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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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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땅에 개혁은 오는가

등록 2004-11-19 00:00 수정 2020-05-03 04:23

아라파트 사후의 팔레스타인과 중동 정세… 주민들은 구시대적 인물 집권보다 자치정부 개혁 원해

▣ 김동문 전문위원 yahiya@hanmail.net

‘사막의 불사조’ ‘9개의 목숨을 가진 고양이’로 불리던 아라파트가 떠났다.

그에 대한 평가는 참으로 다양하다. “그는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 지도자였을 뿐 아니라 알카에다를 비롯해 세계를 휩쓸고 있는 테러의 아버지였다” “그의 최대 실수는 테러에 의존했던 것이고, 그의 가장 큰 업적은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수많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상실의 슬픔을 안겨준 유대인의 살인자가 사라졌다”는 등 극언도 적지 않다. “그의 심장은 멈췄지만 그는 여전히 위대하다. 우리는 당신의 뒤를 좇을 것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전쟁과 평화의 지도자가 사라졌다”는 극찬도 쏟아진다. 아라파트에 얽힌 전설들도 그에 대한 평가만큼이나 끝이 없어 보인다.

아바스·쿠레이 지지도 바닥

예상과 달리 아라파트 사망이 팔레스타인이나 중동 정세에 가져올 변화는 그리 크지 않은 것 같다. 지난 3월22일 아메드 야신 하마스 지도자가 이스라엘의 표적 공격으로 암살될 당시보다 팔레스타인인들이 받는 충격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그의 부재로 인한 혼란도 미미할 것으로 예상된다.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는 물론 요르단에 거주하고 있는 다양한 계층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아라파트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보였다. 가자지구 주민들은 서안지구 사람들에 비해 아라파트에 우호적이었지만 최근 들어 하마스 지지로 돌아서고 있었다. 장기 집권에 따른 부패와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상 부진으로 팔레스타인 주민은 과격 무장조직 지도자인 하마스를 더 좋아하게 됐다.

하지만 아라파트 축출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좀처럼 듣기 어렵다. 그가 지닌 상징성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아라파트의 죽음은 하마스와 파타로 대별되는 팔레스타인 저항세력의 양대 축이 무너졌음을 의미한다. 상징성을 바탕으로 권위를 누려온 인물들이 사라진 것이다. 아라파트 사후의 지도자는 이제 스스로의 능력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탈권위, 탈상징의 시대에 서 있다. 이스라엘이 쌓아놓은 분리장벽에 둘러싸인 채 하루하루 힘겨운 삶을 살아가야 할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아라파트의 부재는 망각 속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떡 줄 사람들은 생각도 않는데 아라파트 이후의 권력 승계 문제를 놓고 설왕설래한다. 아라파트 후계자로 자천타천으로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인물들이 있다. 대표주자인 마무드 아바스(69) 전 총리나 아메드 쿠레이(66) 현 총리 모두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지지도는 바닥을 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지난 9월에 이뤄진 팔레스타인 여론조사에 정평이 난 비르제이트 대학교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두 사람의 차기 대권후보로서의 지지도는 각각 0.5%와 1% 아래였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선명한 투쟁성과 대중적인 인지도가 결합된 인물을 선호하고 있다. 이는 팔레스타인 주요 인물들의 선명성 경쟁을 촉발할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선명성 경쟁이 이스라엘에 대한 무력 투쟁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영국에서 발행되는 알하야의 웹사이트에서 진행 중인 아라파트 후계 지도자를 묻는 온라인 여론조사에서는 모하마드 다흘란(43) 전 가자지구 치안대장이 단연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또 비르제이트 대학교의 여론조사에서는 마르완 바르구티(45)가 가장 높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차기 대권을 꿈꾸는 이들은 어떤 형태로든 아라파트를 넘어서야 한다. 아라파트가 그간 팔레스타인 저항운동의 상징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 때문에 그를 둘러싼 부패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면서도 그가 건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사라진 지금 아라파트는 구시대의 상징이 되고 말 것이다. 물론 급작스럽게 구시대 청산과 아라파트 넘어서기를 내걸고 나올 인물은 없다. 그렇지만 그동안 제기돼온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내의 인적 청산 과제와 개혁 등에 대한 주민들의 여론을 감안하면 아라파트가 남긴 잔재의 청산은 시간 문제일 뿐이다. 또 아라파트의 재산과 비자금 상당 부분의 처리를 두고 안팎에서 홍역을 치르게 될 것이다. 그는 많게는 50억달러(약 5조6천억원)에 이르는 비자금을 조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아라파트가 주도해온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주요 인물들의 지지도는 바닥을 헤매고 있다. 그래서 개혁은 절실한 과제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도 개혁의 대상이지, 개혁의 주체일 수 없었다. 대외적으로 독립을 실현하는 일, 대내적으로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는 일이 팔레스타인인들이 당면한 최대 과제다.

무장단체의 움직임이 변수

이런 상황에서 부패 의혹에 휘말려 있는 구시대적 인물들이 아라파트 사후에도 기득권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민심이 요동치고 있다. 아라파트 후계 세력을 형성하려는 이들은 아메드 야신이나 아라파트 같은 상징성을 갖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권위가 도전받을 가능성도 크다. 즉, 상징성이라는 방패막이가 없는 구시대 인물들로서는 직접 민심을 상대해 지지를 이끌어낼 대안이 별로 없다. 그러면 물러나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의회와 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내에 실세라는 발판을 지렛대 삼아 현실론으로 승부를 걸 것이다. 결국 민심보다 기득권 유지에 더 관심 있는 정치권 인사들은 그를 중심으로 권력 분점과 역할 분담에 이를 것이다. 그렇지만 민심을 고려하지 않는 이런 새로운 판짜기일지라도 주민들의 저항에 부닥칠 가능성은 커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슬픈 자화상이다.

아라파트의 사망으로 민중봉기(인티파다)가 종결될 가능성을 제기하지만 이는 섣부른 주장이다. 아라파트는 인티파다의 중심에 서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라파트를 추방이나 암살 등으로 제거하려던 이스라엘의 시도는 사실상 그의 죽음으로 반쯤의 성공을 거둔 셈이다. 이스라엘 샤론 정부가 아라파트를 제거하려 한 것은 그의 부재를 통해 힘의 공백을 이뤄내고, 팔레스타인을 무력화하겠다는 의도였다. 아라파트의 죽음이 곧장 권력암투로 이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럴 만한 대중적인 지지도와 조직력을 갖춘 인물들이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마스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의 움직임이 변수이다. 일부 저항운동 진영에서 아라파트의 죽음을 이스라엘의 음모로 몰면서 투쟁을 자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새로운 권력 구성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미국의 팔레스타인 정책 기조도 유지될 것이다. 미국은 유엔이나 국제 여론이 모두 비판한 팔레스타인 지역 분리장벽 건설 등에서도 맹목적으로 이스라엘을 두둔해왔다. 그런 부시 행정부의 외교정책 기조가 집권 2기를 맞이했다고 크게 변화할 조짐은 없어 보인다. 아리엘 샤론 정부의 팔레스타인 강경정책 기조도 크게 후퇴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백기 투항을 협상의 전제조건으로 내건 현재의 팔레스타인 협상 기조가 아라파트의 사망으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할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 그동안 샤론 정부나 부시 행정부는 아라파트를 ‘평화의 최대 장애물’이라고 꼬집어왔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도 아라파트는 믿음직한 우군은 아니었다.

미 정책·중동 정세 변화 없을 듯

팔레스타인은 이제 영어 좀 구사하고, 이스라엘이 좋아할 인물들을 내세워 협상을 재개할 것으로 전망된다. 부시는 아라파트의 사망을 계기로 “새로운 팔레스타인 지도부가 건설되면 중동 평화를 위한 기회가 열리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스라엘 샤론 정부도 마찬가지다. 이미 미국이나 이스라엘 정부에서는 언론이나 간접적인 형태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쪽 자신들이 선호하는 인물에게 협력 의사를 공식적으로 내비친 셈이다.

아라파트의 사망이 중동 정세에 미칠 영향은 극히 미미하다. 아라파트가 다른 중동국가들에 큰 변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중동국가들의 팔레스타인 정책도 큰 변화가 일어나기 쉽지 않다. 이라크 상황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아랍권은 한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아랍 민족주의’니 ‘이슬람 대의’니 하는 것들은 흘러간 노래일 뿐이다. 이런 판에 팔레스타인 문제를 두고 자기 일처럼 나설 나라도, 지도자도 없다. 명분이나 이념보다 실리를 앞세우는 것이 중동의 현실이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팔레스타인인들만의 골칫거리일 뿐이다. 다만 이라크와 팔레스타인 사람들만 서로 동병상련을 느낄 뿐이다. 그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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