대해 제대로 알고, 군사적이 아닌 평화적인 접근을 하도록 태도를 바꾸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말했다. 얘기는 자연스럽게 북한을 바라보는 미국의 잘못된 시각을 비판하는 것으로 빠져들었다.

그는 부시가 이란, 시리아 등과 함께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것은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선과 악의 기준은 매우 얇다. 명확하지 않다. 그 누구도, 어느 나라도 선과 악을 알 수 없다.” 즉, 부시의 악의 축이라는 것이 매우 자의적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다. 미국에서 해마다 수십명의 죄수가 처형되고, 이라크에서 이라크인들을 고문하고, 관타나모 베이 수용소 운영 등 미국의 ‘악’한 면이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절대선에 놓고 다른 나라의 문제만을 일방적으로 제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게 그의 인식이다. 미국의 문제를 스스럼없이 제기하는 그는, 자신의 나라를 ‘오만한 제국’으로 표현했던 하워드 진이나 노엄 촘스키를 떠올리게 했다. 그는 모든 국가가 각기 다른 정도의 인권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북한의 인권 문제를 얘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미국과 북한이 이러한 문제에 상호적으로 얘기해야 한다.” 그래서 지난해 미 의회가 북한인권법을 통과시킨 것도 잘못된 접근이라고 본다. 그는 어떤 느낌이었는지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8월 북한을 방문해 한국전쟁에서 미군에 의해 가장 많은 3만4천여명의 양민이 학살된 것으로 알려진 황해도 신천을 들렀다고 한다.

에릭 시로트킨의 자신을 먼저 봐야 한다는 ‘거울론’은 북핵 문제를 접근하는데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사는 주에 2천개의 핵무기가 있다. 그곳에 살면서 내가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겠나?”

그래서 북한을 무조건 비난하거나 손가락질하는 것은 평화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길거리에서 모르는 누군가를 만났다고 치자. 그를 향해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학대하고, 도둑질을 하고, 가족에게 나쁜 짓을 하지 않았느냐고 막무가내로 혼낸다면, 도대체 당신이 뭔데 그러냐는 말이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그가 당신의 친구라면, 얘기를 귀담아들을 것이다.” 신뢰할 수 있는 관계가 없으면, 서로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의 인권, (핵)무기를 얘기할 수 있겠지만, 평화를 만드는 첫 번째 단계는 앉아서 (서로의) 얘기를 듣는 것”이라고 말했다. ‘보지 않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라는 격언이 있듯이, 그의 북한 접근법도 딱 그렇다. 그는 “북한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면 편견에 찬 자신의 이미지에만 갇히게 되기 십상”이라고 우려했다.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북한과 관계를 맺어가는 게 필요하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래야 북한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을 방문해 “악마가 아닌 평범한 북한 사람들을 만났다”고 강조했다. 얘기를 듣는 것과 현실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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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된 시각 위해 모든 지원을 거부

그는 이러한 태도와 노력을 갖추지 못한 부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현 부시 정권이 아시아 지역 내에 긴장을 조장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9월2일 아·태 변호사회의에서 발표한 ‘제국의 종말’이라는 글에서도 “(부시 정부가)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무너져가는 제국의 영화를 되살리고, 군사력을 이용해 자신의 입맛에 맞게 세계를 바꿔놓으려 한다”고 주장했다.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전략가 가운데 하나인 폴 울포위츠가 만든 ‘방어계획지침’과 보수 정치인들과 방위산업체 중역들로 구성된 ‘신미국 100년 사업’, 새뮤얼 헌팅턴이 쓴 <문명의 충돌>을 그 이론적·실천적 근거로 들었다. 부시 정부가 유엔 헌장을 어겨가며 이라크를 침공하고, 필리핀과 일본 오키나와 주둔 미군을 증강시키고, 한반도의 통일이나 지속적인 평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봤다. 그는 “부시 행정부와 미국의 정치인들이 한반도에서 미치광이 같은 짓을 하려고 할 때, 부시에 대항하는 안전망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한반도 평화를 위한 환경 조성에 몰두하는 까닭이다. 그는 자신의 나라가 한푼도 들지 않는 평화 대신에,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뺀 전세계 700곳에 군사기지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쉬이 납득하지 못했다.

한국평화프로젝트의 궁극적인 목적을 묻자, 그는 개인적인 의견을 전제로 미국의 변화를 꼽았다. “미국이 군산복합체를 먹여살리고 거기에 자원을 쓰는 것을 다른 모델로 바꿔야 한다. 다른 나라를 지배하고 이끄는 것이 아니라 국제사회 구성원의 하나로 참여해야 한다.” 시로트킨은 미국에 평화를 사랑하는 수백만명이 있다는 얘기를 빼놓지 않았다. 그는 9월6~10일 또 한번 북한을 다녀온 뒤 미국의 내셔널프레스센터에서 방북 결과를 브리핑하고, 9월 말에는 미 의회에서 북한에 대한 증언을 할 예정이다. 평화주의자인 그와 그의 단체는 미국, 남북 정부 어디에서도 재정적 지원을 받지 않으며, 자신들의 돈으로 남과 북을 방문한다. 제3자적 관점에서 균형된 시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의 노력이 현실을 얼마나 변화시킬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한반도의 운명이 미국에 의해 크게 좌우되는 냉혹한 현실에서 미국의 적대적 대북 인식의 전환을 주장하는 그와 그의 단체의 노력은 결코 작지 않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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