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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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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 세계의 비참 속으로

등록 2005-02-24 00:00 수정 2020-05-03 04:24

지구촌 곳곳에서 의료 활동 벌이는 한국인 ‘닥터 노마드’…의사로서의 행복을 찾아서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총성이 울리면 달려간다. 비명이 들리면 찾아간다. 한반도가 아니다. 지구촌이 무대다. 안락한 생활을 뿌리치고 지구촌의 슬픔과 연대하는 한국인 의사들이 있다. 틈날 때 찾아가는 봉사활동이 아니라 인생의 한 부분을 건 자원활동이다. 노마드(유목민)들이 풀을 찾아 초원을 떠돌듯, ‘닥터 노마드’들은 풀뿌리 민중을 찾아 세계를 돌아다닌다. 민중의 상처가 그들을 머물게 하고, 민중의 웃음이 그들을 쉬게 한다. 그들은 “우리도 이제 지구촌의 아픔을 돌볼 때가 됐다”고 입을 모았다.

AIDS 약값도 없는 환자들

의사 전재우(35)씨는 2004년 2월부터 2005년 1월까지 아프리카 케냐의 호마베이에 머물렀다. 빅토리아 호수 근처의 호마베이 지방은 성인의 35% 이상이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인으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전씨는 국경 없는 의사회(MSF)의 호마베이 HIV 클리닉의 지역 순회진료 책임자로 일했다. 최초로 MSF를 통해 나간 한국인 의사다. 단기 해외활동에 나서는 의사들은 가끔 있지만, 장기 임무를 수행하는 의사는 아직 드문 형편이다. 전씨에게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HIV 감염인 친구들이 있었고, 그들의 고통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전공의를 마치고 보건소에서 일했다. 전씨는 “한국에서 의사로 있는 것이 재미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MSF에 지원했다. AIDS 대륙, 아프리카가 그를 불렀다.

케냐에 도착했다. 바쁜 일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호마베이 HIV 클리닉에는 6천명의 감염인이 등록돼 있고, 2600여명이 항에이즈 치료제 처방을 받고 있다. 외국인 의사 서너명과 현지인 의사 예닐곱명이 이들을 돌본다. 전씨는 하루 40여명의 HIV 감염인을 진찰했다. 바쁠 때는 화장실 갈 짬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차비가 없어 대여섯 시간씩 걸어오는 감염인들을 무심하게 볼 수 없었다. 한달에 AIDS 약값 500실링(약 6천원)이 없어 약을 못 먹는 환자들을 보면 가슴이 저몄다. 500실링이면 케냐인 일주일 생활비다. 심지어 “약보다 밥을 달라”고 말하는 환자들도 있었다. 전씨는 “이회창씨 아들 같은 사람이 세상에 많다는 사실도 알았다”고 말했다. 180cm에 39kg인 남자, 160cm에 29kg인 여자, 태어난 지 6개월이 되는 4.5kg 아기…. AIDS로 숨진 가족을 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전씨는 “호마베이는 일부다처제 사회”라며 “남편이 AIDS로 숨지고 두 번째, 세 번째 부인도 AIDS로 죽고 첫 번째 부인만 살아남아 약을 받으러 오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일주일에 한두번은 시골로 순회 진료를 다녔다. 진료를 나갈 때마다 궁금한 얼굴들이 있었다. 발길을 끊은 감염인들이었다. 소식이 끊어진 감염인 여인이 어느 날 순회 진료소에 와 쓰러진 적도 있었다. 자궁외임신이었다. 여인은 남편이 숨진 뒤 친척에게 몸을 주고 연명했다고 한다. 전씨는 “이런 일이 일상이었다”고 돌이켰다. 처음에는 마음고생도 했다. MSF 클리닉의 외국인 활동가 중 다수를 차지하는 유럽인의 토론 문화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영어가 장벽이었다. 전씨는 “한국에서는 조용히 있으면 묵묵한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서구에서는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진다”고 전했다.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소통이 원활해졌다.

내전의 총성 속에서 응급구호 활동

전씨에게 아프리카는 고통의 땅이 아니다. 비록 초가집에 살고, 월 110만원을 받았지만 행복했다. 전씨는 “먹을 것 다 먹고, 놀 것 다 놀고 즐겁게 지냈다”고 돌이켰다. 의사로서 자부심도 회복했다. 그는 “한국 의사는 비즈니스맨이지만, 케냐에서 의사는 생명을 구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한국에서 평생 봐도 못 볼 HIV 감염인을 한해 만에 다 봤다”며 “한국에서 AIDS 클리닉을 내도 되겠다”고 농담을 했다. 하지만 그는 한국에서 AIDS 클리닉을 내는 대신 파리에서 머물며 다음 활동지로 갈 준비를 하고 있다. 앞으로 몇해 동안 해외 자원활동을 계속할 계획이다.

의사 김상수(42)씨는 지난해 여름 수단 다푸르의 모네에 머물면서 응급구호 활동을 했다. 역시 MSF를 통해서였다. 결혼을 해 두 아이를 둔 가장인 그는 “짧고 굵게 하자”고 생각했다. 두달 동안 분쟁지역 긴급구호활동에 자원했다. 김씨는 “개인병원을 접으면서 기회다 싶어서 지원했다”고 말했다. 해외활동은 그의 오랜 꿈이었다. 1994년 르완다 내전 때 난민촌에서 활동한 경험도 있었다. 다푸르는 소수의 아랍계가 다수의 흑인들을 공격해 대량학살이 벌어진 곳이다. 아랍계인 수단 정부는 다푸르의 아랍계 민병대를 암암리에 지원해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고 있다. 그는 MSF 모네 병원의 응급실 책임자로 일했다. MSF 병원은 인구 8만명의 모네에서 유일한 의료기관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아침이면 병원 마당에 환자들이 누워 있었다. 오전에는 응급실 회진을 돌고, 오후에는 환자들을 진찰했다. 저녁에는 총성이 자주 들렸다. 낮에도 총을 든 군인이 병실을 돌아다녔다. 총상을 입은 어린이가 실려온 적도 있었다.

고된 생활이었지만, 짬짬이 아랍어도 배우면서 적응했다. 8월 초 누군가 MSF 모네 병원을 습격한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MSF는 의료활동뿐 아니라 인권침해 감시 기능을 한다. 그래서 병원 습격 시나리오는 현실성이 있었다. 활동가 회의에서 병원 인원을 9명에서 7명으로 줄이기로 결정했다. 병원 책임자는 “응급실은 활동폭을 넓힐 때 의미가 있는 분야”라며 “위기 때는 응급실 기능부터 줄이자”고 말했다. 결국 응급실 책임자인 김씨가 떠나기로 결정됐다. 김씨는 “뜻밖의 상황이라 씁쓸했지만 책임자의 판단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수단에서 예정된 자원활동 기간을 채우기를 원했지만, 마땅한 자리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두달의 자원활동 기간 중 40일만 채우고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허탈한 마음으로 서울 충정로에 모아의원을 차렸다. 하지만 ‘닥터 노마드’의 꿈은 계속된다. 그는 “1994년 르완다, 2004년 수단을 갔듯이, 앞으로 10년 뒤에도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해마다 긴급재난 구호활동

의사 김현태(35)씨는 전쟁과 재앙이 닥칠 때마다 진료 배낭을 꾸린다. 2003년 이라크, 2004년 파키스탄, 2005년 인도네시아에 잇따라 긴급재난 구호활동을 다녀왔다. 안정된 숙소도 없는 긴급재난 구호활동의 성격상 1주일씩의 짧은 활동이었다. 하지만 위급한 곳에 필요한 도움을 주는 보람이 컸다. 이라크에는 미국이 종전을 선언하기 일주일 전에 들어갔다. 보건소장은 도망가고, 치과의사 한명만 남은 바그다드의 지역 보건소를 거점 삼아 진료활동을 했다. 파키스탄에서는 사막에 진료소를 세웠다. 2005년 새해는 인도네시아 반다아체에서 맞았다. 그가 속한 국제기아대책기구 긴급구조팀은 세계에서 쓰나미의 피해가 극심했던 반다아체 지역에 가장 빨리 들어간 의료진이었다. 김씨는 “인간이 일으킨 전쟁보다 자연이 만든 재해가 더 무섭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며 “생존자들도 외상후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일하는 경북 포항의 한동대 선린병원은 기독교 선교기지 병원이다. 이 병원에는 ‘닥터 노마드’가 많다. 의사 2명은 이미 해외 의료활동을 나갔다. 그도 “언젠가는 장기 해외활동의 꿈을 이루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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