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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코리안 드림’이 끝났네 / 신윤동욱 기자

등록 2004-11-05 00:00 수정 2020-05-03 04:23

타이인 ‘캄푸’로 밝혀진 기억상실증 환자 샤밈… 불법체류 마감하고 귀국해 치료 계속

▣ 글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잘 가요, 캄푸.”

2004년 10월30일 경기도 평택시 굿모닝병원의 중환자실에서는 ‘즐거운’ 환송회가 벌어졌다. 병원 직원들이 병상에 누워 있는 외국인을 위해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박수를 쳤다. 아직 기억을 찾지 못한 환자는 멀뚱멀뚱 눈을 부라릴 뿐이었지만, 그들 돌봐온 간호사들의 눈에는 물기가 스쳤다. 환자를 대신해 촛불을 끈 백은경 간호사는 “불가능할 줄 알았던 환송회가 현실이 돼 너무 기쁘다”며 웃었다. 교통사고로 입원한 지 889일 만에 가족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가는 샤밈, 아니 캄푸의 환송회였다.

수첩에 남겨진 타이 여성과 연락돼

이 최초 보도한 ‘샤밈’의 신원이 밝혀졌다(2004년 9월16일치 제526호 ‘누가 이 외국인을 모르시나요’ 참고). 은 이 기사를 통해 2002년 5월26일 충남 천안시 성환읍의 국도변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기억을 상실한 채 2년 넘게 병상에 누워 있는 ‘샤밈’의 사연을 보도한 바 있다. 샤밈은 사고 당시 지니고 있던 유일한 단서인 수첩을 근거로 방글라데시인으로 추정됐다. 샤밈이라는 이름도 수첩 첫 장에 적힌 이름에서 따왔다. 하지만 확인 결과, 그의 이름은 ‘캄푸 프롬쁘라서트’였다. 나이는 27살, 국적은 타이. 타이 동북부의 시골마을 렁부아람푸 출신으로, 가난한 시골 가정의 2남4녀 중 차남이었다. 사실상의 가장으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한국으로 왔다고 한다. 언론의 도움으로 어렵게 가족을 찾은 캄푸는 2004년 10월30일 아버지, 누이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갔다.

캄푸의 가족을 찾은 사연은 10월26일 방송된 문화방송 <pd> ‘어느 외국인 노동자의 실종 2부, 불법체류자 캄푸의 귀향’편에 소개됐다. 캄푸가 2002년 5월26일 교통사고 당시 지니고 있던 수첩이 결정적 단서였다. 그 수첩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앞쪽과 다른 필체로 적힌 5개의 전화번호가 있었다. 한달 넘게 신원확인 작업을 벌여온 <pd>팀이 ‘마지막 희망’을 걸고 5개의 전화번호를 수소문한 결과, 그 중 1개가 한국 남성과 결혼한 타이 여인, 팟찰리의 전화번호로 밝혀졌다. 현재 중국에 체류 중인 팟찰리와 통화를 통해 캄푸의 존재가 처음 확인됐다. 캄푸가 교통사고를 당했던 당시 경기도 평택에서 남편과 함께 농장을 운영했던 팟찰리는 전화 통화를 통해 “우리 농장에서 일하다 사라진 캄푸인 것 같다”고 확인해주었다.
이에 앞서 평택외국인노동자센터가 올여름 수첩을 토대로 탐문을 했으나 캄푸의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다. 평택외국인노동자센터가 경찰로부터 넘겨받은 수첩의 복사본에는 다른 필체로 적힌 마지막 장이 빠져 있었던 탓이다. 황재식 평택외국인노동자센터 소장은 “경찰이 수첩에 적힌 전화번호만 꼼꼼히 추적했더라도, 아니 복사만 제대로 해주었더라도 캄푸가 2년 넘게 병상에 홀로 누워 있지는 않아도 됐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경찰의 무성의한 수사가 캄푸의 비극을 불러온 것이다.

경찰의 무성의, 고용주·친구들의 침묵

신원확인 작업은 일사천리로 풀리기 시작했다. 파찰리가 소개한 캄푸의 친구들이 병원으로 찾아와 캄푸의 신원을 확인했다. 캄푸의 사촌형도 사고 현장 인근의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타이 대사관에 보관 중이던 여권 복사본을 통해 캄푸의 신원이 공식 확인됐다. 캄푸가 사고 전까지 머물렀던 농장의 방에서는 캄푸의 사진, 여권 복사본 등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물건들이 나왔다. 하지만 주인은 “캄푸가 전에도 월급을 받고 사라진 적이 있어서 이번에도 그런 줄 알았다”고 변명했다. 캄푸의 친구들은 “연락이 두절돼 살해당했다고 생각했다…”며 말꼬리를 흐렸다. 모두들 불법체류 신분인 탓에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고 캄푸를 찾아볼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경찰의 부주의와 농장주인의 무성의, 친구들의 침묵 탓에 캄푸는 평생을 병원에서 홀로 지낼 위기에 놓였던 것이다.
캄푸는 2000년 8월 관광 비자로 한국에 입국했다. 한국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먼저 입국해 있던 사촌형과 함께 안산의 공장에서 일하다 성환의 농장으로 일자리를 옮겼다. 사고가 나던 날, 캄푸는 인근 공장에서 일하던 타이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나오던 길이었다고 한다. 그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농장으로 돌아가다가 국도에서 사고를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pd>팀은 캄푸의 가족을 찾아 타이로 날아갔다. 그의 고향은 가난한 농촌 동네였다. 원래 넉넉지 못한 집안은 캄푸의 실종으로 생계조차 어려운 형편이었다. 캄푸를 한국으로 보내기 위해 큰 빚을 졌기 때문이다. 캄푸를 보내기 위해 저당 잡힌 논은 이미 빚쟁이의 손에 넘어간 상태였다. 아버지 머누(56)는 “오랫동안 소식이 없어 캄푸가 죽은 줄로만 알았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가족들은 캄푸를 만나기 위해 한국으로 갈 여비도 없는 형편이었다. 결국 <pd>팀이 여비를 지원해 아버지 머누와 여동생 부아라(21)가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마침내 캄푸는 가족과 상봉했다. 낯선 사람을 보면 표정이 굳어지는 캄푸는 가족들을 만나자 얼굴이 풀어졌다. 10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 사진을 손으로 움켜쥐기도 했고, 사촌형이 타이 노래를 불러주면 웃기도 했다. 아직 오른쪽 손과 다리는 마비된 상태지만, 캄푸의 마음은 점점 풀어지고 있다.
30일 환송회가 끝난 뒤, 캄푸의 아버지와 여동생이 병원으로 찾아왔다. 아버지가 타이어로 말을 하자 캄푸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허공을 맴돌던 시선도 가족들을 응시했다. 아버지가 “이제 집으로 가는 거야”라고 말하자 희미한 웃음을 머금기도 했다. 면회를 마친 아버지가 중환자실을 나가면서 “안녕”이라고 말하자 오른손을 흔들기도 했다. 캄푸를 돌보아온 홍순애 간호사는 “가족들을 만나면서 캄푸의 얼굴이 부쩍 좋아졌다”며 “몸이 빨리 회복되기는 어렵겠지만, 가족들과 함께 있으면 잃어버린 기억과 모국어를 빨리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캄푸는 다행히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다. 캄푸가 받은 교통사고 보상금은 모두 6천여만원. 교통사고 가해자가 예치한 법원 공탁금 1천만원과 보험회사에서 지급한 보상금 5천만원을 합친 금액이다. 산업연수생으로 들어온 이주노동자가 재해를 당하면 대개 한국 임금 기준으로 2년치 보상금을 받고, 나머지 노동력 손실분에 대해서는 출신국가 일용직 노동자 임금으로 계산해 받게 된다. 산업연수생이 아닌 관광 비자로 입국한 캄푸는 1년치만 한국 임금 기준으로 받았고, 나머지는 타이 기준(약 22만원)으로 보상을 받았다. 한국인 교통사고 피해자에 비해서는 턱없이 적은 금액이지만, 타이의 가족들에게는 적지 않은 목돈이다. 캄푸는 몸을 바쳐 ‘코리안 드림’을 이룬 셈이다.

불법체류자의 악조건은 여전하다

캄푸의 가족들은 이날 저녁 8시15분 비행기로 타이로 돌아갔다. 캄푸는 타이 방콕에서 다시 진단을 받고, 고향집으로 돌아갈 계획이다. 그를 보내면서 병원 관계자들은 눈물을 글썽였고, 한 평택 시민은 여비에 보태 쓰라며 성금을 보내오기도 했다. 하지만 교통사고 가해자와 담당 경찰은 끝내 병원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캄푸가 떠나던 날도 불법체류 이주노동자 단속은 그치지 않았다. 또 다른 캄푸가 생길 ‘조건’은 여전한 것이다.</pd></pd></pd></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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